나는 힘들 때 글을 통해 치유를 받는 편이다. 특히 아무와도 대화하고 싶지 않을 때면 집에 틀어박혀 책만 읽기도 하고 망망대해와도 같은 온라인 세상에서 나를 구원해줄 활자들을 찾아 열심히 허우적거리기도 한다. 참혹한 이별을 맞이했던 그날도 어김없이 그랬다. 부서질 듯 연약한 뗏목에 겨우 지탱한 채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을 찾아서, 나 같은 사람을 치유해줄 문장을 찾아 어둡고 큰 바다를 헤엄치고 있었다.
그러다 한 커뮤니티에서 마치 내가 쓴 듯한 내용의 글을 마주했다. 아무리 다시 읽어도 내 이야기 같았다. 서른이 넘어까지 부단히도 연애를 했지만 어김없이 마주하고 말았던 참혹한 결말들. 남들은 연애든 결혼이든 다 잘하고 사는데 왜 나만 이 모양 이 꼴인지. 잘 해내고 싶어 발버둥 쳐보지만 결과는 늘 뒤처지는 쪽. 누구든 나를 오래 만나면 결국은 등을 돌릴 것만 같은 불안감까지.
글의 주인공은 망한 연애에서 오는 비참함을 담담하게 풀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비참함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어떤 생각을 하며 시간을 보냈는지 알려주었다. 우선 망한 연애는 그냥 연애가 망한 것뿐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누군가에게 칼을 꽂지 않았다면 너무 오래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누군가를 너무 오래 원망할 필요도 없다고 덧붙였다.
내가 그동안 망한 연애를 반복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맞닿아 있었다. 나는 원망이 길었고 자꾸만 과거로 후퇴하려는 습관을 갖고 있었다. 연애가 망한 상황이라면 그다음으로 해야 할 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인데. 글쓴이 말대로 불행한 나보다는 행복한 내가 나에게 더 이로울 테니까. 그런데 나는 왜 그러질 못했는지.
물론 그게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지만 나를 ‘불행한 나’로 놔두는 걸 더 이상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 누구를 만나든 ‘행복한 나’로 살고 싶었다. 내 옆의 존재로 인해 나의 일상과 자존감이 흔들리는 모습을 그만 보고 싶었다. 그래서 글의 조언대로 조금씩 할 수 있는 좀 더 나은 일들을 시작해봤다. 좀 더 나은 일은 별 게 아니었다. 일상을 집중해서 열심히 살고 내가 원하는 삶의 방향을 향해 의식적으로 걸어 나가는 것.
짧은 시간이었지만 열심히 살았다. 언제든 좋은 사람을 알아볼 수 있게,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했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사람의 기준을 종이에 적어 나부터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함을 늘 잊지 않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참 신기하게도 단단해져 가는 자아와 일상 속에서 좋은 사람을 먼저 알아보게 되는 반짝이는 경험을 했다.
그 사람을 본 순간 깨달았다. 글쓴이의 말이 맞았구나. 내게도 올까 싶었던 순간. 이게 맞는지 물어볼 필요도 없는 확신. 참 다행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사람을 놓치지 않기 위해 먼저 마음을 표현했다. 누군가에게 받는 선물 중 가장 황홀한 ‘고백’이라는 선물을 그에게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제나 꼬리표처럼 달고 살던 불안이라는 감정은 이제 내게 거리가 먼 이야기가 됐다. 감사한 일이다.
글쓴이는 살다가 힘든 일이 또 찾아오더라도, 죽을 것 같은 폭염을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던 마음을 잊지 말라 했다. 폭염이 언젠가 끝날 것임을 아니까 지금 이렇게 더운 건 괜찮아했던 그 마음. 정확한 출처가 없는 글이라 고마움을 표현할 길이 없어 이 글을 썼다.
덕분에 걸어 나올 수 있었어요. 진심으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