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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꿘녜 Jan 28. 2021

분홍빛 모험


취향을 알기 전, 내 옷장은 온통 검은 옷들로 가득했었다. 그게 가장 무난해 보였으니까. 화장품도 예외는 아니었다. 유행하는 색의 제품들은 일단 모조리 사고 봤고, 어울리는지 아닌지도 모른 채 그저 걸치고 다녔다. 뚜렷한 개성은 갖기 힘들어도 뒤쳐지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러다 문득 사진첩에 담긴 예전 내 모습들을 보는데 참 멋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취향이랄 게 전혀 없는 사람 같았다고나 할까. 분명 내가 고른 옷들일 텐데 입고 싶어서 입은 옷이 아닌 느낌. 억지스럽고 부자연스러운 모습. 누구나 자신의 과거를 만나면 비슷한 생각을 하겠지만 나는 또렷이 드러난 나의 ‘취향 없음’이 부끄럽게만 느껴졌다.


분홍색은 어릴 때나 좋아하던 색이라 치부하며 외면한 채 살아왔는데 서른이 넘어 처음 입어봤던 분홍 원피스가 생각보다 잘 어울려 신기했던 경험이 있다. 칙칙하기만 한 옷장에 분홍이라니. 그렇게 용기를 얻은 나는, 나의 취향을 조금씩 발견해 나가는 기분 좋은 모험을 시작했다.


내게 어울리는 색깔은 생각보다 다채로웠다. 분홍색과 마찬가지로 유아스러운 색이라 생각했던 노란색이나 화려한 주황색이 그런 경우다. 하지만 그렇다고 검은색을 갑자기 멀리한 건 아니다. 검정을 자주 입었던 건 깔끔하고 세련된 검정만의 이미지가 좋아서였기 때문에 나에게 더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형태의 검정옷으로 확장시켜 나가곤 했다.


덕분에 이제는 내게 어떤 옷들이 더 잘 어울리는지 전보다 많이 알게 됐다. 걸리적거림 없이 나와 조화를 이루는 색이 어떤 색인지, 내 주변을 어떤 것들로 채워야 하는지도. 물론 아직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취향을 아는 게 인생에 뭐가 그리 중요한 일이냐고 반문할 수 있다. 나 역시 한때는 취향 따위 여유로운 사람들이나 누리는 거 아닌가 하고 생각한 적 많았으니까. 그런데 자신만의 취향을 알아간다는 건 시야를 점점 좁히는 과정이 아니라 확장의 개념과 같다. 내 취향이 확고해지는 만큼 그 세계는 더욱 깊어지고 더불어, 타인의 취향까지도 기꺼이 존중해줄 수 있는 넓은 마음이 생긴다.


처음부터 본인의 취향을 뚜렷하게 알고 살아가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에서는 남들에 비해 뚜렷할 수 있어도 그 시작도 돌아보면 분명, 미약한 경우가 많다. 나 또한 패션에 대한 관심이 높지 않았기에 그저 유행하는 옷들 위주로 입고 다녔지만 사실 내가 관심을 가져야 했던 건 패션이기 이전에 ‘나’였어야 했다. 취향은 여유로운 사람들이나 누리는 사치가 아니라 나를 더욱 알뜰살뜰하게 가꾸는 습관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검정으로 가득했던 옷장을 나만의 다채로운 색으로 바꿔 나가듯 사소한 일상에서도 취향은 얼마든지 만들어나갈 수 있다. 관계, 기억, 태도. 모두 ‘취향’이라는 큰 갈래에서 뻗어 나와 나만의 이야기로 기록된다. 내가 오늘 만난 사람, 먹은 음식, 자주 썼던 말, 기억에 남는 장면. 모두 다 내 취향의 조각들이다.


그러니 뚜렷한 취향을 모른다고 낙담하지 말자. 대신 일상의 조각들을 정성스럽게 모으는 데 집중하기로 하자. 그리고 새로운 조각을 만났을 땐 낯설다는 이유로 서둘러 외면하지 않는 너그러운 마음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그러했듯 당신에게도 분홍빛 모험의 바람이 살랑-하고 불어오는 순간이 분명 찾아올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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