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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꿘녜 Mar 14. 2021

지하철 4호선 기관사님께 보내는 편지

서울에 올라와 회사 생활을 시작한 지 2년 차에 접어들었을 때의 일이다. 느지막이 야근을 하고 집으로 가는 4호선 열차에 몸을 실은 채 가고 있는데 대뜸 이런 방송이 나왔다. “서울이 왜 아름다울까요? 한강을 지날 때 보이는 저 야경 때문 아닐까요?” 휴대폰에 시선을 고정하던 사람들은 이 한 마디에 흠칫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들고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기장님은 방송을 이어갔다. “비가 와서 집에도 일찍 못 가고, 열차도 사당까지 밖에 못 가서 ‘에휴’ 하시는 분들 계신가요. 사당까지만 운행해서 죄송합니다. 곧 4호선 끝판왕 오이도행 열차가 도착할 예정이오니 환승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하루도 모두 고생 많으셨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서울 토박이에겐 흔한 광경일 수 있겠지만 내겐 너무나 생소했다. 그 생경했던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아 트위터에 기록으로도 남겼다. ‘이런 방송은 지하철 타면서 처음이다. 기장님이 어떤 분일지 궁금하다.’ 1분도 채 안 되는 짧은 순간에 미소가 지어지고 마음이 따뜻해졌다. 생각지 못한 사람에게 듣는 ‘오늘 하루 고생 많았다’는 말은 의외로 힘이 강했다. 내가 얼마나 고된 하루를 보냈는지 알아주는 기분에 집 가는 발걸음이 몽글몽글해졌다.


그날 하루의 특별한 경험일 줄 알았는데 비슷한 안내 방송은 내가 4호선을 탈 때마다 종종 이어졌다. “안녕하십니까. 기장 OOO입니다. 열차를 운행하면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구간은 바로 지금, 동작대교를 지나는 순간입니다. 잠시 휴대폰은 내려놓으시고 창 밖 풍경을 둘러보시길 바랍니다. 눈에도 휴식을 주시고, 고단한 하루 속에서도 풍경을 즐기는 여유를 잃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이번 역은 이촌, 이촌역입니다. 안전하게 하차하시길 바랍니다.”


목소리를 완벽하게 구별해내는 능력은 없지만 4호선에서 들려오는 따뜻한 방송의 목소리는 매번 달랐다. 이쯤 되면 4호선만 특별교육을 받는 게 아닌지 의심될 정도였는데 내가 주로 타는 노선일 뿐이니 그 의심은 접어두기로 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나는 이런 방송을 하는 기장님이 어떤 분들인지 너무 궁금했다. 그 짧은 1분의 방송이 나의 습관을, 내 취향을 바꾸어 놓았기 때문에.


지하철에서 가급적이면 음악을 잘 듣지 않는다. 오늘은 어떤 기장님이 운행하는 열차일까, 혹여나 선물 같은 방송을 놓치진 않을까 하는 생각에 안내 방송에 귀를 기울인다. 창 밖 풍경이 보이는 구간에서는 휴대폰의 작은 창 대신 고개를 들고 큰 창 밖 풍경을 꼭 바라본다. 고단한 하루 속에서도 풍경을 즐기는 여유를 잃지 않기 위해서.


따뜻한 안내 방송이 들려와도 우리는 기장님께 바로 대답을 할 수 없다. 민원을 접수하는 문자가 활성화되어 있지만 해당 기장님께 답을 드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기장님의 말씀을 실천하고, 감사히 여기며 이렇게 글로 전하는 것뿐이다. 사소해 보이는 그들의 짧은 한마디가 누군가에게는 따뜻한 일상의 한 장면으로 오래도록 기록되어 있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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