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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은 너무 길다

by 배지영

작년 한길문고 에세이 6기에는 30대 러너가 두 명 있었다. 양모이 선생님, 정아현 선생님. 전주에서 군산까지 오가는 아현 선생님은 <집에 있는 우리 사이>를 썼다. 포항, 서울, 익산, 군산, 전주에서 살았던 집과 사람에 대한 이야기. 러너니까 가끔 달리기 글도 썼다.


아현샘 덕분에 광복절의 의미를 되새기는 8.15km 달리기를 알았다. 새벽 5시 30분에 보랏빛 어둠 속을 달리는 사람들 속에 아현샘이 있었다. 그 글은 바래지 않고 내 생활 어딘가에서 짙어진 모양이었다. 광복 80주년 다가오니까 나도 8.15km를 달리고 싶었다. 어쩐지 혼자 기분 좋아지는 일도 하고 싶고.


꿋꿋하게 버텨서 5주년을 맞은 포항 ‘지금책방’에서 ‘책 사줄게’ 프로젝트를 한다고 했다. 보호자 없이 책방에 오는 청소년이 책을 고르면 선물하는 일. 책방지기가 사비 5만 원을 내서 시작한다는 글을 읽고서 나도 책값을 송금했다. 농협 717075-51-059750 김미연.


봄에 은파호수공원에서 달리기하다가 만난 고등학생도 떠올랐다. 이제 막 달리기를 시작한 아주머니에게 먼저 말을 걸어주었던 소년. 조종사 되려고 엄청나게 공부 열심히 하면서 체력을 단련하던 이에게 뭐가 좋을까. 알 수 없어서 치킨과 웨지 감자 세트를 보냈다.

나만 잘하면 된다. 광복절 아침에는 걸어서 5분 거리에 생긴 새들공원에 갔다. 예술의 전당과 실내 배드민턴장을 끼고 있는 공원. 옛날부터 거기 있던 나무들을 그대로 두고 개발했다. 길도 억지로 내지 않아서 오랫동안 사람들이 드나들던 길이 반듯하지 않게 뻗어 있었다. 지현과 둘이 좋다는 말을 오백 번쯤 했다.


광복절 저녁 메뉴는 하필 떡볶이. 떡은 먹기 싫은 어린이처럼 손에 들고 조물딱거리는데, 왜 떡볶이는 2인분 3인분도 혼자서 해치울 수 있을까. 괜히 많이 먹었다며 후회하면서 달렸다. 부대꼈다. 5km 넘어가니까 배속에서 꿀렁거리던 떡볶이가 잠잠해졌다. 숨도 안 차고, 다리도 안 아프고, 80년 전 우리 선조들처럼 감격스러웠다.


응당 마땅 성공할 줄 알았다.


아침에는 주권독립을 되새기며 태극기를 달고, 밤에는 어떻게든 일제강점기를 버티고 살아남은 분들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달리고. 정확하게 8.15km에 러닝 앱의 정지 버튼 눌렀다. 땀 때문에 손가락이 미끄러졌다. 0.01km 더 달리고서야 멈췄다. 실패했다며 불퉁대지 않고 결심했다. 내년에는 잘하자.ㅋㅋㅋㅋㅋㅋ


사흘 뒤 밤, 달리기 하는 초등학교에 달큼한 풀냄새가 가득했다. 우전차 향 같았다. 개학 앞두고 화단의 풀을 벤 모양이었다. 온통 아파트로 둘러싸인 학교. 그래서인지 뒤끝이 단 차 향은 학교 운동장에 고여 있었다. 입안까지 달았다. 꽃향기 맡으면 힘이 솟는 꼬마 자동차 붕붕처럼 신나게 달렸다.


8.15km 성공.


#광복절

#주권독립

#고맙습니다

#815달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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