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나 Apr 01. 2016

01 겨울나기

  3월이었다. 살갗에 닿는 공기가 부드러워졌다고 성급한 착각을 할 정도로 봄이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봄이 된다고  특별히 좋은 일이 있을 것도 아닌데 그녀는 어쩐지 그렇게 조바심마저 섞어 자꾸 봄을 기다렸다. 어떤것도 기다려지지 않는 자신의 일상이, 봄이라도 온다면 아주 약간이나마 설렘으로 채워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을 거다.

  
  그 일요일 오후는 그런 바람이 정확하게 어긋난 날이었다. 친구와 집 근처에서 밥을 먹기로 해서 가벼운 차림으로 문을 나서는데 눈이 오고 있었다. 그녀는 당황했다. 언제부턴가 창문을 열어 보는 것도, 일기예보를 찾아 보는 것도 하지 않던 그녀였기에 집을 나서다가 다시 들어와 옷을 갈아입는다든가 우산을 챙겨야 하는 날은 종종 있었다. 하지만 그럴 때에도 - 다만 귀찮아 하며,  매번 날씨를 신경쓰느니 그런 예상밖의 귀찮음을  차라리 감수하겠다고 생각했을 뿐 - 당황하지는 않았었는데, 대수롭지 않은 봄꿈 같은 것 꾸지도 말란건가 중얼거리며 우산을 챙기다 뜻밖에도 당혹감을 느껴버린 것이다. 아니 어쩌면 서글픔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약속 시간까지 여유가 별로 없어서 옷차림은 그대로인 채 우산만 들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처음엔 찬 공기에 목이 움츠러들었지만 걷다 보니 생각보다 춥지 않았다.
  눈은 제법 오랫동안 내린 모양이었다. 길을 따라 늘어선 가로수들마다 풍성한 눈꽃을 매달고 있는 모습이 흡사 가지에 다닥다닥 붙어서 만개의 순간을 벼르고 있는 벚꽃망울 같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렇게라도 봄을 연상하고 싶었나 보다.
  걷는 동안 눈발이 조금씩 약해졌다. 곧 비로 바뀔 것 같았다. 그럼 저 눈꽃들도 금방 사라지겠지, 생각하던 그녀는 불현듯 자신의 방 한쪽에 놓아둔 드라이플라워를 떠올렸다. 오래도록 아름다운 모습을 유지하도록 만들어진 드라이 플라워와 금세 스러져버릴테지만 그래서 순간의 찬란함이 더 대견한 저 눈꽃. 그 묘한 대비를 생각하고 있자니 무엇이든  아름답고 소중한 것들은 쉽게 사라지는게 아닐까 싶어졌다. 아니 하지만, 그렇다고 뭔가를 유지하려는 노력이 또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다, 대체로 사랑은 눈꽃 같고 기억은 마른 꽃 같은 게 아닐까, 어쩌면 그도 그런 생각을 해서 그 꽃을 주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들이 차례로 숨가쁘게 머릿 속을 스쳐갔다. 그러다 자신에겐 여전히 마른 꽃이 아름답고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이제 더는 봄을 기다릴 필요가 없겠다고 생각했다.


  날씨는, 계절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시간이 주는 위로나 치유를 기대해봤자 시간은 누군가를 위해 흐르는 것이 아니니까. 어디도 목적지같은 것은 없이 다만 지나가는 것이니까. 그런 시간이 쌓이다보면 어떤 마음도 누그러지는 순간이 오는 것 뿐이니까. 그걸 두고 편할 대로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준다고 말하는 것 뿐이다. 하기야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그래서, 시간이 약이 된다는 말이 아주 틀린 말은 또 아니었다. 그녀 역시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런데 얼만큼의 '지나가는 중'을 지나야 괜찮아질지는 아무래도 알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좁은 교차로에 도착하니 횡단보도 건너편에 친구가 파란 우산을 들고 서 있는게 보였다. 신호를 기다리며 반갑게 손인사를 하는 친구를 보던 그녀는 역시 낮술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어정쩡한 그녀의 계절을 잠깐이나마, 반칙으로라도, 뛰어넘는 방법이 고작 그런 것뿐이므로. 눈과 비가 반쯤 섞여 내리는 3월의 일요일 오후가 지나가고 있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