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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나 Nov 07. 2017

05. 행운의 편지

월요일은 피곤하다. 주말에 약속이라도 있었을라치면 당연히 그렇고 온전히 휴식으로 시간을 보냈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언제나 피곤하다. 그것은 남자에게 부정할 수 없는 명제였다. 휴일의 관성에서 벗어나려는 노력만으로 이미 충분히 고단한 월요일 아침이면 그는 무사히 오후가 되어 퇴근을 하는 일이 터무니없이 허황된 판타지 소설의 결말 같다고 생각하곤 했다. 판타지 소설이라기에는 퇴근 시간에 도달하기까지의 일과가 지나치게 재미없기는 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렇기 때문에 마침내 퇴근 시간이 되면 남자는 사정이 허락하는 한, 마트나 편의점에 들러 즉석음식을 사거나 어플리케이션으로 배달 음식을 주문하는 것 따위의 최소한의 과정만을 거쳐 귀가를 서둘렀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기다리는 동안 익숙하게 우편물을 챙기는 남자의 손에 낱장의 공과금 청구서들과는 다른 낯선 감각이 느껴졌다. 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며 겉봉에 적힌 영문 이름을 천천히 속으로 읽었다.


그녀였다.



6개월쯤 전에 남자는 그녀를 처음 만났다. 그녀는 남자의 회사에 새로 온 3명의 인턴 중 한 명이었다.  활달하고 넉살 좋은 나머지 두 명의 남자 인턴들과는 달리 업무적인 화제 이외에는 길게 말하는 법이 별로 없고 조용한 목소리를 가진 그녀는 언뜻 존재감이 없게 느껴질 법도 했지만, 있는 듯 없는 듯 하면서도 맡긴 일을 적시에 적절하게 해내는 것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를 두고 남자는 '타고난 차분한 성품에 자기관리를 잘 하는 성실함이 더해진 어른스러운 사람'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언제부터 이렇게 사람을 대하면 결론부터 내리려고 하는 버릇이 자신에게 생겼나 싶어 뜨끔했다.  고작 사무적인 거리만을 유지하는 사이에서 일방적인 친밀감을 드러내며 00씨는 참 어떤 사람인 것 같다고 아는 체하며 호탕한 웃음을 웃는 유형의 사람을 스스로 얼마나 불쾌하게 여겨왔던가. 물론 그녀를 두고 일방적인 친밀감을 표시한 것도 나쁜 생각을 한 것도 아니었지만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 이라는 큰 범주에서 결국 같은 실수가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 그녀에게 괜히 미안했다. 그래서였을까,  유별난 결벽이라는 생각을 간혹 하면서도 남자는 그녀를 대할 때면 더욱 사무적으로 정중하려고 노력했다.


그녀를 비롯한 인턴 사원들이 기간을 채우고 회사를 떠날 때까지 남자는 모두에게 젠틀하고 미더운 선배의 역할에 충실했다. 사석에서 술 한 잔 걸치면 인생 선배를 자처하며 호형호제하고 어우러지기도 하는 다른 동료들과 다른, 신망있지만 편하지는 않은 -사실 오히려 조금 불편한- 사람이라는 포지션이 그는 마음에 들었다. 사람들 사이에는 적당한 거리가 있고 그 거리가 지켜질 때 평화가 있다고 그는 언제나 믿었다. 그리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을 한 번 더 하자고 예외를 두면서, 그녀 또한 자신과 비슷한 사람 같다고 생각했다. 그녀 또한 **씨는 다 좋은데 좀 뻣뻣해, 라는 말을 종종 듣는 사람이었으므로.



그렇게 다 좋은데 좀 뻣뻣한 그녀가 남자에게 의외의 말을 건넨 적이 두 번 있었다.


한 번은 급히 마무리 해야 할 일이 있어 조금 일찍 점심 식사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온 남자가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한숨 돌리려고 조용하게 음악을 틀어놓았을 때였다.


"선배님 여쭤볼 게 있는데요.... 어? 이 노래 좋아하시나봐요. 저도 좋아하는 곡인데... 아! 지난 번에 말씀하신 자료 중에서요......."


그녀는 원래 하려던 질문으로 재빨리 돌아갔고 둘 사이에는 언제나와 같은 사무적 대화가 이어졌다. 짧은 대화 사이에 섞여든, 물음이라고도 할 수 없는 혼잣말 같은 한 마디. 뜻밖의 그 한 마디가 남자는 낯설고 반가웠었다.


그리고 또 한 번은 그녀와 동기들이 인턴 기간을 마치는 것을 기념하는 송별회 때였다. 그간의 수고를 칭찬하고 만남에 의미를 부여하는 덕담이 이어지고 주인공들은 감사와 앞으로의 포부로 답했다. 냉혹한 경쟁 사회에 대한 엄살 섞인 걱정 속에서도 저마다 나름의 계획을 밝힐 때 그녀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했었다.


"아직 잘 모르겠어요. 우선 졸업을 하고서 잠시 여행을 갈까 해요. 그 동안은 고민만 하고 못 갔는데 더 늦기 전에 가보려고요. 가게 되면 편지 쓸게요 다들 주소 하나씩 알려주세요."


휴가 가는 거냐고, 부럽다고, 알고보니 **씨 금수저인거 아니냐고 악의없는 왁자지껄한 웃음이 자리에 가득해졌다. 그녀는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마음 편해 보이는 얼굴로 그저 웃고 있었다. 남자는 처음으로 그녀에게 많은 질문을 던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언제나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다들 주소 하나씩 알려주세요, 모두가 그냥 하는 말인 줄 알고 넘기는 그 말에  스스로도 낯설어 하며 자신의 주소를 메시지로 남겼다.


그런 그녀에게 편지가 온 것이다. 그녀는 정말 여행을 간 것일까. 어디로 갔을까. 이 편지 안에는 어떤 이야기가 들어있을까. 어쩐지 긴장이 되어 남자는 차가운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편지를 뜯었다. 그녀 자신만큼이나 정갈한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  편지는 영국에서 시작되어.... 일주일 안에  명에게 보내지 않으면....
안녕하세요 선배님.  지내고 계세요?


그녀의 편지는 장난스럽게 시작되었다. 늘 차분하게만 보이던 그녀에게서는 보지 못했던 장난스러움이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누군가 우스갯소리를 건네면 소리없이 미소를 짓곤 하던 그녀가 드물게는 참을 수 없는 웃음을 터뜨리고 수습이 안 되어서 얼굴이 빨개지도록 애를 쓰기도 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 모습이 평소의 침착하기만 한 모습과는 사뭇 다른데 어린 아이처럼 천진하고 유쾌해 보여서, 저 사람 안에는 내가 모르는 종잡을 수 없는 모습이 많이 있겠지 하고 생각했던 기억도 떠올랐다.


그녀는 말했던 대로 여행을 하는 중이라고 했다. 마냥 관광을 하러 떠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어떤 거창한 목적을 가지고 떠난 것도 아니라면서, 다만 언제나 여전하게만 살아온 것 같아서 그렇지 않은 것을 발견하길 기대하며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그날 밤의 누군가의 말처럼 금수저는 절대 아니고 기둥뿌리 뽑아 떠나온 거라는 너스레와 자기는 가끔 그렇게 불쑥 일을 저지르는 사람이라는 말도 적혀 있었다. 남자는 말도 안 되게 그 편지 안에서 말하는 사람이 자기가 오랫 동안 잘 알아온 사람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떠나기 전에 여러 가지 예상을 해봤지만 역시 맞는 것보다 맞지 않는 것들이  많아요. 바닷가에 앉아 있으면 엄마 아빠가 떠오르기 보단 사랑하는 남자가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는  같이요. 여전하지 않은 것을 하나는 일단 발견한  같아요.


편지는 거기서 끝이났다. 봉투 안에는 한적한 바닷가의 모습을 담은 사진도 한 장 들어있었다. 새파란 바닷물이 아름다운 전형적인 이국의 해변 풍경이었다. 눈여겨 살펴보니 사진의 오른쪽 구석에 아주 작은 사람의 형상이 보였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그녀가 찍힌 것인지 그녀가 찍은 타인인지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작았지만 남자는 그것이 바닷가에 앉아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그녀일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지나간 시대의 유행이라지만 자신은 한 번도 받아보지 않았고 당연히 답장도 해보지 않은 "행운의 편지"에 답장을 하는, 옛 이야기 속의 바보같은 사람이 기꺼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발신자의 주소를 다시 한 번 눈여겨 보았다. '피곤한 월요일'이라는 절대 명제를 깨뜨렸다는 점에서 이 편지는 이미 정말 행운의 편지인 것 같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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