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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구집아들래미 Jul 17. 2017

불신론을 더욱 공고히 만드는 영화

영화 <예수는 역사다> 리뷰

 기독교나 예수와 관련된 영화는 항상 민감하다. 최근 후속편 제작에 들어간다고 하여 종교계의 반발을 사고 있는 <맨 프롬 어스>부터, 기독교 단체의 상영 금지 시위까지 일으킨 영화 <다빈치코드> 까지. 믿음으로 이루어진 종교을 향한 의문과 음모론을 제기하는 영화는 나같은 무신론자(혹은 범신론자)에게 깊은 흥미를 주곤 했다. 항상 전능한 신의 말씀을 널리 알리려 힘쓰는 종교인들이 아니라,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로 인해 기독교와 예수에 관심이 생겼다는 사실이 참 아이러니하기도 하지만서도, 종교적 색채라면 질색하던 나로 하여금 <예수는 역사다>라는 영화까지 다 보게했다면, 앞선 작품을 혐오하는 종교인들이라도 어느정도 긍정적으로 평가해줄 수 있지도 않을까. 무엇이든 '관심'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니까. 


 시작부터 끝까지 불신자의 입장에서 철저히 예수를 과학적으로 파헤쳐 진실로 향하고자 하는 내용에 내심 기대를 했음에도 결론부터 말하자면, <예수는 역사다>는 영화로 보기에 흥미롭지도 않으며, 다큐로 보기에 개연성과 신빙성이 너무 떨어진다. 가장 큰 문제점은 '시작부터 결론은 정해져있다'는 느낌이 끝으로 향할 수록 더욱 심해지는데, 이는 결국 숨기려 애썼던 크리스챤 영화의 냄새를 희석시키는 데에 철저히 실패했다. 결국에는 학교 앞 교회 찌라시 수준에서 조금 나은 정도가 수준이 되어버릴 정도로. 적어도 '신이 어디 있어요'라는 의문에 '신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라거나, '곧 깨우치면 알게될거야. 그분이 널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같은 말은 이 영화에서 나오지 말았어야 했다.


사실을 통해서만 진실로 갈 수 있다? 그걸 아는 사람이 그래?


영화의 초반부, 시카고 헤럴드 기자인 주인공은 철저한 불신론자로 묘사하면서, 반대로 우연히 딸의 위험을 모면한 아내는 크리스챤으로 거듭나는 모습을 대조적으로 묘사해나가는 데에 성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주인공은 크리스챤으로 거듭나는 아내의 모습을 극도로 혐오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주인공의 극단적인 태도는 감독이 그간 불신론자를 바라보는 관점을 나타낸다. 무신론자인 내가 봤을 때도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아내를 겁박하고, 이해하려하지 않는 모습. 그리고 직장에서도 자신의 본분을 잊은 체 하루하루를 맹목적으로 크리스챤을 파괴하겠다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주인공의 모습은 감독이 그간 바라본 그릇된 무신론자를 대변하고 있다. 이렇게 무신론자에 대한 부족한 이해는 영화를 시작부터 고꾸라지게 만들어 버린다.


원작 'The case for the Christ' 350페이지에 육박하는 책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이 짧은 영화 내에서, 주인공이 예수의 진실을 파헤치려 증거를 모아가는 과정은, 어찌된 이유인지 전개가 계속될 수록 의문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에 대한 의구심과 회의를 만들어 낸다. 가장 큰 문제점은, '예수는 진실되다! 그러니 믿어라'고 결론을 이미 만들어 놓은 체 영화를 전개하다보니 무신론자에 대한 이해가 매우 부족하다는 것이다. 예수의 실존과 부활에 대한 주인공의 의문이 불신론자들의 의문을 전혀 대변하지 못하고 있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한 전문가에 따르면, 호메르스의 일리야스, 아이네이아스 등의 사료보다 성경의 사료가 몇 배는 더 많다는 사실이 성경의 신빙성을 높여준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에 드는 의문은, '성경이 실제했다고 믿는 이들이 왜 신화(소설)로서 존재하는 일리야스와 아이네이아스(로마의 건국 신화)와 비교할 수 있는지'부터 의문이 들지만 기자라고 하는 주인공은 그 이상 파고들지 못한다. 우리나라의 건국신화로서 단군신화가 널리 알려져있고 심지어 여러 사료가 뒷받침해준다 한들, 우리나라 사람 그 누구도 곰이 실제로 마늘과 쑥을 먹고 웅녀가 되었다고 믿는 사람은 없다. 이처럼 감독이 그린 불신론자(주인공)은 시작부터 불신론자들을 대변하고, 공감할만한 캐릭터로 만들어나가는 데에 실패한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의 이해를 돕기 위해 고맙게도 수 많은 과학자들과 전문가(기자)들이 나선다. 독특하게도 그들 스스로 등장하면서 무신론자라고 소개하는데, 얘기하다보면 어느새 크리스챤을 대변하며 주인공과 토론을 한다는 점은 정말 아이러니하다. 그 점은 백 번 양보하더라도, 과학자/기자라고는 상상 할 수 없을 정도로 주장과 근거가 상당히 빈약하고, 궤변과 믿음에 기반한 주장을 한다. 전문가라는 사람이 "믿음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증거다."라고 말하는 대목에서는 거의 상영관에서 뛰쳐 나갈뻔했다. 또한 앞서 말했듯, 불신론자가 근본적으로 궁금해하고 의문을 품는 킬링포인트를 짚어내지 못한다. 예를 들어, 가장 쉽게 반박할 수 있는 불신론자의 주장, '예수의 부활이 거짓이며, 기절했었을 뿐이었다.' 라는 기절설에 대해서, 이는 터무니없으며 예수는 당시에 분명히 죽었었다는 사실을 장황하고 친절하게 알려주지만,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는 증거에 대해서는 '당시 목격자가 있었고, 심지어 한 둘이 아니다.'라는 말로 결론 지어버린다. 미안하지만, 나는 '당시 예수님이 복부에 창이 꽂히고 손에 못이 박혀도 죽지 않았을 것이다'에 대해서는 애초부터 관심이 없었다.


<감독의 메시지 1> 불신론자는 보이고, 만질 수 있는 것만 믿는다.


뿐만 아니라 감독은 기자인 주인공의 이야기를 동시에 풀어나간다. 또한 이를 불신론자에게 대입하면서 우리에게 메시지를 던진다. 영화 속 주인공은 경찰 총격 사건을 맡아, 사건의 단면과 피고인의 진술을 무시하고 심증만으로 스스로 판단/결론지어 성급하게 보도를 하게 된다. 이는 결국 오보임이 밝혀지고, 피고가 결백함을 알게 된다. 감독은 진실을 말하는 피고인을 무시하고, 눈 앞에 보이는 것만 믿는 주인공을 불신론자에게 대입한다. '너네는 눈 앞의 현상에만 주목할 뿐, 보이지 않고 만지지 못하는 건 다 안믿지?' 이는 감독이 불신론자에게 던지고 싶었던 메시지 중 하나지만, 안타깝게도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불신론자들은 눈에 보이지 않고 만지지 못하는 많은 걸 이미 믿고 있다.


<감독의 메시지 2> 아무리 증거를 보여줘봐야 어차피 안믿을거잖아요?


결국 결말은 크리스챤이 된 아내와 계속해서 다투던 우리 불신론자 주인공은 (당연하게도) 예수를 인정하고 크리스챤으로 거듭난다. 한 번도 졸지 않고 영화를 감상했음에도 대체 어떤 대목에서 예수의 부활과 신의 존재를 깨닫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주인공은 그간 자신의 행적과 증거를 놓고, '믿음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따위의 문장을 되내기더니, 예수의 부활과 기독교의 진실성을 인정한다. "제가 졌어요. 당신은 진실이군요" 하는 대목에서는 거의 무릎을 칠 뻔했다. (영화관 곳곳에서 크리스챤들의 조용한 탄성이 터졌었다.) 영화는 우리의 사랑스러운 주인공은 크리스챤으로 귀의해서 아들 딸 잘 낳고 행복하게 살고 있답니다 로 끝나지만, 감독이 불신론자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이에 그치지 않는다. 


성급한 판단으로 오보를 낸 주인공이 피투성이가 된 피고에게 사과하자 피고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한다. "진실을 말해도, 들으려 하지 않았을 거 잖아요. 당신에게 결론은 이미 정해져있었어요." 모든 것을 의심하고 불신하는 불신자의 눈으로 바라보면 그 어떠한 확실한 증거에도 인정하지 않을거라는 감독의 가슴 미어지는 메시지가 전해오는 순간이었다. 나는 진실로 이 영화만이라도 과학적이고 이론적으로 진실에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이 영화에서도 나는 확실한 증거를 얻지 못했다. 아무리 내게 뼈대 없는 부수한 사료들로 살덩이를 만들어 들이밀며, '봐라. 피가 있고 살이 있지 않느냐. 이것은 분명 심장도 뛰고 생각도 하는 사람의 형태다.'라고 외친들, 더욱 의문이 생길 뿐이고 이는 불신론을 더 공고히 할 뿐이었다.


영화에서 그렇게 말하니, 나도 갑자기 묻고 싶어졌다. 이미 처음부터 결론이 정해져있는 이 영화에서, 과연 누가 더 맹목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는 걸까? 나는 오늘도 당신에게 한 발 가까이 다가서서 얘기를 들었습니다. 당신은 나만큼의 노력이라도 해보았나요. 혹시 날 그저 '어린 양'으로 취급하고 불쌍하게만 보고있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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