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Won't back down> 리뷰
대한민국 학생 대부분 대략 12년 정도 학교를 다닌다. 그 정도쯤 학교를 다니게 되면 선생님이라는 존재는, 내 부모님이 내 부모님 이듯이, 어느새 '당연한 존재'가 된다. 어떻게 하면 선생님한테 안 걸리고 도망을 갈 수 있을까. 숙제를 안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수도 없이 해봤을 테지만, 저 당연한 존재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생각을 해봤을까.
극 중 무너질 대로 무너진 볼티모어의 공립 학교 애덤스 초등학교는 그저 하루하루 기계처럼 학생을 가르친다. 교사들의 눈빛에는 이미 열정은 사라진지 오래며, 학생들 또한 '무지'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난독증을 심각하게 앓고 있는 '말리야' 또한 교사들의 무관심에 방치되어 말 그대로 학교를 다닐 뿐이었다. 말리야의 어머니이자, 볼티모어의 억척스런 싱글맘 '제이미'는 이러한 애덤스 초등학교의 교육 환경에 충격을 받는다.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 '포기하지 않겠다.'는 제목의 Won't back down(원트 백 다운)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포기하지 않고 교육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여 끝내 성취해낸 싱글맘의 위대한 실화를 바탕으로 둔 영화다. 우리에게는 다크나이트의 '레이첼'로 배트맨 애인치고는 너무 못생겼다고 유명했던 메기 질렌할이 주인공으로서 억척스런 싱글맘, '제이미' 역할을 맡았다.
<#1> 학교 밖의 선생님을 어떻게 봐야할까?
영화 속의 에덤스 학교 교사들은 하루하루 굴러가는 쳇바퀴같이 틀에 박힌 수업을 한다. 작년에 했던 수업을 올해에도 한다. 내년에도 그럴거고 내후년에도 그럴것 이다. 따라오지 못하는 학생을 케어하기는 커녕, 학생 어느 누가 어떤 수준에 있고, 어떤 가정 환경에서 자라고 있는지 관심조차 없다.
내가 고등학생 일 때 한번은 야간자습 시간에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선생님이라는 존재에 대한 고찰을 했던 경험이 있다. 그냥 '저 사람은 어떻게 살아갈까?' 하는 호기심이 생겼다. (중학생 때는 엄마를 보면서 '왜 우리 엄마는 저 사람일까?'는 고찰을 했었다. 그만큼 악의가 없다.) 그간 사제간의 정 이나, 훌륭한 교육 철학에 대한 책이나 영화를 많이 접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책이나 영화 속에서나 나오는 스페셜한 케이스거나 긴 시간의 선상에서 잘라낸 일부분일 뿐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선생님은 <여인의 향기>나 <죽인 시인의 사회> 같은 영화 속에서 볼 법한 철학을 지닌 비현실적 '교육자'보다, 지금도 내 후배들 앞에 서있는 '절대 다수의 교사'들이다.
나는 교육대학이나 사범대학을 다니지 않기 때문에 모르는 것이 당연하지만, '교사'는 학생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숭고롭고 고귀한 업무를 맡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 생각하면, 21세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수 많은 직업 중 하나라는 생각을 했다. 수 많은 노동자들 처럼 그 들 또한 자신의 삶을 영위하기 위한 직업으로서 교사를 하고 있다면, 그 소비자로서 나는 '학교 밖의 선생님'을 어떻게 봐야할까. 과연 교단 앞에서 교과서만 읽는 것이 교사의 역할인가. 아니면 교실 안에서 벗어나 학생의 환경까지 케어해주는 것이 교사의 역할인가. 나는 개개인의 선생님의 이상형과 롤모델이 무엇인지가 궁금했던 것이다.
카톡이나 페이스북이 활성화되어 있지 않았던 나의 학창시절 때에도 선생님 전화번호는 당연스럽게 알 수 있었고, 이는 우리에게 있어서 혹시 모를 일들에 선생님의 도움을 요청 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었다. 맞벌이 부모나, 편부모가정의 경우에는 학교 밖에서 사고가 나더라도 우리 선생님들은 경찰서나 병원으로 한 달음에 달려왔었다. 어느 누가 오토바이를 탄다거나, 담배를 피고, 가출을 하면 교사가 스승이라는 이름으로 발 벗고 바른 길로 다시 일으켜 세워주었다. 적어도 지금까지 '참된 스승'의 모습이라면 그러했다.
하지만 교사의 입장에 있어서 이 것이 하나의 '족쇄'로 작용할 수 있다. 카톡/페이스북이 활성화된 요즘은 더 심하다. 직장인이 퇴근 후 상사의 카톡을 그렇게 싫어하듯이, 이제는 학생, 학부모가 선생님의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에 간섭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쌤 프로필 사진에 남자, 애인이에요? 사귄지 며칠 됬어요?' '아이들 보는 데 프로필에 애인이랑 같이 있는 사진은 좀 아닌 것 같아요' 선생님들이라면 누구나 십 수번씩 듣는 말이라고 한다. 괜히 선생님들 사이에서 2G폰이 유행하겠나. 오붓한 데이트를 즐긴다거나, 휴일에 혼자만의 휴식 시간을 가지고 싶을 때에, 아니면 내 멋진 외모를 프로필에 당당하게 자랑하고 싶을 때 암묵적인 사회의 시선을 느낀다면, 참된 스승이고 뭐고 나의 생활을 찾아서 '노동자의 기본권'을 내세우고 싶을 것 같다.
모든 게 그렇 듯 '이상적인 선생님 딜레마'의 답을 찾기가 참 힘들다.
<#2> 교사의 철학과 열정은 당연한 것인가?
말리야의 엄마, 제이미의 요구를 받아보는 에덤스 교사들의 입장도 그러했을 것이다. 난독증을 지닌 말리야에 맞춤형 교육을 해달라! 수업이 마쳐도 눈 높이에 맞는 열정적인 수업을 해달라! 열정적이지 않는 선생은 학교에서 나가라! 어렵지 않게 챈트로 만들어 수업을 해달라! 등등, 열정적인 어머니 제이미를 보면, 누구나 학부모의 안타까운 마음으로 매너리즘에 빠져버린 학교와 교육계를 비판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20년 넘게 같은 것을 반복적으로 가르치고 내 밥벌이 하나 걱정되는 마당에 신랄한 비판과 과도한 요구는 교사의 입장에서는 매우 무례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출근 9시에서 6시에 마치는 노동자는 근무 시간 내에 생산 활동을 하고, 그 외에는 추가 수당을 받는다. (그것이 정당하고 옳은 것이며, 그렇게 주장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참된 스승'을 요구하는 제이미는 교사에게 그 이상을 바라고 있는 것 같다. 수업 진행은 당연한 것일 뿐, 이 밖에도 방과 후에 부족한 학생을 케어해주는 등 근무 시간 외적으로 더 투자해주길 바라고 있다. 그리고 자신은 본인이 일하는 '중고차 딜러'로서 직무유기 하면서 교사에게는 '교사'라면 당연히 해야되는 일 처럼 '당연하게' 요구하고 있다. 과연, 이렇게 참된 스승으로서 교사의 철학과 열정은 당연한 것일까.
그런 반면에, 선생님 입장을 고려하지 않는 제이미가 전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내가 고2때, 한 수학 선생님은 30년이 훨씬 넘게 수업을 해 온 '짬 많은' 선생님이었다. 곧 있으면 장학사가 된다느니, 교감 자리에 오를 정도라고도 들었다. 그런데 수업 시간만 되면 칠판을 4등분으로 선을 찍찍 긋고는, 한 명씩 번호대로 나와서 문제를 풀게 시켰다. 그리고 자세한 풀이도 없이 이건 맞다. 저건 그르다를 일방적으로 풀이하고는 휙 나가버렸다. 때로는 행정업무로 바쁜지 수업에 들어오지 않는 날도 많았다. 어김없이 학생 중 한명이 교장실로 탄원서를 넣었고 학교는 발칵 뒤집어 졌지만, 돌아온 피드백은 결국은 그것이었다. '이 것 또한 개인의 수업 방식일 뿐이다. 직무 유기와는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나는 학창시절을 지나면서 '노동자로서 교사'보다는 '스승으로서 교사'를 많이 만났던 것 같다. 때로는 방과 후에 남아서 같이 교실을 꾸미기도 했고, 축구도 했으며 성인이 되고 나서는 술 한잔씩 얻어 먹기도 많이 했다.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그게 '선생님'이라고 생각했다. 수업 마치자 마자 정 없이 휙 돌아서는 선생님보다, 때릴 때 때리더라도 가끔 농담도 하고 우리와 오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선생님. 솔직히 나는 수업 때 수업 내용보다는 잡다한 얘기를 할 때 더욱 집중했던 것 같다. 그럴 정도로 나 또한 제이미 같이, 매너리즘에 빠진 선생보다는 인간미 넘치는 스승을 바라고 있을 지도 모른다.
<#3> 제이미는 왜 노조와 싸워야만 했을까?
제이미에게 크게 공감하여 교육 개혁을 이루어 낸 또 다른 주인공은 '노나 알버트'다. 그녀는 에덤스의 교사이며, 낙제 아들을 두고 있어 제이미를 헌신적으로 돕고 교육 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새로운 교육 철학과 방침을 만들어 제출했고, 개혁 후에는 교장으로서의 역할을 맡게 될 것이었다.
제이미의 교육 개혁을 방해하고 필사적으로 막는 상대편은 '교육 협회' 즉, 노조다. 제이미가 이루어낸 교육 개혁이 특별하고 대단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교육 개혁을 이루어내고자 한다면, 절반 이상의 교사가 이에 찬성해야 하며, 제이미의 새로운 교육 정책은 노조를 정면적으로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즉, 절반 이상의 교사가 자기 밥그릇을 보호해주고 있는 노조에서 탈퇴해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이미는 끊임없이 학부모와 학생, 그리고 교사들을 설득해야만 했고, 궁극적으로 위원회를 설득해야 했다. 이처럼 교육 개혁이란 말도 안될 정도로 어려운 과정이었고, 또한 개혁이 이루어지게만 된다면 에덤스 뿐만 아니라 주변 인근 학교에도 영향을 끼칠 것이 분명했다. 그만큼 교육 협회의 방어도 필사적일 수 밖에 없었다.
여전히 '노동조합'은 사회에서 평가가 엇갈린다. 대부분 어른들은 노조가 생산성을 저하시킨다고 믿는 것 같다. 그럼에도 노조는 필요하며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영화에서는 아주 악랄하고 자기들 밥그릇 밖에 생각못하는 못되 쳐먹은 놈들로 묘사됨에도, 어느정도 노조의 정당성에 대해 설명해주고 있다. 그리고 그 노조에 반하는 교사들이 얼마나 위험한 행동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교육협회가 제이미의 새로운 교육 정책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하는 점은 다소 안타까웠다. 항상 중용과 절충이 가능하다면 세상을 아름다울테지만, 모든 것은 동전의 양면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어 더 안타까웠다. 근무 시간을 조금 더 늘리고, 자율성을 조금 더 보장해주었으면 좋았을 템에도, 물론 이러한 자율성이 때로는 과도한 노동 강요로 이어질 수 있어 규제하는 것임을 모르는 것 아니기에.
<#4> 21C 자유 자본주의의 우리 선생님
군대 훈련소에 입소해서 교관(부사관)이 그런 말을 했다. "너희는 한 번 훈련받으면 끝이지만, 나는 이거 평생해야 하잖아." 선생님도 마찬가지다. 교과서 속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 간혹 해석이 달라지긴 하지만, 1+1 이 3이 되진 않는다. 똑같은 것을 새로운 아이에게 가르치고, 그 아이가 졸업하면 또 다시 새로이 가르치고. 평생 업이 된다면 매너리즘에 빠질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야간 자율 학생 때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선생님 이라는 위치에 대해 고찰을 한 것도 이러한 '측은함'에서 시작했다.
학생을 뚜들겨 패고 학부모로부터 촌지를 뜯어 내던 악덕 교사의 시대에서, 학생을 때리면 인터넷에 올라가고 김영란법으로 음료수 하나 조심히 받아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참으로 인간미가 털털 넘치던 선생님의 시대에서, 교사라는 직업의 노동자의 시대로 흘러감에 따라, 선생님 그 이름의 무게가 점점 무거워 지고 있다. 이에 따라, 교대 인원 감축에도 불구하고, 수도권으로 과밀되고 지방에는 교사가 부족한 현실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도 어지럽다.
원트 백 다운 으로 인해 학부모의 절심함과 함께, 학창시절 생각해봤던 교사의 역할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