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다이빙 (지극히 초고)
나름대로 나는 미학에 깊은 관심이 있다. 나 자신이 그러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최근의 일이다. 평생을 모르다가 이제야 깨닫다니. 열 살도 훨씬 넘었으니, 메타인지 능력이 정말 좋지 않은 사람인 셈이다. 이제 막 관심을 갖기 시작한 나는 아직 아름다움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해야 한다. 다만 그것에 대한 나름의 소감은 갖게 되었다.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지만 나는 문학의 본질이 아름다움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그렇다는 사실과, 그렇다는 것을 나 자신이 자각하고 있는 것이 나에게는 특별한 빛깔을 가진다. 글을 쓰거나 읽을 때 그 사실을 늘 잊지 않고 쓰고 또 읽어나갈 때는 그렇지 않을 때와 어떤 차이를 만들게 되기 때문이다.
쓰고 읽어나가는 과정 안에서, 그리고 쓰고 읽은 바 결과에 있어 모두 그렇다. 글은 아름다움이다.. 문학은 아름다움을 노래해야 한다.. 잊지 않으려 되뇌며 쓰는 것이다. 읽는 것이다. 잊지 않는 것이다. 글을 저장하고 아름다웠나, 어떤 아름다움이었나 넌지시 물어보는 것이다. 책을 덮고 아름다웠는가. 어떻게 아름다웠나 눈을 감고 음미해 보는 것이다.
이런 연유에서 문학 자체에 대한 탐구 이전에, 감히 ‘미’에 대한 탐구를 해보고 싶은 것이다. 아름다움에 관한 중요한 하나의 질문을 던져본다.
아름다움을 이루는
본질적인essential 조건들이란 것이 있을까.
그러하다면
그것들은 과연 어떤 것일까.
이러한 질문은 일견 문학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꼭 메모는 해두고 싶어, 그것에 관해 필자가 느끼고 있는 점들 몇 가지를 끄적여 봐야 했다.
그리고 실은 아름다움은 문학과는 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문학을 말하며 꼭 말해져야만 한다고 믿는다. 아름다움에 대한 탐구는 문학의 껍질이라기보다 그것의 씨앗에 대한 탐구에 가까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아름다움의 조건들은 (어떤 이야기를 하더라도) 아름다움과 떼어질 수도 있다. 그것은 아름다움을 말하기 위한 도구일 뿐, 절대화할 만한 조건들이 아닐 수 있음을 나 스스로, 그리고 익명의 독자들도 양지하고 있어야 한다.
질문으로 돌아와,
아름다움의 본질적 조건은 무엇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첫째로 단순해야 한다.
둘째로 깊이 내려가야 한다.
세번째로로 신비로워야 한다.
오늘은 두 번째 이야기의 어느 정도까지만 말하게 되었다. 우선 이 세 가지 의미를 계속 수정 보완하며 사탕 굴리듯 세 가지 이야기를 넘나들며 써보면 어떨까 생각하게 되고 있다.(완성 이후가 아닌 수정 보완의 과정에서, 굳이 함께 하게 된 분들께 양해를 구한다. 여전히 서문과 같은 글을 굳이 또 발행하게 되었음에도.)
아름다움은 너무나 자주 단순함의 모습으로 드러나곤 한다. 왜 그러할까. 단순함은 왜 아름다울까. 우리는 왜 단순한 것을 아름답다고 느낄까.
단순함이란 무엇일까.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기에 사람들이 그토록 노래하는가.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너무 당연하게도, 단순함 자체는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는 아무런 콘텐츠도 되지 못한다. 그것은 내용이 아니니까. 예쁜 과자 봉지가 과자가 아닌 것처럼 단순함은 어떤 아름다움도, 아무 의미도, 아무것도 아니다.
과거에 성공이나, 돈을 버는 일이나, 비즈니스, 삶의 태도 같은 것에 관해 누군가 쓴 글을 피드로 자주 보게 되던 한 온라인 계정이 있었다. 그 계정에 올라오는 글의 분량은 늘 스무 줄에서 서른 줄 정도로, 적당하게 짧은 에스앤에스SNS용 길이를 가지고 있었다. 문장도 거의 일관되게 단문을 사용했다. 눈에 빠르게 들어오는 문체였다. 문장이나 단락의 호흡 자체가 흡사 (요즘 유행하는) 하나의 짧은 영상들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논조는 늘 비슷했다. 단호한 태도로 쓴소리를 하는 것. 나는 할 말을 돌려서 말하지 않는다. 바른말을 한다. 나의 글은 사이다다. 운 좋게 내가 쓰는 글을 읽는 사람이라면 내가 쓰는 글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잘 따르며 정신을 좀 차려야 한다. 그러면 잘 될 수 있을 것이다.- 와 같은 흐름을 갖고 있었다.
단호한 그의 글에는 어딘지 묘하게 사람을 끄는 매력(마력)이 있었다. 빠른 호흡으로 이어지는 단문들 사이 공간에는 성공하기 위해 꼭 알아야만 하는, 아주 중요한 어떤 사실을 말할 것만 같은 긴장이 감돌았다. 한 개, 한 개의 문장들은 각각의 짧은 펀치들과도 같았다. 짧은 잽처럼 정신이 들게 하며, 읽는 사람들을 점점 혼미하게 했다.
인생을 좀 아는 멋있고 젊은 남자 선생님이 교무실에 나를 불러서, 길지 않게, 짧고 굵직한 몇 마디 비판과 훈계를 하는 느낌이었다. 말투는 차가운데 왠지 모를 어떤 진정함과 애정이 느껴졌다. 묘하게 중독되는, 차가운 따듯함 같은 것.
사람들은 그의 글에 중독되어 가는 것 같았다. 무심하게 지켜보던 나마저 그랬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런 글의 효용은 두 번에서 많아야 세 번 정도까지였다. 가만히 보니까 그는 글을 그런 식으로밖에 쓸 줄 모르는 사람 같기도 했다. 문투가 늘 그러니까. 단문 더하기 단문. 더하기 단문. 단호하기. 짧기. 냉정하기. 돌아서서 나가기.
단순함과 냉정함, 독설. 그것 자체가 그의 콘텐츠였다. 그뿐이었다. 주제를 바꿔서 늘 그런 문투의 말만 했다. 거기에는 아름다움은 없었고 경제의 논리만 있었다.
고정된 수의 라이크like가 퍽 많이 있었다. 멋지다. 뼈 때리는 소리다. 정말 그렇다. 댓글들의 어투조차 일관적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중독된 것은 그의 문체이지 내용은 아닌 것 같았다. 욕쟁이 할머니 가게를 찾아갈 때 할머니가 쏟아내는 욕의 내용이 아니라 그녀의 정서가 그리워 찾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정기적으로 올라오는 그 SNS 계정의 글에는 그러한, 어떤 관계적 관성이 있었다. 관성이든 관계든 정서든, 무엇이든 내용은 아니었다.
나는 점점 그 일관됨에 질렸다. 나도 모르게 좋아요를 누르고 있는 나의 관성적 태도도 지겨웠다. 쓰는 사람도 읽는 사람도, 한심했다. 이제 그의 단순함과 단호함은 철 모르는 중학생의 태도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방금 업데이트된 뜨거운 공갈빵 같은, 부풀려진 그의 글을 우걱우걱 씹어 부숴 먹으면 입안에 남는 것은 달고 끈적이는 설탕의 잔해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성공이나 자기 관리, 비즈니스가 아닌 글쓰기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썼다. 그쯤이었다. 못 봐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가 되었던 것은.
경제나 사업, 자기 관리에 대해서라면 몰라도, 정말 글쓰기에 대해, 하물며 문학에 대해 뭘 그렇게 알고 있다고. 바야흐로 누구나 무엇에 관해서든 글을 쓸 수 있는 ‘참을 수 없는 글쓰기의 가벼움’의 시대였다.
그의 이야기인즉 이런 것이었다. 글은 문장을 짧게 써야 하고 단순하고 명확하게 써야 한다. 결코 길게 써서는 안 된다. SNS에 문장을 길게 쓰면 아무도 보지 않는다. 고작 그 말을 하느라, 그리고 몸소 자신도 그렇게 써보이느라 한 문장에 세 단어에서 열 단어 정도를 오가는, 매우 짧은 문장을 기계적으로 반복해서 쓰고 있었다.
그래서 내용은 어떻게 써야 하는 것이란 말인가. 깊이는. 넓이는. 개성은. 철학은. 공감은. 산문과 운문의 차이는. 화자의 내면과 존재와, 그가 만들어가는 인물들의 대화와, 이야기의 형식과 문체는.
에어프라이로 바싹 말린 듯한 문장들이 네댓 개 되는 단락 분량의 전체 글을 채우고 있었다. 아무리 SNS에 올린 쿠키 같은 글이라지만 기괴했다. 그것은 무언가에 대한, 어떤 농락 같았다. 그가 무엇을 조롱하거나, 또는 사칭하거나, 흉내 내거나, 풍자하고 싶었던 것인지, 또는 과시하고 싶었던 것인지(가령 자신이 얼마나 짧고 간결하고 정확하게 할 말을 전할 수 있는 글쓰기의 소양이 있는지) 정확히는 몰랐지만. 그는 아주 오래된 무언가를 조롱하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그것이 글쓰기인지 문학인지 아름다움인지, 그 모든 것인지는 몰랐지만. 그것들 중 최소한 하나는 모욕을 당하고 있었다.
나는 불쾌하고 짜증이 났다. 그가 그 글을 통해 개인적으로는 내게 어떤 말도 하고 있지 않았음에도. 나는 철저한 익명의 독자였음에도.
그는 그냥 SNS 글짓기 스타였다. 자본주의의 노예가 되어 글조차 자본주의 논리를 적용해서 효율적으로, 경제적으로 쓰는 것이 글쓰기의 전부인 줄 아는 애송이.
나는 그가 쓰는 글을 더 이상 읽을 필요가 없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구독을 끊었고 이제 그의 계정의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분노를 갖고 있다. 겉만 번지르르하고 내용이 없는 것들을 마주할 때면 차갑게 식어버린다. 차가워지는 것을 넘어 이따금 뜨거운 화를 느낀다. 그의 글들이 그랬다. 그것들은 글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어떤 날림들이었다(내가 쓰는 끄적임들을 나도 ‘글’이라고 차마 부르기 부끄러워 낙서라고 표현하곤 한다.). SNS의 조각글 읽기의 노예가 되어버린 누리꾼들은 다 마셔버린 우유팩의 빈 틈으로 날아 들어가는 날파리들처럼 얄팍한 글을 훑어보며 라이크like를 누르는 일에 만족했다. 공업적인 문장들로 이뤄진 돌직구 쪼가리 글에 자신의 꿈이 다 구겨져 들어가 있기라도 하다는 듯이, 글쓰기에 대한 그의 가르침에 발뒤꿈치를 들어 경례를 했다. 하이 명확함. 하이 단문.
단순함은 어떤 것의 발현이다. 어떤 것이란 무엇이 되었든지 내용이다. 그것도, 가능하면, 아주 철저하고 엄밀하고 진지하게 파고든 지경에 가 닿은 내용이 되는 것이 좋다. 아니.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그래야 단순함은 힘을 가질 수 있다. 그제야 단순함은 아름다워 보이게 된다.
형식도 아름다움의 한 요소이고, 내용과 비견해서도 아주 중요한 하나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 하지만 그것만 있을 때는 껍데기가 될 뿐이다. 따라서 형식을 본질로 표방하는 태도를 마주하는 것은 굉장히 느끼하고 역겨운 일이 된다. 우리가 애벌레의 빈 허물을 보면서, 왠지 모를 징그러움과 괴기함을 마주하게 되듯이 말이다.
(잠시 숨을 고르고)
숨이 붙어있는 동안 결코 완성하지 못한 채 끝마칠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주제에 관한 한 나는 이제 막 아장아장 기어 다닐 수 있을 뿐이다. 서지도 걷지도 못한다. 그러니까 써나가면서 계속 보강하는 일이 불가피한 주제로써, 그것은 아름다움(미학)이다.
이토록 설익은 채로 쓴다. 그래서 ‘깊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설익은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필자는 자신에게 그것에 대해 한번은 꼭, 꼭꼭 눌러 말해 두고 싶었다.
필자조차도 SNS 글쓰기 시대 이후로, 더욱이 소정의 수익금이 생길 가능성이 보인 이후로 경거망동하며 아무 글이나 쏟아내고 있지만. 정말이지 그런(쉽게 쓰는) 현상은 (하나의 거대한 흐름으로써의) 퇴보가 분명하다. 문화도, 문학도, 지성도, 사유도 일제히 그렇다. 발전하는 것은 오직 테크놀로지, 그 자체뿐이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원인에 다가갈 수 있겠으나, 중요한 한 원인은 (충분히) 듣지 않으려고 하는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세계는 거대한 하나의 ‘관계’이다. 글쓰기도 그러니까, 관계로 정의될 수 있다.
관계는 대화로 이뤄진다. 의미로 가득한 진중한 대화와, 당장은 의미가 없어 보이더라도 실은 어떤 의미가 있을지 알 수 없는, 수다스러운 수많은 대화들이 모여 관계의 점성을 끈적하게 만든다. 그런 시간에는 단순함이 끼어들 자리가 아예 없다. 그것은 깊이의 시간이다.
깊이의 시간 속에는 장황함과 미침(craziness), 미쳐버릴 정도로 복잡다단하고 복합적인 세계가 있다. 다 이해하려고 했다가는 괴멸해 버릴 것만 같은 난해함과 헤궤함이 있다. 어두움과 공포, 뒤따르는 부질없음과 허무함, 회피. 습하고 축축하고 더러운 기분. 눈을 질끈 감고 책장을 덮어버리고 싶을 만큼, 끔찍한 미생물들이 땅속의 지렁이처럼 내 살로 파고드는 것만 같은 추리소설의 독서 경험.
때로는 바로 그런 것들이 나의 영혼을 비옥하게 한다. 그런 시간들이 쌓여 깊이를 이룬다. 켜켜이 깊어지다가 단단한 바위를 만나 더 이상 파고들 수 없는 때에 넓어지고, 넓어짐의 힘이 장중해져 깊어질 수밖에 없을 때 다시 깊어지게 되는 것. 깊이의 세계다.
단순함의 아름다움은 어둠 속으로 숨어 들어가 깊이 파고들어 갔던 날들이 반복되던 어느 날, 써나가는 이야기의 첫 문장. 그러니까 한병철의 아름다움의 구원 같은 책을 보면, ‘매끄러움은 현재의 징표다’라는. 아직 한눈에 다 알아차릴 수 없는. 그 깊이를 상상하게 하는 한 문장으로 아름답게 태어난다.
아름다운 것들은 누구다 다 알 수 있는 얄팍한 의미를 쉽고 단순하게 포장해서 노래하는 형식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다만 단순하게 표현하는 기법 자체를 내용과 맞바꾸는 자기기만을 하지 않는다. 양의 적음과 길이의 짧음의 미학을 강조해, 느끼하게 포장해서 다가오지 않는다.
깊이의 세계에서는 무엇이 의미 있고 무엇이 의미가 없는지, 무엇이 장황하고 무엇이 짧고 단순하게 아름다운지, 아직 알 수 없다. 때로는 의미가 하나도 없어 보이기까지 하는 수많은 미시적인 대화가 가장 의미 있고 아름다운 순간일 수 있다. 작고 천하고 어두운 것들이 무언가를 이룬다.
대화의 궁극과 본질은 말하기가 아니라 듣기에 있다. 예술은 쓸모없는 것에 미친 것처럼 공을 들일 수 있는, 그래야만 하는, 그래야 삶을 견딜 수 있을 것만 같은 정념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하는 일이다. 그것은 양과 길이, 이익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세계다. 그런 세계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바닷고동에 귀를 대는 가만히 귀 기울여야 한다.
문학에 있어 듣기란 다름 아닌 읽기다. 읽기는 쓰기의 깊이를 더하는 궁극적이고 본질적인 행위가 될 수 있다. 예언과 계시의 세계와도 같은 어둠과 슬픔 속으로 깊이 내려가, 완전히 빠져들어갔다 나와야 한다.
그러고 나서 때로는 한 문장이 한 페이지를 넘어가는 장황한 문장을 쓰더라도, 그것은 단순한 아름다움이다. 어딘가로 홀연히, 깊게 내려갔던 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는 그래야만 했다. 그래야만 했다면 그래야만 했다. 그는 어떠해야만 하는 것의 세계에 들어가 있다. 그는 양과 길이와 이익과는 상관이 없는 세계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버리고 말았다. 돈과 명예와도, 또 어떤 결과와도 아무런 상관도 없는. 그를 이끄는 것은 이제, 오직 그의 영혼 안에 물감처럼 뿌려지고 있는 페이소스뿐이다.
지금과 같은 스마트 테크놀로지 이후의 삶만을 살았던 세대는 깊이 잠수해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사유의 폐활량 같은 것이 현저히 짧아졌다고 할 수 있다. 깊이 빠져들어가 갈등과 번민 속을 헤엄치다가 수면밖으로 용솟음치는 문장이라면, 길든 짧든 단문이든 복문이든 무엇이 그리 크게 문제일 수 있나. 오래 깊이 읽기 힘들어하는 성급함의 시대와 그 속에서 인내심 없는 문해력을 갖게 된 우리의 읽기 능력이, 나약해진 우리의 체력과 독해의 탄력성이 문제라고 해야 한다.
깊이의 세계에서 축축하고 음습한 순간들은 어떤 의미를 가질지 모르므로, 잠자코 숨죽여 잠영을 해야 하는 시간이다. 공감하는 능력이란 명랑한 빛이 아니라 끔찍하고 찝찝하기 이를 데 없는 곳에서 피어난다.
다이빙 3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