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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gsin Apr 10. 2024

체리블라썸 블렌딩 설렘



언제부턴가 나는 스타벅스를 통해 가장 먼저 봄을 느낀다. 오늘의 커피는 하루아침에 일제히 밝은 맛의 커피나 이따금 체리 블라썸 블렌드와 같은 좋은 원두로 브류잉한 커피로 바뀌는 시점이 온다. 이제 겨울의 모든 무거움과 축축함을 던져 버렸다는 듯이, 아무 점선 없이. 날벼락처럼 봄이 된다.



벚꽃 색의 원두 포장지와 머그와 텀블러들이 진열대에 도배되고. 변화는 그뿐인데, 왜인지 매장은 더욱 화사해진다. 아직 벚꽃이 피기 전임은 물론이고, 밖은 아직 너무나 춥고 쌀쌀하다. 그러나 어김없이 곧 봄은 찾아오고, 스타벅스는 그렇게 자기가 계절의 주인인 듯, 자신이 봄을 몰고 오기라도 한 것처럼 언제나 신선하고 위풍당당하다. 돈의 계절은 늘 그렇게 자연의 계절보다 한 발짝 먼저 움직이고, 우리는 그렇게 도시의 봄 생기를 어느새 사랑하게 된다.

그래서 말인데. 내게는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한 매개로 악용하는, 봄 벚꽃 블렌딩 같은 이상한 리추얼이 하나 있다. 그것은 어쩌면 조금 변태적인 취미나 충동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주 간혹, 정말 아주 간혹 어떤 여성 의류 편집샵의 신상품 소개 라이브 알림이 내게 오는데. 여성 옷을 살리 없는 나는 이따금 몰래(몰래일 수 없지만) 그곳에 들어가 가만히 숨죽이고 바라본다. 상품을 소개하는 그녀는 물론 일면식도 없는, 전혀 모르는 누군가이고 나는 내가 왜 그러는지를 전혀 알지 못한다. 문맥을 놓치고 멀리 달아날까 봐 미리 말해두지만 그것이 이성적인 매력과 관련된 것은 거의 아닌 듯하다.

다만 나는 살아있다는 감각을 생각하며 더듬어 보고 싶을 때, 내가 살아있는 것처럼 살아있지 않다고 느껴질 때, 그리고 마침 그런 중에 우연히 편집샵의 라이브 방송의 알림이 켜지는 것을 보게 될 때. 그리고 마침 내가 와이파이 존에 혼자 있을 때. 오직 그러한 때 들어가서 가만히 숨죽이고 바라보게 되곤 한다.

그곳은 직원들과 함께 회의를 하며 자체적으로 옷을 만들기도 하는 전문적인 샵인 것 같다. 어느 정도는 유럽이나 북미 등지로 직접 날아가 발품을 팔며 고르고, 현지의 편집샵들과 온라인으로 촘촘을 소통을 하며 수입해 온 옷들을 엄선해서 소개하는 것 같기도 하다. 여성 의류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짐작하고 상상할 수만 있을 뿐이다.

들어가면 샵의 대표인 듯한 여자는 라이브를 켜고 잠깐 카메라를 바라보며 싱긋 웃고는 잠깐 시야에서 사라진다. 그리고는 잠시 후 직접 착장한 신상품 옷을 입고 옷의 맵시를 보여준다. 그녀는 곡선적인 얼굴 매에 강아지 같은 표정을 하고 시종일관 그 계절에 입기 좋은 옷에 대해 작은 종달새처럼 쫑알거린다. 딱 그 계절에 맞는 옷과 화장과 생기로. 일종의 스타벅스의 오늘의 커피처럼.


니는 크게 두 가지 차원에서 설렌다. 그토록 전문성 있는 모습이 설렌다. 그녀는 여자로서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는 패션의 세계를  정말 좋아하는 것 같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 어떤 생기로서 몰두하는 목소리나 표정, 분위기 같은 것들에서 우드 향과 머스크 향이 섞인 냄새가 난다. 전문성의 설렘은 매우 짙은 것이라는 것을 그녀의 라이브를 보며 느낀다.



두 번째 차원은 무한하게 펼쳐져 있는 아름다움의 세계의 가능성을 느낄 때 마음이 넓어지는 데서 오는 설렘이다. 이 짧은 생에서 아름다움이란 무한한 세계가 얼마만큼 내 것이 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깊이 생각하고 마음만 먹으면, 어쩌면 나에게 주어진 아름다움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여성의 아름다움의 가능성은 남자의 아름다움보다 훨씬 더 다채로운 듯하다. 패션만 보아도 그렇지만, 화장이나 표정, 상호 관계 속에서 다양함을 줄 수 있는 여성의 에너지 같은 것들이 모두 아름다움의 가능성이다. 아름다움은 너무나 정직한 것이어서 무엇보다 오직 영혼으로서 실현할 수 있을 테지만. 또 언어로써 개성으로서 존재성으로서 실현할 수 있다는 사실이 내게는 퍽 설렘이 된다.



나는 언제부턴가 늘 청바지에 남방만 입고 살고 있는데. 기껏해야 얼굴에 덕지덕지 바르는 끈적거리는 화장품과 향수 정도가 나의 베리에이션의 거의 전부인데. 적어도 외모와 관계에 관한 한, 그러니까 그것들을 비틀 수 있는 어떤 변주성에 관한 한, 여성의 아름다움의 가능성은 너무나 넓고 매혹적이다.


내 기준에 따르면 나는 너무 긴 시간을 거의 죽어 있고, 그렇게 나는 안전하고도 어두침침한 음지 속에서 어떤 낯선 생기를 바라본다. 그러면서 가만히 생각한다. 이 옷들은 다 무엇일까. 여성의 생기나 곡선이란 다 무엇일까. 봄은 무엇이고, 고흐는 무엇이고, 쇼팽이나 라흐마니노프는. 지브리 애니메이션의 음악들은. 젊은 여자들이 밥을 먹으며 웃고 떠들며 활기 있게 가능성을 보이는 장면들은 무엇일까. 그리고 나는 이상하게도 눈물이 고인다. 금방 슬퍼져 엉엉 울고 싶어 진다. 모든 울음은 본래 봄을 머금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특히 그 울음만은 봄을 삼키고 있다. 그것의 웅얼거림에는 한아름 봄꽃 다발들이 뒤섞여 있다. 희망이기도 절망이기도 한 그 울음은 내가 보일 수 있는 가장 서글픈 울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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