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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아침

답다는 것에 대해서

by jungsin




무척 오랜만에 아침 라디오를 들었다. 라디오를 들으며 나른하게 깨어있는 아침이 가을의 꿈결 같았다.


멍하니 누워 진행자의 프로필 사진을 한참 바라보았다. 아침 그 자체구나. 아침 라디오란 추상 개념의 의인화 같았다. 외계인에게 지구의 아침이란 이런 것이라고 프리젠테이션 할 기회가 오면 이 이미지를 보여주면 딱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생기있는 마스크에 목소리도 아침에 너무 잘 어울렸다. 나는 잠들지 못한 새벽 네 시쯤의 목소리인 것 같은데, 나와 두 시간 차이밖에 나지 않는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 먼 세계에 있었다.






김기홍 작가라고 소개한 남성 작가가 읽어주는 클래식 곡들에 대한 원고도 정말 좋았다. 안타까웠던 것은 어쩌다 잘 듣던 라디오가 잠시 멈춰지고, 미처 다시 틀어두지 못한 채 다른 일에 정신이 팔린 사이 프로그램이 다 끝나버린 것이었다. 중간에 나온 클래식 두 곡을 엠비씨미니앱의 선곡표 탭을 열어 캡쳐해 둔다는 게, 그마저도 하지 못한 채 말이다. 너무나 좋은 선율에 자작하게 가을 정취에 젖어들고 있었는데. 속상해서 사연 게시판까지 다짜고짜 찾아가 그날 흘러나온 곡들이 어떤 지휘자와 연주자의 곡이었는지 문의글까지 남기는 열정을 보였다(좋아하는 일에는 이토록 부지런한 나).



그날 밤. 날씨에 비해 얇게만 느껴졌던 자켓 바람으로 이곳저곳을 헤집고 돌아다니다 오돌돌돌 떨며 들어와서는, 노곤하게 녹는 몸을 느끼며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새벽 내 따듯한 방바닥 위에서 식은땀을 엷게 흘리며 깊은 잠을 잤다. 그리고 눈을 뜨자 무척 에너지가 넘쳤다. 뭉클하리 만큼 너무도 오랜만에 활력이 생기는 아침이었다. 아득한 가을 아침의 정취였다.


설레다못해 다소 흥분해서 커다란 에코백 하나를 들고 현관을 박차고 나갔다. 코앞에 있는 개인 빵집 가기를, 사십 년만에 빵집에 찾아가는 사람처럼 감격스럽고 씩씩하게 출입문을 열어제치며 들어갔다. 제빵사 분이 누군지 늘 긍금했는데, 드디어 수수께끼가 풀렸다.


그 집 식빵들이 동네 빵집에서만 느낄 수 있는 맛을 갖고 있어서 몇 번 사러 가곤 했지만, 그때마다 젊은 남자 직원이나 아내분으로 추정(카드를 건네며 슬쩍 빵은 그 젊은 남자분이 만드는 거냐고 여쭤보니까 반사적으로 네네- 대답하시더니. 고개를 갸웃하면서 혼잣말로 젊은.. 남자?라고 되뇌이며 단말기에 카드를 꽂았다. 어딘지 시니컬하고 서늘한 미소를 엷게 지으며.)되는 여자분만 한 분씩 계셨다. 그도 자신이 갓 구운 아침 빵이 맛있는지 입안으로 어떤 빵인가를 오물거리고 계셨다. 관후한 인상의 중년 아저씨였다. 역시 다크서클이 한껏 드리운 그 음울한 젊은 남자가 만드는 빵이 아니었구나. 감동적인 식빵을 만드는 제빵사의 정체와 맞닥트리려면 이토록 이른 아침에 와야 하는 거구나.


홍석천 계란 볶음밥을 떠올리며 이내 마트 쪽으로 향해 보았다. 마트는 아직 문을 열지 않았고, 바로 옆에 아침 일찍부터 연 정겨운 야채가게가 하나 있었다. 왜 그런지 예배당이나 사원 같은 곳에 입장할 때처럼 차분히 걸어들어가게 되었다. 우선 아담한 가게 안을, 특별한 의식이라도 치르는 것처럼 한바퀴 돌아보았다. 놓여있는 야채들 하나하나가 정감어리고 숭고하게 느껴졌다. 파와 숙주, 청국장, 건바나나칩을 집어들고 계산대로 가져가자, 총 칠천오백 원. 동네에 있으면서도 처음 가보게 되었는데. 무척 저렴하고 신선한 집이었다.


찬 아침 기운을 머금고 돌아왔다. 가슴이 기분 좋게 뛰었다.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바싹 다가가 진지하게 커피를 내렸다(사실 디제이가 ‘식빵과 아메리카노가 생각나는 가을 아침’이라고 멘트하는 것을 듣고 그 빵집이 떠올라 뛰쳐나간 것이었으니까, 콩닥이며 기다렸던 순간이었다). 이내 단면을 자르지 않은 곡물 식빵을 손으로 뜯어먹으며 따듯한 아메리카노를 홀짝였다. 라디오에서 들었던 라흐마니노프 첼로 소나타 19번을 찾아 들으면서. 너무나 오랫만의 ‘아침’이었다. 가을답고 아침다운. 답다는 것은 참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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