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람은 바로 ‘나’이다.
내가 주인공에서 빠졌다고, 밀렸따는 사실을 알게 됐을때, 세상의 중심이 나에서 나 이외의 사람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을 느낄때가 있다.
중학교 1학년때인가, 6학년때인가, 달리 영화채널이랄것이 없이 매주 집으로 배송되는 시사저널의 짜투리 코너에 나오는 영화소개란에서 ‘트루먼쇼’라는 영화를 접한적이 있다. 정말 나의 이야기라고 믿고 싶을 정도로 소름돋는 설정이었다. 나를 위한 세상인가, 세상을 위한 나인가, 세상 사람들은 나를 관찰하는가, 나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또 다른 관찰자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사춘기 시절과 맞물린 트루먼쇼의 충격은 사실 마흔이 지난 지금까지도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들고 있다. 특히,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사야하는 영업활동을 하면서부터 내가 간절히 바라는 모습을 다른 시청자들이 쳐다본다면, 그 사람의 마음을 살수 있을거야라는 막연한 믿음이나 소망 같은 주술적인 의미를 가득 담아, 헐리우드 액션급 주문을 외워본다. 심지어는 혼자서 해야할 행동과 말, 하지 않아야 할 행동과 말을 적어보기도 했다. ‘이제부터 나쁜짓 안할테니, 이번달 마감을 잘하게 해주세요~ 이번달 마감이 잘되면, 앞으로 옳지 않은 언행은 가급적 삼가할테니 나에게 기회를 주세요~’라는 식이다. 그때는 그게 전부였던것 같다. 그러면서 한달한달 지나면 그게 삶이 되고, 나의 노력의 보상이 내 삶을 지배할 것이라 믿었다. 무척 열심히 일했다. 매일매일 늦게 퇴근하는게 습관이 되었고, 고객이 최우선인 삶을 살았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매일매일 ‘선과 악', ‘행운과 필연', ‘정신과 육체', ‘양과 질'의 경계를 넘나든다. 이것이 맞을까 저것이 맞을까라는 고민은 늘 나를 사로잡았다.
아주 가끔, ‘내 인생의 주인공은 누구일까'는 생각을 해본다. 내가 중심인가, 내가 변방인가. 하지만 이 역시도 반복되는 일상속에서 고민만 하다가 저물어간다. 가끔씩 드는 확신 가운데 한가지가 있다. 다른 무언가에 집중하다 보면 이런 상념이 사라진다. 상념이 사라진 후 평온이 찾아오는데, 이때 뒤돌아보면 충만한 행복이 찾아든다. ‘지금 왜 이리 심심하지?’ ‘뭐 재밌는 일 없을까?’를 고민하다보면 깊은 고민의 수렁에 빠져든다. 하지만, 지금의 아빠처럼 해보렴. 방금전까지 트루먼쇼를 떠올리며, 과거 상념에 사로잡혔던 사람이 당부의 말을 적다보니, 상념이 사라지고 작은 유산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현재 내 모습이 어느 위치인지, 어떤 상황인지를 자주 점검하는 것은 필요하다. 하지만, 필요이상의 점검과 체크는 성장동력을 잃게 한다. 성장동력을 잃어버렸거나 잊어버렸을때는 작은 움직임으로 극복하길 바란다. 의자에 앉아서, 가만히 누워서, 같은 자세로 우두커니 혹은 멍하니 있는 것 보다는 손가락의 움직임, 팔다리의 움직임을 가만히 느껴보자. 내가 내 신체를 지배할 수 있듯이, 내 생각은 내 인생을 지배할 수 있으며, 많은 것을 이뤄낼 수 있다. 너희들의 존재 자체가 새로운 인류 역사의 시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생명의 가치에 대한 궁금증이 있었다. 한사람 한사람의 생명이 소중하다. 인간의 생명은 존엄하다. 왜 그럴까. 아빠와 엄마는 유니세프와 밀알재단 등 한두가지 후원단체를 정기적으로 후원하고 있다. 주로 아프리카 어린이들이라고 들었다. 꽤 오랜 시간 후원했고, 엄마가 후원하는 친구는 가끔 편지를 보내주기도 했다. 인간이 존엄한 이유에 대해 고민한 적이 있다. 왜 존엄할까? 한마디로 표현하지 못할 무언가. 침몰하는 유람선 안에 이미 50세를 넘긴 천재 물리학자 아인슈타인과 10대의 평범한 어린이 아인슈타인이 있다면 과연 선택은 누구여야 하는가. 현실과 이상의 갈림길이 아니다. 어린 아인슈타인을 구해야한다. 그 아인슈타인의 가능성은 아무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류를 구한다는 상상, 만화책에나 나올법한 이야기지만 가능성 앞에서 아무도 속단하지 못한다. 너희들의 존재 자체가 위대한 유산이고, 조금 심심하고 지루해도, ‘세상의 중심’이라는 자부심을 갖는다면 그것들은 사라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