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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함표 Jul 29. 2022

<인연>

닥터후의 닥터가 생각하는 인연

 난 어렸을 때부터 영국 드라마인 「닥터후」를 굉장히 좋아했다. 내가 처음으로 매번 챙겨봤던 드라마였고 가장 어렸을 때부터, 가장 오래도록 덕질하는 분야다. 거기서 주인공인 닥터는 모든 인연을 소중히 한다. 단 하루도, 한 시간이라도, 작은 언사를 나눈 이라도 소중히 한다. 바로 이게 내가 닥터후를 좋아하는 이유다. 어떤 인연이라도 최선을 다하고 한 번 인연을 나눈 사람은 소중히 대한다. 심지어 숙명의 적인 달렉에게 까지도.


 나는 그런 닥터에게 감명받아 닥터처럼 행동하려 했다. 어떤 인연이라도 소중히 하고 최선을 다하겠다고. 톨스토이도 말했었다. 지금 하는 일을, 이 순간을, 지금 만나는 사람을 사랑하라고.


 작품 내에서는 그런 노력들이 결실을 맺는다. 언제나 좋은 결과는 아니지만 좋은 결과가 대부분이다. 때로는 닥터의 슬픔을 극대화시키기는 서사적 장치로 작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어떠한가. 내 노력과 타인의 수용은 서로 다른 노선을 달리는 일은 다반사이며 때로는 그런 노력조차 할 수 없는 위치에 있기도 했다.


 그렇게 지나가는 인연들은 언제나 아쉽다. 아쉽지 않은 인연들은 기억조차 못할 정도로 내가 무관심하기 때문일까, 그래도 떠오르는 인연들에게 묻은 아쉬움은 지워지지 않는다. 그리고 세차게 달려오는 질문, “나는 과연 최선을 다했는가”. 매번 열심히 생각했지만 쉽게 답을 낼 수가 없다.


 때때로는 “타인은 나에게 최선을 다했는가”란 질문이 딸려오기도 한다. 이 가치 없는 질문이 왜 튀어나오는지 모르겠다. 이런 의미 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가끔은 이 질문에 대한 내 태도에 문제가 있지 않은지 생각도 든다. 그만큼 내가 타인에게 무관심한 걸까. 나의 최선은 타인을 위한 것인지 나를 위한 것인지, 이 역시 쉽게 답을 내릴 수 없다.


 더 좋은 인연이 될 수는 없었을까, 그들은 왜 나를 오해했을까, 난 그런 의도가 아니었는데, 오히려 내가 그들을 오해한 건 아닐까, 오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던 걸까, 결국 우리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개인일 뿐이었을까, 아니면 너와 나는 완전히 다른 세계의 사람이었던 걸까.


 물론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해  수는 없겠지. 하지만 이상하게 이런 데서 욕심이 생긴다. 인연이 뭔지,  노력만큼  되는 것이 인연이고 내가 인지하지 않아도 만들어지는 것이 인연인데.


 보들레르는 말했다. “사랑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별하는 방법을 아는 것”이라고. 나는 아직도 과거에 살고 있는 걸까. 모든 인간은 과거에 산다. 이제껏 나는 아니라고 생각했던 걸까. 부족했던 자기애가 이젠 과잉이 된 걸까. 아니면 그 이전부터 과잉이었던 걸까.


 사람은 살아가는 모든 것에 빚을 진다고 생각했었다. 근데 지금은 이미 지나간 인연에도 빚을 진 것만 같은 느낌이다.


역대 닥터들. 12대 닥터까지 있는 이 사진이 좋아 올렸다.





12대 닥터부터는 시즌을 챙겨보지 않았다. 인연을 중시하지 않는 모습들이 보여서...


오랜만에 소식을 찾아보니 14대 닥터가 선정되었고,

뉴 시즌 초창기 제작자였던 러셀 T. 데이비스가 다시 복귀한다고 한다.


밀린 시즌들을 조만간 챙겨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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