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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함표 Jul 31. 2022

김영하 단편집 <오빠가 돌아왔다>

미완성의 완성성

7년 전 문학비평 수업에서 과제로 냈던 글이다. 한정된 페이지 안에 많은 것을 담아내기가 어렵다는 것을 다시 또 느꼈던 비평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비평은 하나의 작품이나 작가론적으로만 빠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 책 자체도 작품이라 생각하기에 적어보았던 글이다.


 * 이 작품집의 인용은 작품명과 인용 페이지만 표기한다.





들어가는 말

 미완성이 완성이 되는 시기는 언제인가. 미완성된 문장을 들은 청자는 부족한 부분을 채워 완성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이것은 추측이나 상상일 수도 있고, 미완성된 부분을 화자에게 다시 묻기도 하거나, 때로는 미완성된 문장을 그대로 놓아버리기도 한다.


 미완성된 문장을 건네는 화자의 의도는 다분하다. 하나하나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굳이 화자가 말하지 않은 이유가 바로 그것으로 미완성이 완성의 조건인 것이다. 이렇게 화자를 거쳐 나온 미완성된 빠롤은 청자에게 가서 완성된 랑그가 된다. 미완성된 빠롤이 완성된 랑그의 조건이자 부속품이 되는 것이다. 이 전제는 나와 타인이자. 나와 타인이다. 나와 타자에 대해서 김석준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비평은 자기 비평이 아니라 타자 비평이다. 비평은 타자 담론에 귀 기울여 자기를 성찰하는 운동이기도 한데, 그것은 나의 타자화이자, 타자의 자기화이다. 나는 나 아닌 곳에서 나를 발견하는 동시에 너의 너됨이 나의 나됨임을 인식한다. 나는 내가 아니다. 나는 너를 말한다. 나는 너를 말하고 그 말 속에 스스로 동화된다.


김석준, 「머리말―타자 비평의 위의」 『무덤 속의 시말 – 김석준 문학평론집』, 종려나무, 2014, p. 5


 랑그는 청자의 의식이다. 김석준이 말했듯이 ‘타자의 자기화’란 화자의 빠롤이 청차에게 가서 완성된 랑그가 되는 그 시점으로, 청자의 의식은 곧 완성된 랑그가 되는 것이다. ‘나의 타자화’란 화자가 던진 빠롤이 타인에게서 완성된 랑그가 되었을 때다. 즉 ‘미완성의 완성’은 곧 화자와 청자의 상호협력적 관계에서 완성된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소설가 김영하의 단편집인 『오빠가 돌아왔다』에서 미완성이 완성이 되는 과정, 즉 미완성된 빠롤이 완성된 랑그가 되는 과정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미완성이 완성이 되는 과정

 미완성이 완성이 되는 과정은 다양하다. 김영하의 소설에선 여러 가지 방법이 나타난다. 그중 그의 소설 「오빠가 돌아왔다」에선 미완성은 완성의 과정 중 하나로 나타난다.     


 “야유회? 이렇게 모두?”

 그러니까 술주정뱅이에 고발꾼인 아빠와 그 아빠를 작신작신 두들겨패는 택배회사 직원인 아들, 그 아들의 미성년자 동거녀, 오피스텔 건설현장의 함바집 아줌마, 마지막으로 그 아줌마의 전 남편이 탐내는 교복의 주인인 중학교 일학년짜리 소녀가 야유회를 간다는 거다.

 “재결합은 안 한다. 왜냐? 내가 함바집 해서 번 금쪽 같은 돈을 거저 느이 아버지한테 갖다 바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엄마는 오빠와 잔을 부딪치고는 말을 이었다.

 “갈이 살기는 한다. 왜냐?”

 이렇게 말을 쉬는게 엄마의 버릇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 오래 쉬었다. 게다가 뭐가 쑥쓰러운지 씩 웃기까지 했다.

 “왜긴 왜야. 니들 불쌍해서지. 어이구, 내 새끼들.”


「오빠가 돌아왔다」, p.36


 위 소설에선 더 이상 부부가 아닌 엄마와 아빠가 아직까지도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거처한다. 자본주의에서 더 이상 살아남을 의지가 없는 예전의 우두머리는 자본의 힘에 굴복했다. 하지만 그 사이에서도 자본에게 반항하려 한다. 번번이 실패한 반항은 분노의 소음을 지나 원 세계의 고요함으로 전환된다. 아버지의 반항, 그 반항은 고요함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완성 이전의 미완성’인 것이다.


 ‘재결합’은 가족의 완성이자 엄마의 ‘미완성’이다. 미완성된 문장을 계속해서 내뱉는 엄마는 마지막엔 완성형 문장을 내뱉는다. 계속해서 자기에게 반문하다 오랜 시간 이후 꺼낸 말은 독자의 가슴을 깊이 파고든다. 이것은 ‘미완성된 문장’의 반복으로 독자들에게 불안을 심어주었다. 덕분에 완성의 성공적인 효과를 낼 수 있는 것이다.


 위의 미완성들은 완성 이전의 개체라면 미완성된 것들이 모여 완성이 되기도 한다. 절대 평범하다거나 정상적이라곤 볼 수 없는 가족 구성원들이 모여 가족 아닌 가족을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아래 인용문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그렇게 서울로 돌아오던 길에 오빠가 어느 여고 앞에 차를 세웠다. 그러더니 우리 모두 차에서 내려 기념사진을 찍어야 한다고 했다. 어디에서? 오빠는 스티커 사진 부스를 가리켰다. 엄마는 얼굴이 큰데도 맨 앞에서 찍어서 얼굴이 타이어만하게 나왔고 오빠와 여자애는 뒤에서 찍어서 쪼다처럼 나왔다. 나는 좀 예쁘게 나왔는데 여자애는 그게 조명발 덕이라고 구시렁거렸다. 바보. 조명은 나한테만 비추나.

 그럼 아빠는? 아빠는 그때까지도 술이 안 깨 짐칸에서 내리지도 못했다. … (중략) … 아 참, 슈퍼 아줌마가 자기 집 고양이가 새끼를 다섯 마리나 낳았다면서 한 마리 주겠다고 했는데. 내일은 만사를 제쳐두고 그 고양이나 데리러 가야겠다. 야옹아, 하루만 기다려라. 언니가 간다.


「오빠가 돌아왔다」, p.37


 미완들의 완성은 작가의 손에서, 독자의 머릿속에서 완성이 되어간다. 위 인용문에서처럼 결국 아빠 없는 가족사진을 찍고 나서야 소설은 끝난다. 완성되지 않은 가족사진으로 마감된 텍스트, 마감은 곧 완성이다. 그리고 새로운 가족의 출현은 새로운 완성을 암시하는 미완성인 것이다. 오빠와 언니로 대변되는 완전함, 그것이 바로 미완성이 완성이 되는 과정이다. 이러한 과정은 그의 다른 소설에서 나타나기도 한다.

  

    … (중략) … 진숙이 걔, 죽었어. 죽어? 언제 죽었는데? 죽은 애가 카드를 어떻게 보내? 며칠 전에 죽었어. 영수는 거실 티테이블 아래에 처박힌 신문을 꺼내 보여주었다. 재독교포, 의문의 변사체로, 지난 15일 연말을 맞아 일시 귀국한 재독교포가 서울 창천동의 한 여관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어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변사체는 정오가 다 되도록 인기척이 없는 것은 수상히 여긴 종업원에 의해 발견 됐으며 경찰은 피해자의 지갑 및 귀중품이 그대로 남아 있는 점과 예리한 흉기로 잔혹하게 살해당한 점으로 미루어 원한이나 치정에 의한 살인사건으로 보고 피해의 주변인물을 중심으로 탐문수사를 벌이고 있다.

    … (중략) … 대파를 다듬고 아귀를 씻고 콩나물을 부려야 할 즈음에 숙경은 남편이 앉아 있는 소파 앞 티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문제의 신문을 가지고 와 그 위에다 콩나물 봉지를 엎었다. 콩나물이 살인사건 기사를 덮었다. 그래도 기사는 콩나물의 대가리와 줄기 사이사이로 보였다. 재 × × 포, × 문의 변사 × × . 지난 15일 연말을 맞아 일시 × × 한 재독교포가 서울 창천동의 한 여관에서 × × 체로 발견되어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 × × × 정오가 다 ×도록 인 × × 이 없 ×  ×을 수 × × 여긴 × ×원에 의해 발 × × 으며 경 × ×  피해자의 지갑 및 귀중품이 × × ×  남아 × × 점과 예 × 한 흉기로 잔혹 × 게 살 × × ×  점으로 미루어 원 × × 나 × × 에 의한 살인사 × × × 보고 피해자의 주변 × × 을 × × × 로 탐 × × 사를 × × 고 있다.


「크리스마스 캐럴」, p. 251~252


 위 소설에서 작가는 완성된 이미지를 보여주고 의도된 빈틈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빈틈은 독자가 인식하는 순간 독자의 머릿속에서 채워진다. 그렇게 그 빈틈들을 채워나간 기사는 소설 속 아내의 불안이 된다.


 이처럼 완성은 미완성의 재료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미완성이 완성이 되는 과정을 인지하는 순간, 새로운 완성이 된다. 미완성과 불완전성은 완성의 새로운 재료로써 완성이 되고, 그 완성은 곧 다시 불완전성을 위해 달려간다.



비어있는 묘사

 위에서 얘기했듯이 작가는 자신의 의도 아래 빈 공간을 유지하기도 한다. 김영하는 이 역시 소설에서 적극 활용하고 있는데 이는 아래 소설의 제목에서도 나타난다.      


    살아 있다니 기뻐. 이 말은 공포영화에나 어울리는 대사일 것이다. 언제부턴가 나의 상상력은 너무 이상한 방향으로 발달해온 것 같다. 그렇지만 그녀가 살아 있다는 게 정말 기뻤다. … (중략) … 어설픈 불가지론자가 되어 나는 토익책을 펼쳐들었다. 역시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취업을 하면 뭔가 나아지겠지. 나는 애써 낙관적으로 생각하며 한 단어 한 단어에 집중하며 앞으로 전진했다. 어휘와 문장의 숲에서 벌이는 이 전투가 과연 언제 끝날지 도저히 가늠할 수 없었다.


「너를 사랑하고도」, p. 197


 이 소설은 제목 자체가 미완성인 문장이다. 그 뒤의 언어들은 적지 않았다. 그것은 곧 빈 공간으로 독자들의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빈 스케치북은 상상의 원천이다. 작가의 텍스트는 그 자체로 미완성이다. 묘사가 빈 텍스트는 독자의 상상력과 결합하는 순간 현실에서의 완성이 된다. ‘어설픈 불가지론자’란 단어 자체가 미완성이며, ‘불가지론’이란 사상 자체는 인간의 영역으로 탐구할 수 없는 미완성의 영역이다. 이로써 텍스트인 종이 위의 전투는 미완성의 완성이 된다.


 이처럼 상상 자체가 완성의 조건이 되는 경우도 있다. 위에 언급했던 것처럼 「크리스마스 캐럴」은 완성이 미완성의 조건이라면 아래의 소설은 미완성이 완성의 조건이 된다.


     … (중략) … 그녀는 나 같은 사람을 이전에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녀의 말을 종합해보면 나는 보헤미안적 예술가의 헌신이었다. 그녀에 의하면 나는 충무로라는 지옥 같은 현실을 견디기 위해 허무한 섹스와 독한 알코올에 탐닉하고 있으며 심지어 늘 허탈한 표정을 직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했다(그녀 말에 의하면 자신의 문학판 동료들은 모두 좀팽이이며 멋도 낭만도 모르는 샌님들이라고 했다). 그녀가 언제부터 그렇게 영화계 사정에 정통해졌는지 모르겠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나는 돈이 안 되는 영화를 만들 생각이 전혀 없으며, 그러므로 제작자나 투자자들이 지금까지 내게 돈을 대지 않은 것은 나와 영화에 대한 견해가 달라서가 아니라 내가 돈 될 만한 아이템을 갖고 있지 못해서였고 배우 캐스팅이 안 된 건 보여줄 시나리오가 없어서였고 시나리오가 없는 까닭은 제작사들이 돈냄새 나는 시나리오를 내게 밀어주지 않은 까닭이다. 동어반복이다. 시나리오 작가들은 제작사를 위해 글을 쓰지 감독을 위해 쓰지 않는다는 것을 내 앞에 앉아 있는 조윤숙만 모르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녀가 날 위해 기가 막힌 시나리오를 써주면 그것으로 만사 오케이다.


「너의 의미」 , p. 226



     … (중략) …

 “자학하지 마세요. 감독님은 누구보다도 멋진 분이세요.”

 나는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어쩐지 그녀가 쓰고 있는 시나리오에 이 장면이 들어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정말 미치겠군. 그게 바로 내 고통이래두.”

 

    … (중략) …

 “그래, 알았어. 열심히 해보자구.”

 조윤숙의 얼굴이 밝아졌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통유리창을 열고 콘도 베란다로 나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시누가 처녀가 아니란 걸 뒤늦게 알아버린 신혼여행지의 어린 신랑처럼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연기를 빨아들였다. 그리고 양평의 하늘을 향해 힘차게 내뿜었다. 어느샌가 그녀는 베란다로 따라 나와 등뒤에서 나를 꼭 껴안고 있었다. 그러곤 자식이 속삭였다.

 “감독님, 사랑해요.”


「너의 의미」 , p. 232~233


 신인 작가를 시나리오 작가로 이용하려는 완벽한 계획. 그는 이런 완벽한 계획을 영화계에서 여러 번 써먹었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녀에게로 전이되는 순간 서로의 위치는 역전된다. 분명히 같은 결과물이 나올 것임에도 불구하고 영화감독인 화자가 그녀를 이용하는 것이 아닌, 그녀가 화자를 이용하는 듯한 뉘앙스가 풍긴다.


 물론 이것은 화자의 상상력이 결집된 산물이다. 누가 완성이고 누가 미완성인지 모를 상황에서 소설은 끝난다. 사랑이라는 것이 감독을 부리기 위함인지 진짜 사랑인지 분간이 가질 않는다. 작가는 이 부분을 독자의 상상력에 맡기고 있다. 독자가 어떤 상상을 믿을지는 독자의 몫이다.


 나의 미완성은 타인의 완성, 이것이 조윤숙의 계략일지 감독의 순수한 상상일지는 독자가 믿기 나름이다. 만약 조윤숙의 계략이라면 그녀의 완성은 감독의 미완성이다. 화자인 감독의 입장에서 나의 미완성은 타인의 완성이다. 이처럼 화자의 상상은 소설의 완성을 더함과 동시에 완성과 미완성의 기로의 놓여있기도 한다. 상상력이 소설을 이끌어갈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 (중략) … 참, 경찰한테서는 연락온 거 없지? 나는 아직, 너는? 없어. 우리가 만났던 거, 경찰은 모르겠지? 그럼, 모르지. 걔들이 그걸 어떻게 알겠어. 아, 괜히 나갔어. 난 또 너도 나오고 중권이 새끼도 나온다기에 나간 거였는데, 이게 뭐야? 둘은 후회스러운 기색으로 한동안 말이 없다. 그날 밤에 그렇게 된 거지? 그런 거 같아. 그러니까 우리랑 만나서 술 마시고 진숙이가 여관으로 갔잖냐? 거기서 우리랑 만나서 술 마시고 진숙이가 여관으로 갔잖냐? 거기서 다른 누군가를 만난 거지. 누가 찾아갔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 기집애가 불렀을 수도 있고. 누구였을까? 모르지. 걔가 남자가 어디 한둘이었냐. 정식이 눈을 가늘게 뜨고 묻는다. 너, 그날 그냥 집으로 일찍 갔지? 영수는 담배를 거칠게 재떨이에 던져 넣는다. 너, 나 의심하는 거야? 아니, 그냥, 그날 잘 들어갔나 하고. 그나저나 이거 귀찮게 생겼는데. 뭐가? 어쨌거나 경찰이 걔 수첩이며 뭐며 죄 조사할 거 아냐? 그럼 약속 스케줄 이런 것도 나올 거고, 하다못해 전화번호라도. 영수는 재떨이에 걸쳐놓은 다매를 다시 피워물며 말했다. 뭔 걱정이냐. 죄 없으면 그만이지. 그게 아니라 내가 내일 모레 해외출장을 가야 하거든. 근데, 만약 경찰에서 내 이름 발견하고 조사하려고 왔는데 내가 해외출장중이면 날 가장 먼저 의심할 거라고. 안 그러냐? 그렇지? 글쎄…… 아마 벌써 출국금지조치가 내려졌는지도 몰라. 요즘에는 조금만 의심이 가도 바로 출국금지부터 시켜버리니까. 아, 그러면 난 끝장인데. 이번 해외출장 업무에 대해서는 나 말고는 아는 사람이 없어. 안 나가면 가구 전시회 출품 계약이 깨지는 거라고. 그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 줄 알아? … (중략) … 영수가 손을 들어 정식의 말을 막았다. 왜 지금 나한테 화를 내는데? 내가 출국금지를 시킨 것도 아니잖아. 그리고 아직 출국금지가 돼 있는지 어떤지도 모르고, 안 그래? 그러니까 진정하라고. 너는 그래도 아직 마누라가 이거 모르지?


「크리스마스 캐럴」, p. 258~259



    … (중략) … 영수는 버럭 화를 내고는 화장실로 갔다. 손을 씻어낸 물이 핏물처럼 벌겠다. 난 죽이지 않았다구.


「크리스마스 캐럴」 , p. 275


 위 작품에서도 상상은 발현된다. 단지 ‘현실에 기초한 상상’과 ‘상상에 기초한 현실’ 중 무엇이 먼저일 뿐인지 만을 논할 수 있는 것이다. 정식의 상상은 점점 현실과 근접해간다. 그들의 상상은 추리의 과정을 통해 경찰의 추측이 된다. 그리고 정식은 그 상상으로 자신을 묶기도 한다.


 첫 번째 들여쓰기 이후 소설이 끝날 때까지 들여쓰기가 다시 나오지 않는 이 불안한 소설은 ‘한 문단이 곧 하나의 소설’이라는 명제를 납득시키기에 충분하다. 문단의 파괴는 곧 소설 형식의 파괴이다. 하지만 이 파괴된 형식은 문단의 종료와 함께 끝난다. 단 한 문단에서 나타나는 내용상, 형식상의 미완성 · 불완전성 · 상상으로 대변되는 모든 것들은 완성의 재료가 된다.


 이 소설에서의 다른 캐릭터인 영수의 아내 역시 상상으로 새로운 꿈을 꾼다.


    … (중략) … 그녀는 다시 부엌 바닥에 깔려 있는 신문으로 고개를 돌린다. 의문의 변사체. 고대체 누가 진숙이를 죽인 걸까. 진숙이 한국을 떠나 있던 그 십여년 동안에도 그녀에게는 무수히 많은 남자들이 있었을 테니 그중의 하나겠지. 혹시라도 남편이 그랬다면, 그래, 한동안은 시끄럽겠지. 집으로 형사와 기자 들이 들이닥치고, 수색을 하고, 시집 식구들이 올라와 진을 치겠지. 아, 뭔가 사는 것 같을 텐데. 살인자의 아내가 되어보는 것도 흔치 않은 경험이지. 남편이 그런 흉악범이라는 걸 전혀 모르셨습니까? 여성지의 인터뷰 요철이 쇄도할 거야. 내 남편은 살인자였다! 멋진 헤드라인이잖아. 살인자와의 부부생활과 살인자와의 저녁식사, 살인자와의 신혼여행, 사람들은 그 모든 것을 궁금해할 것이다.


「크리스마스 캐럴」, p. 255



     … (중략) … 진숙이 말이야, 중권이 그 개새끼가 죽인 거래. 아까 뉴스에 나왔대. 씨팔 새끼 연락이라도 좀 해주지. 괜히 걱정하고 있었잖아! 숙경은 그런 영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아쉬움과 경멸을 반반쯤 섞어 씹어 뱉듯이 말했다. 정말 대단한 친구들이셔. … (중략) …


「크리스마스 캐럴」, p. 274



 하나의 완성이었던 숙경의 섬뜩하고 희망찬 상상은 아쉬움과 경멸이 된다. 그리고 아쉬움과 경멸은 상상은 미완성이 되어 남편인 영수의 완성을 돕는다. 불안함에서 벗어나는 완성의 재료, 영수는 내가 살인자가 아니라는 안도감에 싸여 격하게 중권이를 욕한다. 중권이가 벌인 살인의 완성은 영수의 미완성이 되고 영수의 미완성은 곧 아내인 숙경의 완성이 된다.


 반대로 완성되지 못한 영수의 상상은 현실의 완성이 된다. 미완성의 완성성. 그것은 도피를 위한 상상이다. 상상의 재료가 된 도피와 자기 합리화, 그 상상은 부부가 각각 다르게 나타난다. 원하는 것과 피하고 싶은 것. 하지만 결국 완성성을 가진 모든 것은 한 문단 안에서 나타난다.



나가는 말

 김영하의 소설 속에서는 미완성이 완성이 되는 과정을 작가가 직접 의도하고 있다. 그리고 그 주체는 곧 소설 속 주인공이 되기도 하고 독자가 되기도 한다. 미완성된 랑그와 완성된 빠롤은 작가와 독자가, 작가와 소설 속 인물이, 소설 속 인물과 독자가 서로 합을 맞춰가며 이루는 작업이다. 이는 곧 ‘나의 타자화’가 되기도 하고, ‘타자의 자기화’가 되기도 한다.


 이는 서로의 상상 속에서 발현되는 것이다. 작가의 상상은 곧 소설이다. 작가가 그려낸 상상은 현실을 기초로 하여 다시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작가가 이루어낸 상상은 새로운 상상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참고문헌

김석준(2014), 『무덤 속의 시말 – 김석준 문학평론집』, 종려나무.

김영하(2010), 『오빠가 돌아왔다』, 문학동네.

이명재·오창은(2009), 「문학비평의 이해와 활용」, 도서출판 경진.





김영하,『오빠가 돌아왔다』, 문학동네



다들 비평을 작품 단위로 하다 보니 책 자체를 비평하는 글은 거의 전무하더라. 이 글을 적을 때 당시에는 논문과 비슷하게 각주와 참고문헌을 주르륵 다는 비평들이 많았었다. 그런데 이 작품과 책에 대해서는 어떤 비평도 보이지가 않더라. 내 생각을 어떻게 하면 표현할 수 있을지, 근거는 어디서 가져올 수 있을지 고민이 많았던 글이었다.


 사실 얼마 전 글들을 정리하다 김영하 작가님에게 DM으로 위 글과 함께 팬레터를 보냈는데... 역시나 답은 오지 않았다. 작품 단위로 감상하는 것도 좋지만, 책 단위로 감상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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