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비혼 주의자로 살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외롭지 않으냐?"라는 말이었다. 사실 외로운 순간은 많았다. 하지만 이 외로움의 정의가 일반적인 외로움(예: 연애를 하지 못하여 느끼는 외로움)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외로움이었다.
사람들은 비혼 주의자가 된다면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초인으로 보는 듯하다. 하지만 비혼 주의자는 세속적인 감정의 범위를 뛰어넘은 초인이 아니라 결혼에 대한 관점이 다른 사람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처럼 외로움을 똑같이 느끼며 살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혼 주의자들은 쉽게 '외롭다'는 표현을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스스로 '외로움과 고립'을 자발적으로 선택한 사람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오늘의 글은 위에 대한 시선들이 조금은 변하기를 희망을 안고 시작한다.
나에게 비혼 주의자로서 살아가는 시작은 결코 쉽지 않았다. 앞서 말한 것처럼, 자발적으로 '외로움'을 선택한 사람으로 간주되었으므로 이성을 만나는 행동은 금기시된 행동처럼 보였다. 물론 가까운 친구들은 농담을 섞은 말들을 던졌지만, 당사자에게 그 말들은 농담처럼 들리지 않는다. 예를 들면, "넌 비혼인데 왜 여자를 만나느냐?" 혹은 "즐기기만 하고 책임은 지지 않겠다는 것 아니냐?"는 말들은 암묵적으로 합의된 책임과 의무를 배반하는 어긋난 행동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들이 나에게 말한 '책임'은 무엇이었을까? 무엇보다 비혼은 왜 '독신'이어야 한다는 시각이 형성되었을까?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에서 결혼은 '책임'과 '의무'로써 정의된다. 그리고 한 사람의 성숙한 인격체로써 태어난다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그래서 나의 행동은 한국 사회에서 지켜야 할 책임과 의무를 이행하지 않겠다는 선언처럼 보였을 것이다. 게다가 남성 비혼 주의자는 '가장으로써 책임과 의무'를 이행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물론 내가 비혼을 선언한 이유에는 위의 '의무와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내가 비혼 주의자로서 살고 싶다는 근본적인 이유는 나에게 주어진 삶의 방향을 수동적으로 따르지 않고, 능동적으로 내 삶의 방향을 설정하고 싶었다. 이런 점에서, 나의 비혼은 사전적 정의에 따른 '결혼을 하지 않는 행동'이 아니라 '내 삶의 주도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으로 정의하게 되었다.
작년 10월 EBS 다큐 시선으로부터 다큐멘터리 출연 의뢰를 받고 제작팀과 미팅을 가졌었다. 제작팀의 메인 작가는 나에게 "비혼을 선택한 결정적인 계기 혹은 이유가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아래와 같이 대답했었다.
제가 비혼 주의자가 되기로 한 이유는 '한국 사회가 정한 삶의 길'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길을 그대로 따라간다면 결혼을 해야 했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이 길의 옆으로 나가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그동안 보지 못했던 길을 찾았습니다. 그 길로 나아가니까 제 인생을 제3자의 관점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제 인생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발견한 것이죠. 이것이 제가 비혼이 된 이유입니다.
관점 디자이너 박용후의 저서 "관점을 디자인하라"의 표지에는 "없는 것인가, 못 보는 것인가"라는 부제가 있다. 박용후 작가의 말을 빌리면, 비혼은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못 보는 것"이었다. 사회가 정해 놓은 노선을 따라가다 보니 발견하지 못한 길이었다. 그리고 내 인생에서 '결혼'을 생각하지 못한 관점에서 바라보는 행동이 비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비혼 주의자로 살아오는 동안 비혼에 대한 나의 생각과 관점을 많은 사람들에게 설명했지만, 여전히 그들에게 비혼은 관점의 변화 혹은 내 인생을 바라보는 새로운 행동이 아니라 '일탈'처럼 보였다. 무엇보다 비혼 주의자에게 '연애'는 금기였다. 심지어 지인 중 '여사친(여자 사람 친구)'를 만나는 행동조차도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는 것처럼 느껴졌으니 비혼 주의자에게 사람을 만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처음 알게 되었다.
이런 상황이 한 두 번이 아니라 며칠, 수개월이 지속되면 아무리 독립심이 강하고, 취미생활이 많은 사람이라도 외로움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비혼이므로 '외로움'을 극복하는 것이 필요하다 혹은 너의 선택이므로 그 선택에 책임을 지고 살아가라는 주변의 시선은 정신적으로 힘든 시간이었다. 오죽하면 좋아하는 노래를 선택하더라도 '사랑, 연애에 관한 노래는 들으면 안 되겠지?'라고 스스로 생각했으니 비혼을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이 어떠했는지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어쩌면 그들에게 '비혼'은 무서운 질병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비혼 주의자가 된 이후 1년 동안 결혼에 대한 긍정적인 이야기부터 홀로 늙어가는 인생의 공포, 두려움, 끔찍한 결과들을 듣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지난 5년 동안 정신적으로 피폐해지기보다 건강해졌고, 내가 원하는 삶의 모습, 취미생활을 더 잘 알게 되었다. 게다가 내 인생의 방향을 부모의 뜻, 주변 지인들의 희망사항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고, 설계할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 내 삶을 더 건강하게 만드는 철학을 알게 되었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즐겁게 해주고 싶다면 선행되어야 할 일은 나를 사랑하고, 나를 즐겁게 해 줄 수 있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이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는 나의 철학이다. 자신이 즐겁게 지낼 수 있는 방법도 모르고,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도 모르면서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을까? 설령 그것이 가능하더라도 지속 가능할지 불확실하다. 이런 점에서, 비혼 주의자로서 '외로움'과 함께 지내온 시간은 타인에게 의지하며 얻는 행복과 사랑이 아니라 스스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얻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주변에 비혼 주의자가 있다면 그들에게 '외로움'은 선택과 의무가 아니라고 말해주면 좋겠다. 그리고 그들이 '외로움'을 말하면 질책하기보다는 이야기를 들어주면 좋겠다. 우리가 한 사람의 반려자가 되면 힘들고, 외로운 것처럼, 비혼도 처음이기 때문에 어렵고, 힘든 일이 참 많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