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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구리 May 10. 2023

다시 새로운 길을 떠나보내며

어버이날 선물로 받은 아이의 훈련소 입소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녀석은 마지막 순간까지 짜증 나는 얼굴에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그에게는 다가오는 일초일초가 두려움과 미지의 세계였을 것이다. 반면 나는 이번이 이 녀석을 마지막으로 세상 경험을 위한 시험대로 보내는 일이 되기를 바랐다. 그럼에도 이상하다. 녀석의 얼굴을 보는 순간 울컥한 마음이 가라앉지 않는다. 예상대로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그날 참석한 주변의 많은 부모들이나 친척들도 다들 같은 마음일 게다. 몇백 명에 이르는 군입대 통지를 받은 젊은 청년들이 운동자에 모였다. 코로나 이후에 그토록 많은 젊은이들을 보아온 게 언제였던가. 코로나가 아니어도 젊은 이들이 한 군데 모여서 모두가 울상을 짓는, 무언가 바짝 긴장하면서도 불편한 표정을 하는 모습을 본 것이 언제였던가. 수십 년간 논산훈련소 입소를 앞둔 청춘의 한 시설을 보내는 이야기일 텐데 어느새 그것이 아비의 입장에서 하는 일이 되어버렸다. 친구를 보내는 것이나 선후배를 보내는 일이 아니라 부모가 되어보니 왠지 이리도 짠한 감정이 드는 것일까.

무사하기를 바란다. 건강하기를 바란다. 무엇보다 군대에 다녀오면 늙어가는 아비를 진정한 친구로 생각해 줄까. 아니면 그때부터 아비를 넘어서는 아들이 될런가. 여러 가지 생각이 맴돌지만 여전히 나는 아들과 친구가 되고 싶다. 운동장으로 입소생들이 나오도록 호출을 하자 그제야 이별이 눈앞에 다가왔음을 알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포옹을 하고 무언가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는데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질 않는다. 뭐지 이 눈물겨움의 정체는. 엄마는 울지 않는데 아비는 눈물을 흘리고 있는 상황은 뭘까.


군중 속에 섞이는 순간 아무리 구분을 하려 해도 다 똑같이 생긴 청년들 사이에서 내 아들을 찾을 수가 없다. 그냥 대충 언저리에서 사진을 찍어 그중에 한 명이 있을 거란 기대를 해본다. 그 와중에서 재미있는 현상이 보인다. 젊은이들의 체형이 내가 젊은 시절보다 많이 살이 쪘다는 느낌을 받는다. 나만의 착각일까. 아니면 세월이 바뀌어 잘 먹고 잘 사는 덕일까. 아이들의 체형이 아주 큰아이도 아주 작은아이들도 없어 보인다. 평준화가 확실히 이루어진 건 맞는 것 같다. 내 젊은 시절 군대를 가는 젊은이들은 모두가 삐쩍 말라있었지만 눈에는 독기가 서려있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 아이들에게서는 그런 독한 기운은 배어 나오지 않는다. 한 달간 이들이 어떻게 변할지는 모르겠지만 변화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대한민국에서 아들을 군대에 보내는 일이 뭐 대수라고 자세히 설명하는 글까지 쓰고 있는가 하는 분들이 계실 거다. 나도 사실 입영하는 상황을 끄적이고 싶지는 않다. 다만 어린 시절부터 3번의 긴 기간을 부모와 이별하면서 생활할 수 있는 기회를 줬었다.


중1학년때 강원도 평창에서 1년 동안 지낼 기회가 있었다. 봄의 농사철에 학생들끼리 생활하면 농사짓고 공동생활을 하다 가을에 추수를 하는 과정까지 농촌마을에서 살아가는 법을 생활로 체득하도록 떼어보 낸 적이 있었다. 그때는 너무 어린 시절이라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다행히 아이는 그 시절을 지내며 닭을 진지하게 돌본다거나 정자에 누워 하늘을 관조하는 여유로움을 자신 있게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본인은 기억이 거의 나지 않는다고 하지만 나는 녀석의 한마디 한마디가 기억에 각인되는 시절이었다. 이후 중2병의 엄청난 공격에 무력해지는 아들을 만나곤 했지만 그전까지 아들을 낯선 장소에 보내는 일은 꽤나 어렵고 힘든 결정이었다. 그것도 거의 1년씩이나.


두 번째는 고1 때부터 경북 봉화의 기숙학교에 보내는 고등학교 시절의 이별이었다. 약 2년 반의 시간을 그곳에서 보내며 외로움과 처절히 싸워야 했고 인문학적 공부를 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굉장히 괴로워하던 시간을 보냈다. 결국 2년 반의 시간을 맞추고 되돌아오긴 했지만 그 이후 꽤나 긴 시간을 스스로 무엇을 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하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이번에는 군대에서 아들을 오라고 한다. 내가 보내겠다는 의지를 보이지도 않았지만 어쩔수 없는 선택이다. 뒤늦게 진로를 헤매다 들어가 학교생활을 해보더니 스스로 판단해서 1학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하기로 결정을 했다. 사연이 있어 공익이었던 신체검사를 현역으로 바꾸고 드디어 어버이날 선물이라며 5월 8일에 입대를 하고 말았다. 본인이야 공익을 현역으로 바꾼 일이 얼마나 억울한 일이겠는가 마는 군을 보내는 부모의 심정 한편에서는 본인이 그토록 원했던 공적인 조직생활을 가장 처절하게 할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을 갖기로 했다. 공익근무를 하면서 밤에는 게임과의 생활, 낮에는 업무의 연속은 별로 권하고 싶지 않았던 내용이다. 암튼 세 번째로 아들을 떼어놓고 집에 돌아오는 경험을 하고 말았는데 개인적으로 너무나 힘이 든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이토록 대미지를 입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아마도 내가 약해져서 더욱 그럴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제 이튿날 밤을 보내고 있으니 굉장히 괴로운 시간이겠지만 그 동네의 시간은 그대로 지날 일이고 한달 후의 면회를 기다리면 된다. 대신 녀석이 살던 집에 가서 이것저것을 정리하는데 마음이 짠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사람의 흔적이 배어있다는 것은 있을 때는 모르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너무나 깊게 다가온다.


나중에야 자신이 지내던 공간을 찾아 컴퓨터와 이불 등의 그리움을 다시 찾았을 때를 한없이 편안하겠지만 찰리브라운의 블랭킷만을 찾던 라이너스던가 하는 친구의 모습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평상시의 집착을 끊어야 하는 일이 쉽지는 않을 것이기에. 나도 어느덧 띄엄띄엄 보는 아들이었지만 어릴 적부터의 자식에 대한 중독은 참 어려운 일이다. 부모자식 간의 중독을 끊어내는 일은 그 누구에게도 모진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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