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모퉁이를 돌 때마다 황홀경, 어디를 봐야 할지
한참을 울고 나니 마음이 맑아 옵니다. 식당으로 내려가 스테이크와 맥주를 주문하였습니다. 창 밖에는 눈이 내리고 식당 난롯가에는 트레커들이 옹기종기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음악을 듣습니다. 추위, 고소, 배고픔 등 어제까지 있었던 일상이 아득한 옛날이야기처럼 느껴집니다.
포르체 가는 길
팡보체(3930m)는 아마다블람 등반의 베이스캠프 역할을 하는 곳입니다. 식당에는 등반대 포스터와 등반 장비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장비는 셰르파로 등반대에 참여했던 롯지 주인이 사용했던 것입니다. 아마다블람은 해발 6812 미터의 높이에 불과하지만 암벽과 빙벽 기술이 뒷받침되어야 오를 수 있어 지금까지 430여 명의 산악인만 정상을 밟았습니다.
포르체(3840m)를 거쳐 돌레(4200m)까지 갈 생각입니다. 포르체에 가려면 가파른 경사면을 한참 올랐다가 산허리를 관통해야 합니다. 타보체 중턱에 까마득한 길이 아슬아슬하게 걸려있습니다. “자칫 실수를 하면!” 생각을 하자 가슴이 섬뜩합니다. 야크도 사람도 조심스럽게 걷습니다.
히말라야 자락은 실핏줄처럼 길과 길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거대한 산으로 가로 막힌 마을과 마을 사이를 산비탈을 깎고 바위를 쪼아내어 길을 만들었습니다. 길은 생명이자 소통입니다. 마을과 마을, 물자와 물자, 사람과 사람을 연결시켜 생명을 불어넣습니다.
팡보체에서 포르체 가는 길은 쿰부 히말라야 최고의 경관이 펼쳐 있습니다. 앞을 보면 남체에서 친근하게 지냈던 꽁데(6093m)와 샹보체(3760m)가 손짓합니다. 뒤를 돌아보면 아마다블람이 로체(8518m)와 로체샤르(8400m)를 배경으로 우뚝 솟아 있으며 티베트 불교 성지인 탱보체 사원 위에는 탐세르쿠(6608m)와 캉데가(6685m)가 미소를 띠고 있습니다. 눈이 부셔 어디를 봐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촐라(5360m)를 넘지 못해 아쉬웠는데 이곳에서 보상을 받습니다. 모퉁이를 돌 때, 뒤를 돌아볼 때마다 만나는 세상은 황홀합니다. 이제는 가지 못한, 하지 못한 일에 대하여 불만을 갖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나에게 주어진 길과 일에 대해 최선을 다 할 것입니다. 내가 선택한 길이 최상의 길이라고 믿으면서.
계곡 아래에 며칠 전 디보체(3820m)에서 딩보체(4350m)로 걸었던 길이 아스라이 보입니다. 임자콜라(강)가 흐르는 계곡에는 작은 점들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칼라파타르로 향하는 발길입니다. 기대와 불안감으로 산을 올랐던 그때가 아득하게 느껴집니다.
‘포르체 마을’에서
포르체 마을이 보입니다. 에베레스트에서 발원한 임자콜라와 초오유에서 흘러내리는 두드코시강을 좌우에 두고 돌출된 부분에 있는 마을은 아늑하고 평화로워 보입니다. 마을 언저리에는 티베트 불교 사원인 곰파가 있으며 돌담 사이로 밭이 펼쳐있습니다. 마을 주위에는 랄리구라스 숲이 세찬 히말라야 바람을 막아주고 있으며 초르텐과 타르초가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고 있습니다.
휴식을 위해 들어간 롯지에서 미국인 일가족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일주일 동안 체류할 예정”이라는 가장의 말을 듣자 머리를 망치로 맞은 느낌입니다. 매일 새로운 목적지로 걸음을 옮기는 저 자신을 보면서 “이게 아닌데!”하는 생각이 듭니다. 일상에서 벗어나 나의 내면과 대화하기 위해 왔는데 세상 속도로 히말라야를 걷고 있습니다.
포르체텡가(3680m)에 있는 두드코시강을 건너니 남체와 고쿄 갈림길이 나옵니다. 좌측은 세상인 카트만두로, 우측은 5천 미터 고봉인 고쿄리로 향합니다. 마음은 세상으로 향하지만 몸은 우측 능선을 오르기 시작하였습니다. 내리막과 오르막이 반복되는 것은 인생과 산행의 공통점입니다. 내려온 것만큼 올라야 고쿄리를 만날 수 있습니다.
히말라야의 ‘금 수저, 흙 수저’
네팔 젊은이들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옷차림이나 얼굴 모습이 세련되어 있습니다. 카트만두에서 빙벽 등반 훈련을 온 젊은이들입니다. 빙벽 등반은 고가의 장비와 많은 비용이 필요한 고급 스포츠입니다. 같은 이십 대 초반 나이지만 빙벽 훈련을 위해 온 젊은이의 모습에서 가족의 생계를 위해 무거운 짐을 지고 걷고 있는 제 포터 얼굴이 겹쳐집니다. ‘금 수저, 흙 수저’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히말라야 자락에서도 유효한 것 같습니다.
10여 일 이상을 걸었고 고산에 적응이 되었지만 여전히 산을 오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눈이 녹아 질퍽거리는 길과 가파른 계단길이 번갈아 나오며 지그재그로 고도를 높여갑니다. 한참을 오른 것 같지만 돌아보면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습니다. 포르체 마을이 코앞에 있습니다.
입에서 단맛이 단내가 날 무렵 돌레에 도착하였습니다. 돌레는 숙소만 있는 롯지 마을입니다. 비수기라 대부분 롯지가 문을 닫아 을씨년스러운 모습입니다. 가이드가 집집마다 문을 두드려 겨우 한 집을 찾았습니다. 하나의 롯지만 문을 열었다고 합니다.
짐을 정리하고 따뜻한 난롯가에서 앉자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 실감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