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와 치아즈, 파국을 향한 그녀들의 사랑 이야기
"복수는 나에게 있으니 내가 이를 갚으리라."
톨스토이는 『안나 까레니나』의 서두에 이 구절을 제시해놓고는 안나와 브론스키의 사랑을 파멸로 이끌어간다. 기차역에서 처음 만난 안나와 브론스키는 첫눈에 그들이 위험한 사랑에 빠지게 되리라는 사실을 직감한다. 브론스키를 본 안나는 볼품없고 지나치게 커다란 귀를 가진 남편의 귀를 문득 생각해내게 되고 그것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싫어지게 된다. 그리고 허위와 위선으로 가득 차있는 사회의 실체를 발견하게 된다. 육체적 욕망에 이끌려 시작된 그들의 사랑은 점차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의 삶을 파고들게 되고 안나는 자신의 사랑을 사회에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그녀가 원했던 것은 단지 그의 사랑뿐이었으므로.
기차가 멈춰 페테르부르크의 플랫폼에 내렸을 때, 곧 그녀의 주의를 끈 최초의 얼굴은 남편이었다. ‘어쩌면 좋아! 어째서 저이의 귀는 저렇게 생겼을까?’ …… 특히 그녀를 놀라게 한 것은 남편을 보는 순간 느낀 자신에 대한 불만의 감정이었다. 이것은 그녀가 남편에 대하여 항상 경험하고 있던 가정적 감정이었으며, 자기기만과 흡사한 것이었다. 그녀는 전에는 이 감정을 깨닫지 못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분명히, 뼈저리게 의식했다.
(『안나 카레니나』상권, p.140,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이철 옮김, 범우사, 2000)
영화 '색,계'의 치아즈는 매국노를 처단하려는 목적으로 이에게 접근한다. 그녀에게는 원수를 갚아야 할 형도, 역사적으로 한 대미를 장식하기 위한 목적도 없었다. 다만 연극에의 열정과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열정이 그녀가 이 일에 가담하게 된 이유일 뿐이다.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막 부인’의 역할을 맡아 이의 사랑을 얻으려 한다. 치아즈가 이의 마음을 얻으려는 찰라 이는 돌연 부인과 함께 상해로 떠나게 되고, 치아즈는 자신들의 거처로 찾아 온 선배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동료들을 보고는 혼란에 휩싸인 채로 사라져버린다. 막 부인을 완벽하게 연기해내기 위해 자는 행위까지도 리허설 해야 했던 치아즈는 단지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살아가게 된다. 그 후로 3년 뒤 다시 첫사랑을 만나게 된 치아즈는 모든 것을 버릴 각오로 다시금 막 부인의 역할을 맡아달라는 그의 부탁을 들어주게 된다. 이와의 첫 해후에서 그녀는 전과 다른 강한 끌림을 경험하게 되고 더 이상 ‘막 부인의 역할’이 아닌, 막 부인이라는 사람으로 살아가기에 이른다. 그리고 어느덧 진심으로 이를 사랑하게 된다.
안나는 브론스키와 관계를 맺은 뒤 “육체적으로 자신의 타락을” 느끼게 되고 “앞으로 자기는 어떻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하는 생각이 마음속에 떠오를 때마다 그녀는 공포에 휩싸이게 되어 그러한 상념을 쫓으려고 했다.” 하지만 이제 그녀의 머릿속에는 온통 그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사교계 뒤편의 생활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었던 브론스키에게도 그동안 자신이 느껴왔던 것과는 다른 감정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욕망의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아아, 당신은 나를 사로잡고 말았어요. 난 이제 당신 거예요.” 그녀는 자기의 가슴에 그의 두 손을 갖다 대면서 말했다.
“당연히 이렇게 되어야 했던 겁니다!” 그는 말했다. “두 사람이 살아 있는 한 마땅히 이렇게 되어야 했어요. 나는 지금 그것을 알았어요.”
“정말 그래요.” 그녀는 새파랗게 질려가면서도 그의 머리를 껴안으며 말했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뭔가 무서운 일이 있을 것만 같아요.”
“아니, 모든 것이 끝났어요. 끝장이 난 겁니다. 우리들은 틀림없이 행복해집니다! 우리들의 사랑이 좀 더 강해진다면, 그건 거기에 뭔가 무서운 것이 있기 때문에 강해지는 겁니다.” (상권, p.568)
증오에서 싹튼 애증의 감정 때문에 이로 하여금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려 했던 치아즈와, 자신에게 접근했던 수많은 여자들에 대한 경계심으로 가득 차있었던 이. 이 둘은 정사라는 행위를 통해 그 경계를 서서히, 또 순식간에 허물어버린다. 그것은 사랑이라기보다는 욕망의 처절한 몸부림이자 존재이유(raison d'être)였다. 그렇게 그들의 사랑은 시작되었고 마침내 예정되어있던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이혼해달라는 안나의 요구를 묵살한 남편, 아들에 대한 모성애와 죄의식, 브론스키의 차가운 얼굴, 다른 여자들에 대한 질투, 그리고 사회에 반하는 사랑을 선택한 여자라는 이유로 받아야 하는 질타. 이 모든 것들은 안나를 점점 더 혼란에 빠뜨리게 되고 밤마다 먹어야 하는 모르핀의 양은 그녀 자신도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만 간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 중에서도 그녀에게서 절대 바뀌어서는 안 되는 브론스키의 사랑은 점점 식어가게 된다. 이러한 브론스키의 냉담한 태도는 안나로 하여금 단 한 가지의 선택, ‘죽음’이라는 행위를 정당화하게끔 한다. 그가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믿을 수 밖에 없었던 안나는 육체적 사랑에는 진실이라고 믿었던 감정도 볼품없이 퇴색해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무작정 기차에 오른다. 그리고 자신이 한없이 쏟아 부었던, 파멸의 나락만이 남아있는 사랑을 위해 브론스키와 처음 만났던 기차역에서 몸을 던진다.
“당신은 마치 나를 위협하고 있기라도 하는 것 같구려. 좋아요. 나도 당신과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아요. 그 이상 내가 바라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브론스키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러나 그가 이 부드러운 말을 입 밖에 냈을 때, 그 눈 속에서는 단순한 냉혹함 이상으로 심술궂은 추궁을 받아 잔인해진 사람의 눈동자가 반짝하고 빛났다.
그녀는 그 눈동자를 보고 그 의미를 올바르게 추측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불행이다!’ 하고 그의 눈동자는 말했다. 그것은 순간적인 인상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영원히 잊지 않았다. (하권, p.311)
"그 남자 뱀처럼 나를 파고들어요. 언젠가는 내 머릿속까지 파고들 것 같아…"
선반 위에 놓인 권총을 보고도 이를 죽이지 못하는 치아즈와 권총이 있어도 일말의 의심 없이 치아즈와의 정사에 몰두하는 이, 이들의 사랑 앞에서 현실은 그들을 파멸의 길로 이끈다. 자신의 선물로 반지를 주는 이를 보며 도망가라고 말하는 치아즈와 그녀의 말에 정신없이 달아나는 이의 모습은 그들의 사랑이 진실이었음을 알게 한다. 치아즈는 동료들의 죽음을 차례로 지켜보며 미련 없이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치아즈를 죽여야 했던 이는 그녀의 방에서 그녀의 죽음을 슬퍼한다.
안나와 치아즈, 그녀들의 공통점은 파국이 예정되어 있는 사랑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졌다는 것이다. 물론 그녀들의 사랑은 금지된 것이었기에 모든 것을 내던질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욕망의 끝을 알면서도 그것을 향해 달려간 그녀들은 한편으로는 순수한 존재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사랑의 행위들은 바퀴벌레의 생존력만큼이나 놀라운 역사를 지닌 채로 우리에게 끊임없이 회고되고 있으며 여전히 어느 곳에선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대다수의 경우 『안나 까레니나』의 베트시 공작부인처럼 자신들의 행위를 ‘공공연한 정사’가 아닌 ‘비밀의 정사’에 한정시킨 채로 현실과 비밀을 적당히 잘 조율하며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것으로 위장한다. 그러나 자칫 잘못해 이런 부도덕한 사랑이 세상에 까발려지는 상황이 발생하면 그러한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당사자들조차도 까발려진 그들의 사랑에 대해 가차 없이 질책하는 이중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지극히 반사회적이고 경계해야 할 사랑에 빠져버린 그들 안나와 브론스키, 그리고 치아즈와 이의 사랑은 비록 그것이 모든 것을 걸게 한 사랑이라 할지라도 우리에게 도덕을 벗어난 사랑은 어떠한 결말을 맺게 되는지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에로스의 끝은 타나토스라는 진리를 톨스토이는 1000쪽이 넘는 소설로, 리안은 157분이라는 긴 러닝타임으로 여과 없이 보여준 셈이다. 그러나 톨스토이가 사랑한 인물은 그 자신의 모습을 투영해놓은 레닌도, 적당한 향락주의자인 오블론스키 공작도 아닌, 바로 안나다. 안나의 성실하고 정열적인 성격은 브론스키와의 사랑을 숨기지 못한다. 그래서 그와의 관계를 공공연하게 밝히고 남편의 부인이 아닌, 안나 그 자신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처음으로 남편을 비판하게 되고, 점차 자신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의 허위와 위선에 치를 떨게 된다. 그들은 얼굴 위로 베일을 내리고는 안나를 손가락질한다. 사회는 그녀를 용납하지 않았고 결국 안나는 죽음으로써 자신의 사랑을 완성하게 된다.
치아즈의 눈빛에서 안나를 느꼈던 건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은 채로 자신의 열정을 송두리 째 죽음에 내맡긴 그녀의 모습 때문이었다. ‘뱀처럼’ 파고드는 이를 거부하지 못한 채 그를 사랑하고 만 치아즈. 그녀는 어쩌면 이를 다시 만나기 전 이미 죽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에게는 순수한 열정 이외의 목적을 가지고 그 일에 가담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뭔지 모르는 혼란 속에서 3년이라는 시간을 흘려보낸 그녀는 막 부인이라는, 매국노를 죽이기 위한 노리개에 지나지 않은 그 역할을 다시 맡게 됨으로써 치아즈에게 막 부인은 자신의 존재이유가 된다. 그녀의 존재이유는 이를 만나면서 한층 더 확연하게 드러난다. 막 부인이라는 역할을 통해 그녀는 이를 사랑하게 되었고 그 사랑은 그녀를 치아즈가 아닌 막 부인으로 바꾸기에 이른다. 그녀는 막 부인에게 모든 것을 내던졌고 결국 그녀 역시 죽음으로써 자신의 사랑을 완성하게 된다.
그녀들의 사랑은 지독히도 쓸쓸하고 외롭다. 그렇기에 그녀들의 사랑을 지켜보기란 쉽지 않았다. 명백히 부도덕한 사랑이었기에 난 그녀들의 마지막에 대한 어떠한 변명도 해줄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그녀들은 자신의 사랑 앞에 순수했다는 말을 하고 싶다. 그것이 사회적 이념에 어긋나는 것일지라도 그녀들은 죽음을 끌어안은 채로 그 사랑을 시작했고 파멸에 기꺼이 자신을 던질 수 있었다. 사회적 이념이라는 건 어떻게 보면 일시적인 관습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부인이나 남편 이외 애인 한 둘쯤 있는 것이 그렇게까지 이상한 풍경으로 보이지 않게 된 요즘은 오히려 결혼 제도의 모순을 지적하며 이의 비합리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문학에서도,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불륜은 너무나 진부해진 소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안나와 치아즈처럼 명백한 결말이 지어진 사랑에 모든 것을 던지는 행위는 아이러니하게도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오게 된다.
그녀들을 통해 인간에게는 누구나 비단 육체적 욕망뿐만이 아닌, 그 누구에게도 쉽게 까발릴 수 없는 자신만의 솔직한 욕망이 어딘가에 숨어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욕망의 대가는 혹독하다는 진실도 함께. 그러나 그에 대한 징벌은 결코 사회나 인간이 내릴 수 없음을 안다. 그것은 톨스토이가 『안나 까레니나』의 서두에 인용한 성경의 한 구절처럼 ‘복수는 자신에게 있는 것이므로 자신이 갚을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안나와 치아즈는 그것을 해냈고 죽음으로써 그들의 삶을 완성했다. 그녀들은 우리의 양심이다. 그래서 나는 그녀들을 사랑하지만 그녀들을 떠올리는 것은 역시나 고통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