닐 포스트먼, <죽도록 즐기기>
닐 포스트먼의 <죽도록 즐기기>는 1985년에 미국에서 출간되었다. 내가 구매한 책은 2005년에 20주년 기념판을 내면서 저자의 아들이 서문을 덧붙인 책이다. 37년이나 지난 이 책은 텔레비전이라는 매체가 출현함으로써 우리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는지(그리고 달라질 것인지)를 다루고 있다.
이 책 이후 영상매체에 대한 심도 깊은 논의를 담은 책이 워낙 많이 나왔고, 신경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인쇄매체와 영상매체의 차이점을 명확하게 보여줄 수 있는 시대가 되었기에 이 책이 새로운 점은 없었다. 이를테면, <EBS 당신의 문해력>에는 책을 읽을 때 자극되는 뇌의 부위와 독서를 할 때 자극되는 뇌의 부위가 다름을 사진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미국이 세워질 무렵의 역사와 인쇄매체 관계를 다룬 제1부 2-3장을 빼고는 오히려 식상한 내용이 더 많았다. 그러나 저자의 핵심 주장에 대해서는 충분히 공감하고 있기에 지루하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초판 서문에서 저자는 암울한 미래상을 그린 소설들인 조지 오웰의 <1984>(1949)와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1932)를 나란히 비교하며 헉슬리의 미래상이 현재에 더 가깝다고 언급한다. 이 책의 제목은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서처럼 즐길거리가 풍부해서 (자신도 모르게) 통제당하는 현실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로 붙인 듯하다.
70-90년이 지나면 어떤 세상이 도래할지에 대한 예측은 오웰보단 헉슬리가 더 정확했던 듯싶다. 그러나 오웰의 통찰 역시 오늘날의 우리에게 많은 깨달음을 주므로 나란히 비교하며 헉슬리가 더 맞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가끔은 부적절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어떤 작품이 미래의 모습을 더 정확하게 예측했느냐가 아니라 그 작품이 (그 당시로부터 먼 미래가 된) 우리의 삶에 어떤 물음을 던지느냐와 그 물음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가 더 근본적인 물음이 되어야 하지 않나 싶기 때문이다.
저자의 의도는 충분히 알겠고, 제목 역시 전체의 내용을 토대로 볼 때 무척이나 적절한 제목이라 생각하지만 이 책뿐만 아니라 너무 많은 글에서 헉슬리의 미래상이 더 적합했다고 언급하는 것에 대한 불편함이 있었기에 언급했다.
이 책은 텔레비전의 등장으로 인해 과거 인쇄문화 속에서 훈련되어 온 인간의 논리적 사고력과 깊이 사고하는 통찰력이 심각한 타격을 받고 있음을 구체적인 예시들을 통해 자세히 지적한다.
당시만 해도 신경과학이 지금처럼 발전했던 시기가 아니었기에 저자는 "매체의 변화가 사람들의 정신구조나 인지능력의 변화를 초래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51쪽)는 전제를 깔고, "공공담론을 변화시킨다는 사실에 한정"한다며 선을 긋는다.
그러나 현재는 신경과학의 발전으로 독서를 할 때 자극되는 뇌의 부위와 동영상을 볼 때 자극되는 뇌의 부위가 다른 것을 증명했기에 인지능력의 변화를 초래한다고 주장해도 무리가 되지 않는 시대이기에 이 책의 요지에 전혀 불편한 점이 없었다.
오히려 텔레비전의 등장을 통해 영상이 우리에게 주는 해악을 자세히 분석한 점은 새롭지는 않아도 놀랍기는 했다. 영상으로 정보를 접하는 것이 일상이 된 현재에도 너무나도 잘 들어맞는 분석들이었다.
영상은 일관성과 판단력이 결여된 세계로 우리를 불러들였고, 마치 "어린애들의 삐까부(peek-a-boo world : 미국에서 숨어 있다가 까꿍하면서 얼굴을 내밀며 나타나는 아이들의 장난을 이렇게 부르는 모양이다) 놀이와 마찬가지로 끝없이 즐기는 오락" 속에 살도록 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텔레비전 속 뉴스는 심각하거나 끔찍한 현실을 전하다가도 아무렇지 않게 광고가 등장해 몰입성을 깨어버리기에 현실의 심각성을 진지하게 사유하게 만들지 못한다.
이런 문제들은 '타인의 고통'에 감정이입하기 어렵게 만든다. 바로 이 문제의식을 붙잡고 쓰여진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이 이 책을 읽는 동안 계속 떠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언제나 문제는 해결방안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 역시 분석은 유효적절하지만 해결방안은 요원하다. 영상매체가 주류가 된 현재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이 책의 말미에 두 가지 방법이 제시되어 있긴 하다. "하나는 바로 집어치워야 할 터무니없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절망적이긴 하지만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해법이"(241쪽)란다. "터무니없는 방법이란 텔레비전을 어떤 식으로 봐야 하는지 TV프로그램으로 보여주는 것이고", "절망적인 방법이란, 이론적으로 이 문제에 대처 가능한 유일한 대중 의사소통 매체인 '학교'에 의지하는 일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요즘 우리 사회의 대안은 저자가 터무니없는 방법과 절망적인 방법이라고 말한 두 가지가 혼합된 방식처럼 보인다. 교육계 안팎에서 '미디어 리터러시'를 교육해야 한다는 주장이 계속되고, 실제로 2022 학교교육과정에 반영이 될 것으로 보인다.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은 (영상 매체가 교육의 자료로 많이 쓰이는) 학교의 현실을 고려할 때 일부는 영상으로 (일부는 독서로) 이루어질 테니 "텔레비전으로 인해 뉴스, 정치쟁점, 종교적 묵상 등에 관한 우리의 인식이 어떻게 재설정되고 저하되는지 TV로 방영한다"는 생각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한 저자에겐 충격적인 일일 테다.
그렇다면 '교육'은 가능할까. 공교육이 얼마나 무너졌는지 끊임없이 보도되는 오늘날, 교육은 가능한 것일까. 저자의 생각처럼 "절망적"이지만 그래도 희망은 걸어보아야 하는 것일까. "희망에는 절망이 있"기에 "희망의 절망이 희망이 될 때"까지 희망을 거절할 수밖에. (마지막 문장의 큰따옴표는 정호승의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를 인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