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과 맞닿은 히말라야
(이전 편에 이어서)
굴막으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험난했다. 이미 해가 져서 주변은 캄캄한데 기사는 가로등 따위 없는 꼬불꼬불 절벽길에서 속도를 늦출 생각을 안 한다. 커브를 돌 때마다 귀가 멍해지게 경적을 울리는 건 필수. 속이 울렁거리고 정신이 없어서 조용히 갈 수 없겠냐고 했더니, 이 길은 너무 좁아서 반대쪽에서 차가 오면 이쪽에 차가 있다는 걸 알리기 위해 매번 커브길에서 경적을 울려야 한단다.
아닌 게 아니라 원웨이라고 해도 될 만큼 길이 좁고, 도로반사경조차 없다. 그럼 반대쪽에서 차가 오면 어떻게 하냐고 물으니 잠시 비껴 서서 그 차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린다고 한다. 이젠 총든 군인이 무서운 게 아니라 이 낭떠러지에서 떨어질 수도 있다는 게 더 무서웠다. 일단 차는 달리고 있으니 무사히 숙소에 도착하길 기도하는 수밖에.
기사는 그 속도 모르고 며칠 전 올해 처음으로 큰 눈이 왔다고 우리가 굉장히 럭키하다고 호탕하게 웃는다. 지금 나에게는 우리 가족이 무사히 숙소에 도착하고 또 이 길을 되돌아 무탈히 델리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 외에 다른 행운은 없다. 커브길을 백번쯤 돌고 마음속 기도가 소리 없는 절규로 바뀌어 가고 있을 때 드디어 숙소에 도착했다. 서둘러 차에서 내려 땅을 밟으니 살 것 같다. 너무 긴장한 탓인지, 아니면 갑자기 높은 지대로 와서 그런지 힘이 쭉 빠지고 오한이 몰려왔다. 스리나가르보다 더한 추위에 가져온 옷을 다 껴입고 감기약을 하나 먹고 오들오들 떨며 잠을 청했다.
다음 날 아침, 커튼 틈으로 들어오는 밝은 햇살에 저절로 눈이 떠졌다. 커튼을 걷어보니 맑고 파란 하늘이 눈에 보이고, 밤에 도착해서 하나도 보이지 않던 동네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인도의 다른 곳을 여행할 때는 볼 수 없었던 맞배지붕을 보니 이곳이 추운 지방이라는 게 비로소 실감이 난다. 어젯밤 좋지 않았던 몸은 아무래도 높은 고도에 적응하느라 그랬나 보다. 일어나니 아무렇지도 않다.
우리 호텔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유명한 굴막 곤돌라가 있었다. 우리 가족은 오늘은 곤돌라를 타고 내일은 스키를 타리라는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왔다. 아침을 먹고 천천히 걸어서 곤돌라를 타러 가기로 했다.
동네 길을 따라 조금 걸으니 굴막 곤돌라 입구가 나타났다. 뾰족한 침염수림과 연기같이 피어오른 구름 위로 높이 솟아오른 설산이 보인다. 우리는 이곳에서부터 곤돌라를 타고 해발 3,050m인 공두리(Kongdoori)로 가서 다시 곤돌라를 갈아타고 해발 3,950m인 아파르밧(Apharwat)까지 올라간다. 갑자기 높은 곳에 가면 어지러울 수도 있으니 처방받은 고산약도 챙겨 나왔다.
관광객들이 좀 있긴 했지만 줄을 서서 오랜 시간 기다릴 정도는 아니었다. 우리는 인터넷으로 미리 구매한 표를 보여주고 곤돌라에 탔다. 굴막 곤돌라의 좋은 점은 외국인과 인디언 요금이 동일하다는 것이다. 내가 이제까지 다녀본 인도의 주요 관광지에서는 외국인들은 자국민의 10배 이상은 되는 요금을 내야 한다. 그런 면에서 굴막 곤돌라의 평등한 요금은 아주 마음에 들었다.
며칠 전 내린 눈으로 곤돌라가 올라가는 길은 온통 눈밭이었다. 그리고 눈앞에 우리의 최종 목적지인 아파르밧이 보인다. 곤돌라 양 옆으로 늘어선 키 큰 나무들을 보니 여기가 정말 인도인지 믿어지지 않는다. 스위스 같은 이런 풍경을 볼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더 높이 올라갈수록 우리가 지나온 아래쪽으로는 쨍하게 새파란 하늘과 수백 개의 얼음 덩어리 산봉우리들만이 보인다.
압도적인 경관에 감탄하다가 문득 이 곤돌라가 안전한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호들갑을 떨며 곤돌라 어딘가에 제조 회사 이름이 쓰여 있나 찾아보았다. 그 회사 이름은 잊었지만 독일에서 만들었다는 문구를 보고 다시 마음의 평화를 찾았다.
해발 3,050m인 공두리 역에 내려 잠시 걸어보기로 했다. 햇살이 강해서 생각보다 춥지는 않았지만 주위가 온통 하얀 눈으로 덮여 있어 너무나 눈이 부셨다. 서둘러 선글라스를 끼고 발이 푹푹 빠지는 수북한 눈을 잠시 즐겨보았다. 우리와 동행한 기사 겸 가이드는 이곳이 스키장이라고 소개해 주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타고 온 곤돌라 옆으로 리프트가 보인다. 그런데 리프트가 멈춰 있다. 왜 운행하지 않냐고 물으니 아직은 눈이 충분히 오지 않아서 스키를 탈 수 없다고 한다.
이런 청천벽력이 다 있나. 남편에게 스키장에 왜 미리 확인해 보지 않았냐고 물으니 스키장 전화번호가 없었다고 한다. 그렇지, 여긴 스위스가 아니라 인도지. 인도는 구글맵에 나와 있는 전화번호는 레스토랑 아니고서야 거의 없는 번호라고 보면 된다. 이건 관공서도 마찬가지. "This number is invalid."라는 안내방송을 듣기 일쑤다. 굴막 스키장이라고 뭐가 다를까. 인도에 이렇게 결번이 많은 이유가 전기와 전화 등 간접자본을 만들 예산이 정부에 없고, 그런 시설이 갖추어지기 전에 휴대폰이 보급되어 그렇다는 것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주위를 둘러보니 우리나라 스키장이라면 으레 있을 스키하우스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 눈이 충분히 내리면 스키를 탈 수 있는 장소가 자연스럽게 되는 것이었다. 큰 눈이 왔다고는 하지만 눈 위로 솟아오른 바위들이 간간이 보인다. 어디가 스키를 탈 수 있는 곳인지 그냥 봐서는 구분조차 되지 않았다. 깃발 같은 표시도 없고 안전망도 없다. 일이 그렇게 되고 나서야 하는 얘기지만 그곳에서 스키를 타려고 했던 게 조금 무모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최종 목적지가 남았다. 이제 곤돌라를 갈아타고 아파르밧에 오를 차례다.
아파르밧으로 가는 길은 굴막에서 공두리 가는 길보다 짧았다. 그러나 곤돌라가 올라가는 경사가 아까와는 비교도 안되게 가파르다. 드디어 정상에 도착했다. 아파르밧에는 전망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곤돌라 역에서 내려 작은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설경이 바로 눈앞에 펼쳐진다.
곤돌라에서 밖으로 나오자마자 나의 눈에 가장 먼저 끝도 없는 하늘이 들어왔다. 하늘이 이렇게 크고 넓었는지 평소에는 깨닫지 못했다. 그리고 그 하늘 끝을 빙 둘러싸고 있는 히말라야의 수많은 봉우리들, 눈부신 태양, 맑은 공기. 하늘과 가까운 곳, 깊은 자연으로 들어오면 이렇게 오염되지 않은 곳이 있었다. 오른쪽을 봐도 왼쪽을 봐도 셀 수 없이 솟아있는 뾰족한 산들의 풍경이 비현실적이다. 아이는 아까보다 더 많은 눈을 봐서 제대로 신났다. 눈 위에 누워서 모양을 만들었다가, 발이 푹푹 빠지며 가파른 언덕을 올랐다가 하며 이 풍경을 만끽하고 있다. 주변의 관광객들도 모두 아이처럼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지만 하늘과 가까운 이곳은 놀랄 만큼 조용하다. 내가 소리를 질러도 목소리가 멀리까지 가지 않고 공중에 다 흩어져 사라진다. 별로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남편을 불러도 듣지 못하고 아이도 마찬가지다. 전화조차 터지지 않는다. 여기서 가족들과 갈라지게 되면 정말 큰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도가 높아 그런지 종종 숨이 가쁘고 머리도 핑 돈다. 땅에서야 인간이 잘난척하며 살았지, 깊은 자연 속으로 들어온 지금 인간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걸 제대로 실감한다.
아무 바위에나 철퍼덕 앉아서 광활한 자연을 눈에 담았다.
자연은 다 저마다 고유하게 아름다워서 어디가 더 좋다고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세속적인 관광객인 나의 시선으로 굳이 비교를 해본다면 대학생 때 가본 스위스 융프라우보다 굴막 아파르밧이 더 장관이었다. 그림같이 지어진 예쁜 집들, 무작정 걷고 싶어지는 산골의 작은 마을, 스위스 하면 떠오르는 풍경이고 사진으로 봤던 것보다 실제로 봤을 때 몇십 배는 더 아름다웠다. 그런 풍경을 먼저 보고 융프라우를 올라가서인지 오히려 감흥이 덜했던 것도 같다.
굴막은 그런 것은 없다. 인도 내에서도 관광지라고는 하지만 소박한 시골 느낌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아파르밧에 올랐을 때 자연이 주는 감동을 오롯이 느낄 수 있었다. 혹시나 해서 찾아보니 알프스 산맥은 약 1,200km, 히말라야 산맥은 2,400km라 한다. 그래서였을까. 융프라우에서 봤을 때보다 비교도 안되게 드넓은 하늘과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먼 곳까지 펼쳐진 봉우리들에서 알프스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광활함을 느낄 수 있었다. 터널을 통과하는 열차가 아니라 바깥 풍경을 다 볼 수 있는 곤돌라를 타고 올라간 것도 감동을 더해주었던 것 같다. 혹은 나이 때문일지도. 이곳저곳 신기하고 좋은 곳 많이 가봤지만 결국은 자연이 주는 감동이 제일 크다는 것을 알게 된 나이에 본 풍경이어서 더 절경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