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생각해 보면 위험했던 여행
(이전 편에 이어서)
스키장이 열지 않으니 우리는 갑자기 할 일을 잃었다. 이제 굴막에서 뭘 하면 좋을까. 기사 겸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조금만 차를 타고 가면 파키스탄 국경과 가까운 곳이 있는데 가 보겠냐고 한다. 그곳에 뭐가 있냐고 하니 그냥 경치를 보러 가는 거라고 한다. 어차피 차를 타야 뭐든 보러 갈 수 있으니 길을 나서보기로 했다.
굴막에 있는 동안 날씨가 따뜻해져서 눈이 녹고 있었다. 눈이 녹기 시작한 꼬불꼬불 산길을 따라 15분쯤 달리니 갑자기 도로에 검문소가 나타나고 총든 군인이 보인다. 아니, 잠깐만. 이런 풍경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는데. 오금이 저려오고 있는데 기사랑 군인이 몇 마디하더니 우리 차를 통과시켜 준다. 가면 안 되는 곳 아니냐고 했더니 그런 건 아니고 국경과 가까운 곳이라 검문이 필요하다고 한다.
검문소를 지나 좀 더 달리니 꼬불꼬불한 산길이 끝나고 갑자기 탁 트인 넓은 곳이 나온다. 산 아래로 북방의 키 큰 나무 숲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 평지였다. 우리 가족 외에도 다른 관광객들 몇이 와 있었다. 이곳의 여름은 어떨까 상상해 보았다. 푸른 풀밭 위에 돗자리를 깔고 몇 시간이고 이 자연 속에 있어도 좋을 것 같은 생각이 잠깐 들었다. 그런 평화로움을 분쟁지역인 이곳에서 감히 느껴도 되는 것인지 일말의 죄책감이 일어 그 생각을 몰아냈지만 말이다. 그래도 푸릇푸릇한 풀밭에 누워 눈 덮인 히말라야 봉우리들을 바라보는 건 스위스 어느 작은 마을에서 알프스 산맥을 보며 트래킹 하는 것만큼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여행에서 식도락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인데,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은 인도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몇 번의 인도 국내 여행으로 뒤통수를 세게 맞은 나는 이번에는 멀티 쿠커, 쌀, 미역, 김 등등 호텔방에서 거의 캠핑을 할 기세로 식재료를 챙겨갔다.
그러나 멀티 쿠커의 성능은 아마존 인디아에서는 역시 아무거나 사는 게 아니라는 교훈만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해 주었다. 밥을 할 수 있다는 상품 상세 설명은 허위 정보였던 듯 밥은 되지 않고 계속 생쌀이었다. 가져간 식재료로 미역국과 카레(인도 커리 아님, 오뚜기 카레)를 해 먹으려던 나의 계획은 보기 좋게 무너졌다. 하지만 호텔에서 주는 인도 커리를 3일 내내 먹을 순 없었다. 멀티 쿠커에 물을 많이 넣고 동전 육수와 미역을 넣어 정체불명 미역죽을 만들었다. 아마존 인디아 저퀄리티 아이템이 갖춘 성능이라기엔 너무 고성능인 전원 자동 꺼짐 장치가 있어 몇 번이고 미역죽을 식혀서 전원을 다시 켜기를 반복하여 본의 아니게 시간을 들여 정성스레 만들었다. 매운 인도 커리를 먹을 수 없었던 아이는 그것도 맛있다고 엄청 잘 먹었다. 그 당시엔 참 기가 막히고 어이없었으나 지금 생각해 보니 웃긴 추억이다.
추억은 또 있다. 카레 재료로 동네 슈퍼에서 산 양파와 감자 등 채소를 호텔 베란다에 내놨었다. 호텔방에 냉장고가 없기도 했고, 밤 기온이 영상 2도라 밖에 내놓으면 저절로 냉장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기대에 한참 못 미치는 성능의 멀티 쿠커 때문에 야채들은 우리가 돌아가는 날까지 베란다에 그대로 있었다. 그런데 돌아가는 날 아침, 짐을 싸고 있는데 베란다 쪽에서 부스럭부스럭 소리가 들렸다. 새가 내는 소리라기엔 너무 커서 혹시 커다란 산짐승이라도 내려왔나 겁을 잔뜩 먹고 있는데 베란다 문을 빼꼼 열고 밖을 본 남편이 원숭이들이라고 알려주었다. 나중에 조용해지고 나서 문을 열어보니 단 한 톨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다 먹고 갔다. 안 그래도 버리고 갈 참이었는데 원숭이 가족이라도 포식했으니 버리는 것보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잠무 & 카슈미르에서 3일간의 여행을 마치고 우리 가족은 다시 델리로 돌아왔다. 착륙하자마자 비행기를 뚫고 들어오는 먼지 냄새에 가슴이 답답해진다. 3일간 마스크를 끼지 않고 맑은 공기를 잔뜩 마셨던 게 벌써 옛날 같다. 미세먼지가 시작되니 그때의 차가웠던 공기가 저절로 생각이 난다.
내가 직접 다녀와서 그런지 여행 이후로 잠무 & 카슈미르에 대한 뉴스를 좀 더 눈여겨보게 되었다. 그곳은 유유자적 여행을 다닐 만큼 그렇게 안전한 곳은 아니었다. 대치하던 군인들이 부상을 입기도 하고, 테러도 심심치 않게 발생하고 있었다. 그런 그곳에서 2019년 모디 정부가 자치권을 박탈한 이후 주의회 선거가 얼마 전에 치러져, 자체 정부와 지역 의회를 다시 갖게 되었다고 한다. 분쟁 상황이 나아지려는지 아니면 더욱 대립하려는지는 알 수 없다. 히말라야를 품고 있는 숨겨진 보석 같은 그곳이 조금이나마 평화로워지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