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와 파의 소중함
최근 스레드 보는 재미에 한창 빠졌다. 이 똑똑한 스레드 시스템은 내가 외국에 살고 요리에 관심 있는 걸 알아서 외국 사는 한국인들의 요리 피드를 기가 막히게 잘 찾아 띄워주는데, 나보다도 더 한식에 진심인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외국에 살며 제각기 다 다른 어려움을 가지고 있지만, 어떻게 해서든지 비슷한 식재료를 찾아 한국에서 즐겨 먹었던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쉽지 않은 타지 생활을 견디고 있는 것이다. 파스닙으로 도라지 무침을 해 먹었다는 캐나다에 사는 사람, 야생 명이를 따다가 장아찌 해 먹었다는 영국에 사는 사람 등 한국 음식에 대한 그리움과 열정은 나만 갖고 있는 게 아니었다는 걸 알고 한편으로는 위로를 받는다.
그런데 그분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게 있었으니 그건 바로 어디에서나 쉽게 구할 수 있을 것 같은 ‘무’와 ‘파’를 구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무와 파가 없어서 인도 생활 초기에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생각해 보면 무와 파는 한국 음식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아주 중요한 식재료다. 김장을 하려고 해도 김치 속에 무가 들어가고, 뭇국, 생선무조림, 무나물, 무생채, 섞박지 등 친근한 반찬들에 무가 필수로 들어간다. 파는 된장 고추장만큼이나 중요한 식재료다. 당연히 김치 속에도 들어가고, 찌개, 국, 볶음밥, 불고기, 양념장 등 거의 조미료 수준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냉동실에 상시 들어 있어야 하는 게 당연한 법.
그러니 나 또한 현지 슈퍼마켓에서 무와 파가 없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대파는 물론 쪽파 같은 것은 한국 슈퍼마켓 아니면 팔지 않는다. 무 또한 마찬가지다. 길쭉길쭉 매운 인도 무조차 겨울 아니면 볼 수 없고 조선무는 겨울이 되면 한국 야채상에서만 주문을 받는다.
이제 인도에서 두 번의 겨울을 겪은 나는 찬바람 불고 추워지면 한국 야채상에서 무와 파를 대량 주문한다. 무와 쪽파는 한 번에 많은 양을 주문해 김장 속을 만들고 대파는 잘 씻어서 잔뜩 얼려둔다. 그리고 무와 파가 온전히 주인공인 음식을 꼭 만든다. 아이가 좋아하는 반찬 단무지와 짜파게티의 영원한 짝꿍 쪽파김치다.
단무지와 쪽파김치를 만들다니, 한국에 살았다면 절대로 만들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직접 해보니 이처럼 만들기 쉬운 음식이 없다. 다만 이 음식들을 만들기 위해서는 치자가루와 꽃게액젓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 두 가지는 인도에서는 구할 수가 없어 남편의 한국 출장길에 소중히 가져왔다.
단무지는 만드는데 30분도 안 걸린다. 물을 팔팔 끓여 소금 두 꼬집 정도와 설탕을 넣는다. 소금과 설탕이 녹으면 물의 양의 반 정도 되는 식초를 넣고 한 번 부르르 끓인 뒤 바로 불을 끈다. 얇게 썬 무를 그릇에 담아 식초물을 붓고 치자 가루를 넣은 티백을 담근다. 실온에 하룻밤 놔둔 뒤 그다음 날 식초물을 따라내어 한 번 더 끓인다. 그리고 다시 무에 붓는다. 식혀서 냉장고에 넣은 다음날이면 노란빛이 아주 고운 새콤달콤한 단무지를 먹을 수 있다.
그다음은 쪽파김치다. 쪽파를 깨끗이 씻어 꽃게액젓 1/2컵을 줄기와 뿌리 부분에 골고루 뿌려 30분 정도 절인다. 절일 때 특히 뿌리를 잘 절여야 한다. 그 사이에 김치 양념을 만든다. 양파, 사과, 마늘을 갈고 찹쌀풀을 쑤어 고춧가루와 다 함께 버무린다. 절일 때 사용한 꽃게 액젓을 따라내어 고춧가루 양념에 섞고 파에 골고루 발라 실온에서 하루 정도 익힌다.
이번에 단무지와 쪽파김치를 만들면서 하나 깨닫게 된 것은, 조금씩 만들어야 맛있다는 것이다. 이 겨울이 지나면 무와 파가 끝이라고 욕심 내어 많이 만들면, 이상하게도 조금 만들었을 때에 비해 그렇게 맛이 좋지 않다. 그래서 나는 다 먹고 두어 번 더 만들지언정, 며칠 안에 먹을 수 있는 양만큼만 만든다. 김치냉장고가 없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있었다면 어땠을까? 많이 만들어 잔뜩 넣어 놓고 언제든지 꺼내 먹을 수 있었겠지만, 그렇기에 소중함은 금세 익숙함으로 바뀌지 않았을까. 제철에 나오는 채소를 반갑게 맞이하는 마음, 끝나갈 때 아쉽지만 그 계절이 다시 돌아오길 기다리는 설레는 마음이 더해져 더욱 맛있어지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래서 날씨가 제법 따뜻해진 지금, 나는 이 겨울 마지막 단무지와 쪽파김치를 담그려고 한다. 무와 파 안녕히, 다시 돌아오는 겨울에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