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신 레이디핑거찜
“오늘 저녁 반찬은 뭐 하지?”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기 약 2시간 전쯤부터 시작되는 엄마들 공통의 고민은 저녁 메뉴다. 아마 이 고민은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 살든 똑같지 않을까. 그러나 익숙한 식재료가 없는 외국에서 살며 한식 반찬을 만드는 것은 훨씬 더 어려운 일이라고, 내가 그 어려운 일을 매일 해내고 있노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특히 그곳이 오지일 때는. 예를 들어 인도 같은 나라 말이다.
불고기, 삼겹살, 돼지고기 김치찌개, 수육, 미역국, 생선 구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좋아하는 대표적인 한식 메뉴들이다. 냉동 컨테이너로 부지런히 실어 날라 냉동실에 그득한 고기와 생선들, 남편 출장길에 트렁크 터지게 공수해 온 한국 식재료들로 이 국민 반찬들을 해 먹고살 수 있게 되었지만 대략 이 정도의 메뉴 풀에서 매일의 반찬은 돌고 돈다. 그러다 보면 “또 불고기야?”라는 아이의 투정을 들을 때도 있다. 인도에서 불고기를 먹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아이에게 설명하지만 아직 그걸 이해하기에 아이는 어리다.
메뉴 고민의 한계에 부딪쳤을 때 나는 가끔 한국 배달음식앱을 열어 메뉴 아이디어도 얻고 방학 때 한국에 가면 뭘 먹을지 즐거운 고민을 해본다. 5,000 Km 떨어진 곳에 있어 주문할 수도 없고 먹을 수도 없는 예전 우리 집 근처의 맛집들을 보며 한국에 먹을 게 이렇게나 다양했다는 사실에 새삼 또 놀란다. 그리고 내가 지금 한국에 있다면 어떤 음식을 주문하고 싶은지 상상해 본다. 내가 주문하고 싶은 메뉴는 도시락이다.
불고기나 제육볶음 등의 메인 반찬과 함께 각종 밑반찬들이 칸칸이 들어차 있는 그 도시락을 회사 다닐 때, 특히 장시간 촬영이 있을 때 많이 먹었다. 도시락이라 먹기도 편하고 반찬이 여러 종류라 먹고 나면 항상 든든해 외부에서 오래 작업해야 할 때 좋은 메뉴였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먹고 싶은 건 메인 반찬보다는 밑반찬들이다. 특별할 것 없는 재료들이지만 손이 많이 가고 시간이 드는 그 서너 가지의 반찬들이 나는 제일 먹고 싶다. 그리고 가족에게 차려 주고 싶다. 때로는 그렇게 소소한 반찬들과 함께 먹는 밥이 더 맛있고 든든하니 말이다. 나물, 장아찌, 진미채 등 하필 인도에는 없는 한국에서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만든 밑반찬들이 늘 아쉽고 생각난다.
그런 재료로 만든 밑반찬 중 요즘 유독 꽂힌 밑반찬은 바로 꽈리고추찜이다. 인도에서 꽈리고추는 당연히 구할 수 없다. 그래도 송아지 설렁탕을 만들었을 때처럼, 파파야 생채를 만들었을 때처럼 그럴싸하게 흉내 낸 음식에 눈이라도 속아 보고 싶다. 그래서 꽈리고추 대신 선택한 식재료는 바로 ‘레이디핑거’다.
‘오크라’로도 알려진 ‘레이디핑거’는 인도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채소다. 언뜻 보면 풋고추와 비슷하게 생긴 레이디핑거는 갈라 보면 정말 고추처럼 씨도 있고 상큼한 향도 난다. 이 정도면 꽈리고추라고 눈이 속아줄 수는 있겠다. 나는 꽈리고추찜 레시피를 검색해 그대로 만들었다. 잘 씻은 레이디핑거에 찹쌀가루를 묻혀 김을 올린 찜기에 쪄 내고, 간장, 파, 마늘, 고춧가루로 만든 양념장을 버무려 무쳤다.
무쳐 놓고 보니 모양새는 꽈리고추찜과 정말 똑같다. 하나 집어 얼른 맛보았다. 그런데 의외의 식감이다. 처음 씹을 때는 아삭하고 끝에 씹히는 느낌은 부드럽다. 레이디핑거가 꽤 단단한 편이라 스팀으로 쪄 냈어도 아삭하고, 안의 끈적끈적한 진액이 부드러운 식감을 만들어 주는 듯했다. 그렇지만 간장 양념장에 무쳤으니 맛은 완전한 한식 밑반찬이었다. 생김새는 영락없는 꽈리고추찜이라 눈이 먼저 속는다. 식감은 아삭하고 맛은 상큼해서 꽈리고추찜에 기대한 바는 아니었지만, 이건 꽈리고추찜을 흉내 낸 밑반찬이 아닌 아예 새로운 다른 반찬이다. 그러니 꽈리고추찜을 먹지 못했어도 괜찮아졌다. 밑반찬 하나를 새로 개발했으니 너무나 기쁘다. 생으로 썰어서 아삭이 고추 된장무침을 만드는 것처럼 된장에 무쳐 먹어도 잘 어울릴 것 같다. 이렇게 순식간에 반찬 두 개를 개발했다.
늘 채소가게에 널려 있던 레이디핑거였는데 이렇게 맛있는 재료였다니 그 진가를 이제야 알아본 게 미안할 지경이다. 잘 모른다고 무심하게 지나쳤던 식재료도 눈여겨보고 시도해 봐야겠다는 교훈을 얻는다. 늘 파리 오백마리가 가득해 사던 것만 사고 재빨리 나왔던 채소가게를 앞으로 좀 더 찬찬히 봐야겠다. 레이디핑거처럼 밑반찬에 너무나 잘 어울리는 보물 같은 식재료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