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이 없는 닭고기 메뉴
숱한 난관을 넘으면 반드시 오는 좌절, 절망, 체념, 그리고 그 사이에 가끔 찾아오는 안도감… 이 모든 것이 내가 지난 2년간 인도에서 고기와 식재료 확보로 투쟁하며 겪었던 감정이다. 그리고 나 혼자 알기 아까운 이 고군분투를 남기고 싶어서 브런치 연재를 시작하게 되었다. 한인 슈퍼마켓에서 살 수 있는 독일산과 칠레산 냉동 돼지고기, 인도에서 이 정도면 감지덕지지 했다가도 아무래도 한우에 비하면 한참 아쉬운 맛인 미트가이의 소고기, 버팔로와 양고기 패티 햄버거 등을 모두 경험하고 내가 깨달은 진리가 있다. 인도에서는 닭고기가 제일 먹을만한 고기라는 것이다.
다행히도 인도 닭고기는 맛있고 가격도 저렴하다. 또한 한국 못지않게 다양한 부위를 살 수 있다. 닭다리, 뼈를 발라낸 닭다리살 정육, 한국으로 치면 닭볶음탕용과 똑같은 커리 컷, 닭가슴살, 안심 등 대체로 모든 부위를 무항생제(라고 쓰여 있긴 하지만 증명할 길은 없으니 그냥 믿자) 고기로 구할 수 있다. 그중에서 한국에서는 본 적 없는 껍질 벗긴 통닭을 발견하고 충격을 받았다. 껍질 있는 통닭보다 기름이 적어 깔끔하게 요리할 수 있어서 좋다. 이것만큼은 인도가 한국보다 낫다(고 믿어야 내 마음이 조금 나아진다).
인도 통닭은 한국 마트에서 파는 통닭보다 크기가 큰 편이다. 우리 집은 세식구라 셋이서 그 닭을 다 먹기에는 양이 조금 많다. 그럴 때는 그 통닭을 세 번에 걸쳐 나눠 먹는다. 이 또한 2년간 숱하게 시행착오를 거쳐 발견한 성과다. 인도 통닭을 뼈만 남기고 먹을 수 있는 방법이다.
1차. 닭백숙
한국인의 소울 푸드라 할 수 있는 닭백숙. 딸아이가 후라이드 치킨 다음으로 좋아하는 메뉴다. 한국에서 사 온 소중한 국물팩이 킥이다. 이것만 있으면 한국의 맛을 100% 재현할 수 있다. 물에 대파와 마늘, 통닭을 넣고 부글부글 끓인다. 그렇게 끓인 인도 닭은 한국에서 먹던 것보다 더 육질이 연하다. 닭가슴살마저 퍽퍽하지 않고 부드럽다. 나는 늘 국물을 넉넉하게 끓여 닭백숙과 곁들여 낼 찹쌀밥을 지을 때 넣는다. 식구들이 찹쌀밥을 좋아하기 때문에 닭백숙 먹는 날은 닭보다 찹쌀밥이 더 잘 팔리긴 한다. 찹쌀은 남편의 한국 출장길 또는 한국 다녀오는 지인 편에 부탁해 사 왔지만 요즘은 인도에서도 갓 도정한 찹쌀을 구할 수 있어서 힘들게 한국에서 가져오지 않아도 된다. 내가 인도에 있는 2년 동안 정말 살기 좋아졌다.
넉넉히 낸 국물과 한참 남은 닭고기는 2차 요리를 할 때 쓴다. 닭백숙 먹은 다음 날 메뉴는 정해져 있다. 바로 닭 육수 냉면이다.
2차. 닭 육수 냉면
인도에 살면서 아쉬운 음식은 수도 없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냉면은 먹고 싶어도 절대 먹을 수 없는 음식이다. 냉면은 면발은 물론 육수가 진짜 중요한데 원래 냉면 육수는 소고기로 내는 것이니 아무리 한국 식당에 가서 먹는다고 해도 소고기 제대로 구할 수 없는 인도에서는 그 맛이 제대로 날 리가 없다. 한 번은 한국 슈퍼마켓에 갔다가 건냉면을 발견했다. 역시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은 터무니없는 가격에 망설이다가 한국 갔을 때 잔뜩 사 왔다.
백숙을 만들 때 넉넉히 낸 국물은 훌륭한 냉면 육수가 된다. 닭 육수에 건냉면에 동봉되어 있는 국물 수프를 조금 타면 마치 초계 냉면과 같은 맛이 난다. 내가 좋아하는 고기국물 진한 평양냉면의 맛은 아니지만 초계탕으로 유명한 충무로의 ‘평래옥’에 와 있다고 주문을 외우면 꽤 위로가 되는 맛이 아닐 수 없다. 남은 닭고기 살, 식초와 설탕을 넣고 무친 얇게 썬 오이와 무, 달걀까지 올리면 한국 식당 갈 필요 없이 인도에서는 내가 만든 냉면이 최고 맛있다.
3차. 닭냉채 샐러드
평래옥에는 초계탕과 만둣국 말고도 메뉴에는 없는 유명한 음식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반찬으로 나오는 닭 무침이다. 지금은 돈 받는 메뉴로 바뀌었다고 하는데 예전에는 무한 리필할 수 있는 반찬이었다. 분명 빨간 양념인데 맵지 않고 새콤달콤한 그 닭 무침은 냉면을 기다리면서 몽땅 비우고 한 번 더 리필해 먹는 게 국룰이다.
닭냉채 샐러드는 지금 우리 집이 평래옥이다 상상하면서 닭 육수 냉면을 먹다가 닭 무침에 영감을 받아 문득 떠오른 메뉴다. 야채는 양상추, 오이, 상추 등 냉장고에 있는 채소를 적당히 잘라 넣고 닭과 함께 소스에 버무린다. 우리 집에는 매운 음식을 잘 못 먹는 딸이 있으므로 빨간 양념이 아닌 허니 머스터드, 꿀, 식초, 올리브유를 섞어 달달한 양념을 만들어 냉채를 무친다. 그러면 샐러드를 먹는 느낌으로 채소와 닭고기를 먹을 수 있다. 이번에 만들었더니 딸내미가 두 번을 리필했다. 이렇게 하면 백숙으로부터 시작된 통닭 활용 요리 대장정은 뼈만 남긴 채 막을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