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집밥 연재를 마치며
남편의 한국 출장이 잡혔다. 그러면 출장 가기 약 2주 전부터 광란의 장보기가 시작된다. 그동안 휴대폰의 쇼핑 폴더에 뒤쪽으로 순서를 밀어 놓았던 쿠팡, 컬리 등 한국의 각종 쇼핑 앱들을 하루에도 몇 번씩 들락거린다. 평소에 필요했던 것들을 몽땅 장바구니에 담았다가 캐리어 무게를 생각해서 뺐다가 고민과 숙고를 거듭한다. 소비의 즐거움을 찾을 수 없는 나라에서 살다 보니 평소에 ‘없어도 괜찮아’라고 생각했던 게 한국 출장을 간다고 하면 ‘기회 될 때 사야 해’로 바뀌고 만다. 결국은 트렁크 두 개를 꽉꽉 채우다 못해 기내 캐리어까지 꽉 채워 온다. 그것도 거의 몽땅 식재료로. ‘한국에서 이런 것까지 사 왔다’ 하는 출장자의 트렁크를 공개한다.
말랑 쫄깃 가래떡
외국 생활에서 아쉬운 식재료와 음식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떡국, 떡볶이 등 여러 가지 한식을 해 먹을 수 있는 가래떡은 외국에 살면 살수록 아쉽다. 인도 한인 슈퍼마켓에도 물론 가래떡은 있지만, 쌀이 달라서 그런지 쫄깃쫄깃한 맛이 전혀 없다. 게다가 요리하고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푹 퍼져서, 떡볶이 같은 것은 밀가루 덩어리처럼 된다. 떡국도 마찬가지다. 먹다 보면 떡이 녹아 국물 속으로 사라질 지경이다.
이번에 인도를 방문하신 시어머니께서 뭐 가져가야 할 것이 없냐고 물어보셨을 때 나는 제일 먼저 떡을 외쳤다. 어머니는 좋은 쌀로 뽑은 가래떡과 떡볶이떡을 잔뜩 가져오셨다. 얼른 빨리 떡볶이를 해 먹어야 했다. 역시 어머니가 가져오신 한우 불고기를 넣어 궁중 떡볶이를 만들었다. 불고기 사이에서 퍼지는 것 하나 없이 오롯이 형체를 유지하고 있는 그 떡을 한입 베어 무는 순간 말랑하고 쫄깃한 식감을 입안 가득 느낄 수 있었다. 쫄깃쫄깃한 떡을 먹어 보는 게 얼마만이었는지, 그 자리에서 떡을 10개쯤 먹었던 것 같다.
김치의 생명 고춧가루
한국 사람에게 “김치 좋아하세요?”라고 물어보면 “네, 정말 좋아해요.”라고 대답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한국 사람에게 김치란 ‘좋아하는 음식’의 개념보다는 요리할 때 소금을 넣듯 밥상에 꼭 있어야 하는 그런 존재가 아닐까 한다. 집에서 밥을 먹을 때는 굳이 김치를 놓고 먹지 않은 날도 있었고, 밖에서 밥을 먹을 때는 늘 반찬으로 김치가 나왔지만 손대지 않은 적도 많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김치를 안 좋아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모든 한식을 내 손으로 차려 먹어야 하는 외국에 사니 신기하게도 김치 없이 밥 먹는 게 정말 힘들다.
그래서 인도 와서 난생처음 김장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럴 때 당연히 필요한 건 고춧가루. 김장 한 번 해본 적 없었지만 한국에서 인도로 짐을 실을 때 고춧가루를 넉넉히 사서 실었다. 그런데 김장을 할수록, 또 실력이 좋아질수록 맛있는 고춧가루를 쓰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지는 것이다. 조금만 더 매콤했으면 좋겠고 색깔이 좀 더 예쁘게 빨갰으면 좋겠다.
그래서 이번에 시어머니께서 인도에 오실 때 매콤한 햇고춧가루를 가지고 오셨다. 그걸로 담근 김치는 기존에 먹던 것보다 적당히 더 매웠고, 맛도 신선했다. 고춧가루는 필요할 때마다 조금씩 햇고춧가루를 가져오는 게 한 번에 많은 양을 가져오는 것보다 좋은 것 같다.
밥반찬 겸 스낵, 김
김도 꼭 사 오는 품목 중 하나다. 인도에서 김은 너무 비싸다. 그리고 한국에 수십 가지의 브랜드가 있다면 당연하게도 인도에는 한두 개의 브랜드밖에 없다. 전장 김, 도시락 김, 굽지 않은 김, 파래김까지 우리 가족이 좋아하는 다양한 종류를 사 온다.
김을 살 때 주의할 점은 욕심내서 사면 안 된다. 다음번 출장이 예정되어 있다면 그때까지 먹을 양만큼만 사면 된다. 그렇지 않으면 기름 발라 구운 김 같은 경우는 인도의 뜨거운 날씨에 쩐내 가득 풍기며 못 먹을 음식이 되고 만다.
인도에서 구할 수 없는 유기농 우유
인도에서 파는 우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비닐봉지에 담은 생우유고 하나는 팩에 담은 멸균 우유다. 브랜드는 여러 가지가 있어도 대략 이 두 가지 형태로 판다. 생우유는 유통기한이 짧고 다른 용기에 옮겨 담아 보관해야 해서 그런지 아무리 냉장고에 넣어 놔도 금세 잘 상한다. 멸균 우유는 고소한 맛이 없다. 또한 유기농, 무항생제 구분도 당연히 없다. 아이 있는 집에 우유는 늘 필수인데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인도 와서 우유를 거의 안 사게 됐다.
그래서 이번 출장 때는 아이가 먹기 좋은 사이즈의 유기농 팩우유를 사 왔다. 아이가 정말 맛있다고 감탄한다. 그것도 멸균우유라 맛은 생우유보다 덜할 것 같은데 역시 유기농이라 더 맛있는 걸까? 가끔은 아이 먹일 우유조차 맛있고 건강한 것을 찾을 수 없어서 서글프다.
겨울에 제격인 가루 쌍화차
나는 커피를 늘 달고 사는 사람이지만 차 종류도 즐긴다. 인도는 모두가 알다시피 차로 유명해서 한동안 다르질링, 아쌈, 마살라 차이 등 인도 차 마시는 재미에 빠졌었다. 그런데 햇빛이 미세먼지에 가려 희미해지고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겨울이 되면 생강차 같은 한국 전통차가 그렇게 생각이 난다.
그래서 가루 타입으로 된 쌍화차는 한국에서 사 오기 좋은 품목이다. 한통 사놓으면 스산하고 마음이 힘든 인도의 겨울을 버틸 수 있다.
한국 생각이 날 땐 한국 간식
때로는 한국 과자 한 봉지에 마음이 괜찮아지는 날이 있다. 한인 슈퍼마켓에 맨날 있는 똑같은 과자 말고 먹태깡이나 블랙 새우깡 같은 새로 나온 인기 과자, 밤이 콕콕 박힌 양갱, 아이가 좋아하는 미니 고래밥 등 이곳에서 구할 수 없는 과자를 보물처럼 숨겨 놓고 있다가 어느 날 선물처럼 꺼내 먹는다. 그러면 한겨울의 보라색 공기 청정기, 하루만 청소하지 않아도 새똥 천지인 발코니, 어딜 가나 새치기하는 인도 사람들, 델리 시내 한 번 나갔다 오면 어김없이 괴롭히는 교통 체증, 쓰레기 가득한 길거리 위에서 피곤해진 정신에 조금이나마 위로를 받는다. 과자 한 봉지, 간식 하나가 이렇게 위대한 존재였던가? 한국에서는 이렇게 큰 힘을 발휘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곳 인도에서 한국 간식은 보험 같고 비상금 같다. 마음이 힘든 날 꺼내면 이곳에서 버틸 힘이 생긴다.
인도 집밥 이야기를 연재하며 그동안 인도에서 요리했던 한국 음식과 그때의 나의 감정들을 떠올려 보았다. 고기를 구하지 못해 막막했던 순간, 반찬 아이디어가 없어서 배달 음식으로 한 끼라도 때웠으면 했던 순간, 그렇지만 마땅히 배달시켜 먹을 음식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또 요리를 해야 했던 순간, 열심히 한 요리를 가족들이 맛있게 먹었던 순간… 이제는 내가 먹고 싶은 어떤 음식이라도 재료만 있으면 대충 흉내 내서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가정 주부가 된 지 3년 차이니 회사로 치자면 신입사원 딱지는 완전히 뗀 셈이다.
회사는 연차가 차면 연봉이라도 오르지만 요리 실력은 늘어봤자 뭐 하나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런데 할 줄 아는 요리가 많아질수록, 실력이 늘어서 같은 음식이라도 더 맛있게 할수록 집이 좋아지고 편해졌다. 밖에서는 별로 먹고 싶은 음식이 없지만 한국에서 살 때보다 더 집밥다운 집밥을 만들어 먹으니 가족들이 즐거워하고 함께 집에 있는 시간도 늘어났다. 그러다 보니 꿈에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인도라는 낯선 나라에 조금씩 적응할 수 있었다.
어쩌면 한국이든 인도든 어디에 살든 집밥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가족이 함께 모여 밥을 먹으며 그날 있었던 일을 나누고, 매일이 똑같은 것 같지만 오늘만의 특별했던 일을 이야기하는 하루하루가 쌓여 우리 가족은 인도에서 더 단단해졌고 가까워졌다. 집밥을 요리한다는 건 그 시간이 계속될 수 있도록 애쓰고 노력하는 일이다.
이제 출장길에 공수해 오는 식재료까지 있으니 해 먹지 못할 음식이 없다. 퇴직과 맞바꾼 인도살이지만 가족을 위해 요리하고 집안을 가꾸는 이 시간은 누구나에게 주어지지 않는 소중한 시간이라는 것을 이제 안다. 인도에서의 남은 나날을 더 충만하게 감사하게 누려야겠다. 오늘은 또 무슨 반찬을 해 먹을까 즐겁게 고민하면서.
*** '채식의 나라에서 한국 집밥 만들기' 연재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