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eudi Nov 05. 2023

청자를 설정하기

끊임없이 이야기에 대해 생각하고 있답니다.

  내가 출퇴근을 하는 '직장'에서 일년 팔개월 씩이나 지낼 수 있을 거라고 그 누구보다 기대하지 않은 사람은 나 자신이다. 친한 친구나 부모 누가 아무리 놀라도 매일 아침 저녁으로 나 자신이 가장 놀라고 있기 때문에 별로 실례도 되지 못한다.

  꾸준히 월급이 들어온다는 건 엄청 좋은 일이구나, 생각했었는데 일이 많아지고 나서는 월급날 전후 일주일이 제일 내면의 분노가 들끓는 기간이 되어 있다. 뮤지컬 배우처럼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래 하던 직무를 십분 살려서 작가 직급으로 입사를 했는데, 요즘은 해외 출시 가공 프로젝트 매니징과 인공지능 개발 아이디어 및 마중물 코딩 수정 등을 병행하고 있다. 비주얼 스튜디오와 엑셀과 각종 LLM ai 들을 켜놓고 미친듯이 일을 하다 보면 엔돌핀이 쭈욱 솟아나며 성취감이 들기도 하고 월급 액수를 생각하며 분노가 치솟기도 한다.

  그리고 생각한다.

  다시 제멋대로 내가 만들어낸 세계의 규칙 속으로 오로지 내가 이끌어가는 진행을 위해 뛰어들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답은 창작과 예술에 대한 모호한 나의 정서적인 부분 보다는 경제 사회적 여건들이 앞선 대답을 한참 먼저 채워주고 있다. 그러지 않고 나서야 창작자로서 내가 대답할 차례가 될 텐데, 차례를 기다리지 않고서 미리 대답을 한다면 언제나 대답은 예스라고 생각한다.

  그 '예스'가 당장 취업하고 무리한 자취를 시작하고 생긴 빚더미와 갑자기 떠맡아 끌어안고 살게 된 고양이와의 생계를 책임져준다는 보장이 전혀 없는 게 문제라서 그 차례가 주효하다는 게 문제지.


  나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의외라고 여긴대도 할 말이 없고 실제로 의외라서 재미있게 생각하는 지점이 있다. 요즘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삶의 태도는 '무심함'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무신경함'과는 명확히 대비되는 태도이고, '냉소적임'과도 구별되기 위해 공들여야 하는 모순성을 요하는 태도이다. 과하게 기대하거나 격정적으로 되지 않기. 세심하고 상냥할 수 있음과는 공존하기.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의도에 대해 구태여 고민하거나 꼬리를 무는 사고를 차단하기. 그런 것들이다. 이것은 어느 날 갑자기 추구하기로 목표한 것이라기 보다는 내가 지금까지 치열하게 세상의 무엇들과는 지나치게 불화하고 세상의 모난 것들과는 무리없이 지내면서 정착한 귀납적인 '나'의 결론적인 모습에 가깝다는 것도 중요한 특징이겠다.

  그러나 무심해지기를 의식적으로 추구해서 좋아진 점은 사사로운 것들로 보다 쉽게 초조해지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다. 앞에 묘사한 것처럼 나는 요즘 상당히 바쁜데, 초조함은 내면의 에너지를 정말 끔찍하리만큼 비효율적으로 갉아먹는다. 초조함을 처리하는데에 무심함은 거의 천적이라고 할 만큼 건강하게 좋은 효과를 내고 있다.

  '가끔은 내 글을 써야하는데'라는 보채기도 그러한 초조함의 일부였기 때문에, 적은 대로라면 글을 써야 할 압박감은 그다지 없는 상태였다. 그건 어떤 업무를 맡아도 마감과 데드라인의 압박에서 자유로워지지는 못한 불우한 나에게(누구나 그러한가?) 더할 나위없이 좋은 상태였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된 문장을 소개한다.



우리에게 일반적으로 편안한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정서적 경험을 통제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감정과 행위는 어느 정도 그 자체로 지저분하며, 나와 타인의 틈새, 그 공간에 위치한다. - 스티븐 미첼, <상호작용의 위계>



  인용한 문장은 <서사 의학이란 무엇인가> 라는 책을 읽던 중 발견한 것이다. 인용된 맥락이나 원래의 출처나 문장 자체의 성분들이나, 학술적인 텍스트 그 자체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말이 지극히 종교적이라고 생각했다. 불교나 도교의 가르침 어딘가에서 나올 것만 같은 깨우침을 담고 있는 것 같았다.

  '감정'과 '행위'를 모두 나와 타인의 틈새에 놓는다는 것이 특히 그랬다. 불편하게 여겨지는 정서적 경험을 통제하기 어렵다고 느껴질 때의 이물감을 꼬집으면서, 사실 그것들은 원래 그 자체로 지저분하단다. 왜 불교 경전 해설을 읽으면서 허탈하게 키득거리며 느낀 기묘한 해방감을 이 순간에 느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일면 깊이깊이 공감하게 되기도 하였다. 나는 아주 중증의 우울증과 불안장애를 겪고 살아남은 사람이고, 지금 그 모든 증상이 과거가 된 지금도 우울증에 대해 가볍게 이야기 하는 사람을 보면 그만큼 마음의 동요를 겪고 내 마음에 난 생채기만큼 목소리를 살짝 높여 한 마디를 쏘아 붙이고는 만다.

  그리고 무심한 방향으로 단단해진 지금을 보자. 객관적인 상황이 아주아주 정말 그때보다 나아졌느냐고 하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나는 여전히 내가 치명적인 상호 결점에서 비롯된 갈등을 극복하고도 에로스와 결합된 로맨틱한 감정을 이어갈만큼 강렬한 의지가 있음을 확인한 바가 없다. 경제적으로 늘 불안정하고, 신용 불량자가 되기 직전에서 겨우 구사일생하기 일수이며, 효능감을 좀 더 확인할 수단이 있는 직장에서 여전히 성실성 하나는 마이너스 점수를 받고 있다. 집은 눈 깜짝할 새에 쓰레기통이 되고 만다. 스트레스성 폭식 증상이 생겨서, 마르고 (끔찍하게도 사회적 시선에서 보기엔) 아름답게 가느다랗던 몸엔 살집이 붙다 못해 여기저기 튼 자국이 생겼다.

  그러나 날이 흐리거나 뭔가 잘 풀리지 않아 기분이 한없이 가라앉을 때 나는 내 감정-기분이 나의 진정한 '내면'이 아니라 그것보다는 조금 거리가 있는 어딘가, 그렇다고 타인의 공간은 아닌 그곳, 인용글의 '공간'에 있음을 체감한다. 그 감정이 얼마나 가라앉든간에 자기 비하나 그것보다 더 심하게 나를 부정하고 싶은 모든 욕망들에게 비합리적이라고 판결내린 뒤 코빼기도 비추지 않는 무심함을 유지할 수 있는 그 흐릿한 만큼의 거리감 덕분으로 말이다.

  우울증에 대해 너무나 지겹고 그것만이 너무나 진실된 나에 가까워서 짜내듯이 한 자씩 글을 써내려갔을 때, 나는 빌고 또 빌었다. ADHD를 저주할 때도 그랬다. 그 병 혹은 장애에 대해서 더 이야기하지 않게 해달라고 말이다. 그때 내가 빌었던 것은 다른 사람들이 그러하듯 '무신경하게' 그런 것들에 대해 모르거나 약간 배려하는 타자의 예의 만으로도 충분한 사람이 되고자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우울증과 ADHD의 타자가 될 수 없는 영원한 당사자이고, 그 감정은 영원히 그 공간에 있을 것임을 어느날 '무심하게 바라보며' 깨달은 날. 내가 추구했던 나의 모습은 내가 알던 주변인의 것들이 아니라 나 자신이 미래에 가질 수 있었던 그 모든 불화들을 겪고 무던하고 단단해져 그 호르몬의 깽판질에 '일일이 휘둘리지 않을 수 있는' 무심한 "나"였다는 것도 깨달았다.

  나는 친구나 지인의 우울증과 불안증이 도져서 외쳐 뻗어 나온 말에 대꾸를 할 때 무신경하지 않다. 그렇다고 격정적으로 반응하지도 않는다. 쌍소리를 섞어서 진짜 정신병자 살기 힘들다, 한탄을 내뱉고는 우스개소리로 사고를 살짝 틀어주는 말을 떠올리고는 건네어 본다.

  우리 사이, 아마 그에게 훨씬 밀착되어 가까이 있을 감정과 우리가 주고받는 대화라는 행위는 인용의 말대로 애당초 지저분한 것에 지나지 않다. 하지만 세상에서 유난히 깨끗한 곳을 두고도 병적으로 깨끗하다느니 결벽증이라느니 하는 소리로 묘사하는 게 인간들이 아닌가. 본질적으로 지저분한 것들이 필요해서이든 어쩌면 그냥 그런 것들을 끼고 사는 것이 우리의 숙명이든 간에 그것들은 그저 거기 있다.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서 좀 더 나아지는 방향이 있기는 하다는 게 아주 설명하기도 모호하고 알아듣기도 모호할, 희망일 따름이다.

  글을 쓰고 싶을 때 나는 가늠하는 정도로나마 청자를 설정한다. 독백에조차 청자가 있다고 하는데, 맞는 말이다. 독백으로 쓰인 글도 시연되거나 읽어지기 위해 쓰이고 일기조차도 완전히 독자를 의식하지 않고 쓰이는 일은 드물 것이다. 우리는 아주 흐릿하게 나마 언제나 청자를 상정하고 사고한다. 내가 글을 쓸 때는 그것보다는 좀 더 뚜렷한데, 이 글을 읽고 분명히 좋아해줄 사람이나, 글에서 다루고 있는 화두에 대해서 그간 이야기를 나눴던 친구일 때도 있고, 글로써 좀 더 뚜렷한 위안이나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 상대일 때도 있었다.

  그냥 읽는 당신이 누구든 깔깔 웃길 바랄 때도 있고, 깜짝 놀라길 바랄 때도 있고, 아주 지친 어느 날 눈물섞인 웃음을 짓기를, 그래서 불면의 밤일 것만 같던 그 저녁이 까무룩 저물기를 바랄 때도 있었다.

  이 글을 쓸 때는 여러 명을 특정하지 않되 번갈아 떠올렸다. 내가 겪어와 도달한 상태에 대해서 연꽃같다고 말해주는 친구도 있다. 어쩌면 모든 사람들에게 디폴트로 옅은 로맨틱을 느끼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스스로 품은 아리까리 에이로맨틱인 나에게는 굉장히 간지러운 애정 표현이었되 그냥 정말 로맨틱보단 애착으로 설명이 명쾌한 “찐“ 에이로맨틱인 그는 '애정 표현일수도 있지만 그냥 그래서 그렇게 말한 건데요'라고 말할 것이다.

  또 오늘처럼 뇌속 사고와 날씨 속 습기가 섞이는 것 같은 날이면 한없이 영향을 받아 정신 못차리고 졸고 있을 친구를 떠올리기도 했다. 내가 "헤에... F쨩은 촛또 불편" 하면서 눙칠 때 사실은... 음 6번에 1번 정도는 이렇게 긴 생각들 대신 우스개로 눙치고 있다는 말을 굳이 건네주고 싶었다.

  그, 알잖냐. 나는 극단적으로 삶을 겪어낸 측면이 있고, 그만큼 빠르게 뭔가 습득하고 달려나갈 때가 있고. 가끔은 내가 너무나 아득하게 딴 소리를 하고 있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되기도 하는데.

  여전히 나는 나라는 거.



작가의 이전글 23.08.19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