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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젯밤달 김미주 Jun 20. 2018

멕시코에서 그림팔기-1

아주 단순한 깨달음


아침부터 분주했다. 숙소 마당에 굴러다니던 맥주 박스를 주워 간판을 만들고 몇가지 샘플을 그렸다. 여행자 거리에 나가 그림을 팔기로 한 날이었다. 평소에 특별한 애국심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작은 간판에 태극기를 그려놓고 COREA라고 적어놓고 나니 부끄럽지 않게 잘 해야겠다는 의무감이 들었다.  


[ 그림여행 : 멕시코에서 그림팔기 ] @San cristobal de las casas, Chiapas


돈을 벌려고 시작한 일은 아니었다. 전날 밤 게스트하우스의 숙박객들과 이야기를 하다 즉흥적으로 시작한 일이었다. 산크리스토발의 여행자 거리에서는 가끔 버스킹을 하거나 모국어로 헤나를 해주는 여행자들을 볼 수 있었다. 우리도 한글로 이름을 써주고 캐리커처를 그려주면 어떨까? 란 생각이 들었다. 팔리면 좋은 거고, 팔리지 않더라도 재미있는 추억이 될 거라 생각했다.


생각은 쉬웠지만 실천은 용기가 필요했다.

마음이 맞는 여행자 둘과 소박한 간판과 샘플 몇가지를 들고 거리에 나섰다. 우리가 가진 건 숙소 마당에 버려진 맥주 박스로 만든 간판과 몇 개의 샘플뿐이었다. 담담한 척 했지만 가슴이 두근거렸다.

적당한 자리를 골라 세팅을 시작했다. 박스에 몇가지 샘플을 올려놓자 마자 지나가던 어린 멕시칸 친구들이 말을 걸어왔다. 어설픈 스페인어로 더듬더듬 설명을 했고 자리를 잡은 지 1분도 되지 않아 첫 손님을 받게 되었다.


[ 그림여행 : 멕시코에서 그림팔기 ] @San cristobal de las casas, Chiapas
[ 그림여행 : 멕시코에서 그림팔기 ] @San cristobal de las casas, Chiapas


약간의 긴장감과 흥분은 오래가지 못했다. 눈코뜰새없이 바쁜 시간이었다.

첫 손님을 받자마자 다음 손님, 그 다음 손님, 줄을 서기 시작했다. 상인들, 여행객들, 현지인들로 시끄러운 거리의 땅바닥에 앉아 그림을 그리는 건 생각보다 집중되는 일이었다. 손님과 대화도 제대로 나누지 못하고 계속해서 그림을 그렸다. 길거리 타코가 5페소인 산크리스토발에서 한 시간 동안 430페소를 벌었다. 단어 그대로 대박이었다.


[ 그림여행 : 멕시코에서 그림팔기 ] @San cristobal de las casas, Chiapas
[ 그림여행 : 멕시코에서 그림팔기 ] @San cristobal de las casas, Chiapas
[ 그림여행 : 멕시코에서 그림팔기 ] @San cristobal de las casas, Chiapas


현실 도피 여행만큼은 하고 싶지 않았는데 결국 도피 여행이 되어버린 걸까, 라는 생각을 하던 즈음이었다. 두 달 전 막연히 그림 여행을 하겠다며 회사를 그만두고 긴 여행을 떠났었다. 이 여행이 끝나면 뭔가 달라질 거라며 기세 좋게 시작한 여행은 벌써 끝이 보이기 시작했지만, 함부로 뭔가를 얻었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오늘.

한없이 게을러질 줄만 알았던 산크리스토발에서 나는 나에게 용기를 주는 하루를 얻었다.

내 그림을 받고 행복해하던 사람들의 표정들로 나의 하루는 충만했고 내가 그림을 그리는 행위를 얼마나 즐거워하는지에 대해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아주 단순한 깨달음이었지만 현실에 살고 있는 나에게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한국에서라면 절대 상상도 못 할 경험.

지구 반대편에서 만난 낯선 사람들이 나에게 준 선물 같은 하루.  

멕시코가 점점 좋아지고 있다. 결국 나는 비행기티켓을 한 달 더 연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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