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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리나 Sep 17. 2022

[10줄 문학] 사이가 안좋은 부부

2022년 9월 13일 ~ 9월 16일


1. 사이가 안좋은 부부


우리 동네의 자전거 전용 도로는 대부분 보행자들의 산책로와 붙어 있다. 녹색 부분이 보행로고, 자주색 부분이 자전거 전용 도로인 것이다.


요즘 거의 켄타우로스처럼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바퀴 인간인 내 입장에서는 본의 아니게 보행자들의 보행 범위에 대해 민감해질 수밖에 없는데...


버젓이 보행자 도로가 있는데도 꼭 자전거 도로를 침범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중 가장 위험한 유형은 바로 사이가 안좋은 부부다.


일단 부부고, 일행이니까 나란히 걷긴 하는데 그들 사이에는 절대 좁혀지지 않는 미묘한 거리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 거리를 유지한 채 걸어가는데, 문제는 그 애매한 거리 때문에 둘 중 하나는 높은 확률로 자전거 전용 도로를 침범한다는 것이다.


땡땡 벨을 울려도 부부는 서로에게 다가서는 게 탐탁지 않다는 듯 마지막까지 미적거린다.


그래서 자전거를 타다 보면 저절로 '결혼이란 뭔가....' 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정말 사이가 아예 안 좋으면 이렇게 같이 산책도 안 나올테니 이건 결혼을 못한 나의 신포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2. 드랍 더 광고


한때 현역 마케터일 때는 알고리즘도 AI도 두려웠다. 언젠가 내 밥그릇 뺏을 존재인 것 같아서.


내가 기를 쓰고 광고 소재와 배너를 만들어서 A/B 테스트를 하고 머리로 직접 결과를 분석하는 것보다, AI가 하면 훨씬 빠르고 정확하지 않은가?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다수의 인간이 반응하는 것을 뽑아내어 말초적인 본능을 자극하는 것은 오히려 AI나 알고리즘이 더 잘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더 이상 마케터가 아닌 나는 아주 편한 마음으로 AI와 알고리즘의 추천들을 즐기고 있다.


마치 그들이 DJ고, 내가 켠 인터넷 창이 그들의 스테이지인 것처럼 말이다.


나는 새 창을 열거나 어떤 게시물을 클릭하기 전 생각한다.


광고, 주세요!

Surprise me!

할 일 없는 백수의 소소한 놀이다.




3. 대면 북토크



생애 첫 대면 북토크를 하게 되었다. 그것도 밥도 먹고, 맥주도 마시며 3시간이나 진행되는 북토크다.


출간한 지 거의 1년이 다 되어가는 책의 북토크를 하기 위해 내 책을 다시 읽는다.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와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진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역시 책을 쓰길 잘했다고.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와 다른 삶을 살고 있어서 다행이라는 마음도 들고.


출간 직후에는 대면 북토크를 하지 못했지만, 출간 1년 뒤 하게 되는 북토크는 그 나름대로 담아서 할 얘기가 많을 것 같다.


기대감이나 흥분을 한결 가라앉힌 채로 '그땐 그랬었지, 지금은 다른 일을 하고 있지만'이라고 생각하는 내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 말이다.


9월 24일 저녁에 개최될 저의 소수정예 북맥토크 신청은 게으른 정원 (@lazy_garden_) 계정으로 해주시면 됩니다.





4. 오, 헬렌


이 글은 <9명의 번역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다. 영화를 아직 보지 않은 사람들은 다음 장으로 넘기지 말 것.


영화 <9명의 번역가>를 보면서 가장 가슴에 사무치게 남았던 캐릭터는 헬렌이다.


그녀는 아이가 둘 있는 주부로, 철저한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 벙커로 들어가야 하는 번역 작업에 투입된다.


영화 중반부에 그녀가 사실은 번역가가 아닌 작가를 꿈꿨지만 결혼하고 자녀를 키우느라 포기했다고 고백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녀는 가족들로부터 떨어진 벙커에서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 들어 오랜만에 소설을 썼지만, 그 소설은 벙커의 관리자인 에릭에 의해 '형편 없는 문장'이라고 폄하되며 불에 타버린다.


결국 그녀는 자살한다. 그녀를 죽인 것이 무엇이었는지 나는 확신할 수 없었다.


자신에게 재능이 없다는 걸 인정한 채 사는 게 죽기보다 힘들어서였을까? 혹은 이 모든 게 끝나면 돌아가야 할 엄마 혹은 아내로서의 삶을 견딜 수 없어서였을까.





10줄 문학 (Instagram) : @10lines.on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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