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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ㅎㅎ May 20. 2023

러닝 : 달리는 여성을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동북아시아에서 달리기로 가장 유명한 사람을 꼽자면 무라카미 하루키일 것이다. 달리기를 시작하고 재미를 붙여나가며 관련 글을 찾기 시작했을 때, 이 글의 제목에 활용한 책이 바로 등장했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이미지 출처 : 예스24

    나는 하루키의 에세이를 좋아한다. 심지어 달리기 얘기라니. 곧장 읽어봤다. 당연히 재밌었다. 재밌는데, 내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았다. 단순히 내가 철인 3종을 시도하지 않아서, 풀코스 마라톤을 뛰어보지 않아서는 아닌듯했다. 달리기는 심플한 운동이고 그래선지 달리는 마음의 기원은 비슷하니까. 외국 사람이 쓴 책이라 이런 느낌인가 했다. 하지만 나는 이전에 한국 작가가 쓴 달리기 관련 에세이를 읽어보기도 했다. 두 권의 책을 읽고 내게 든 생각은 하나다. 나는 그냥 달리는 사람의 이야기가 읽고 싶은 게 아니었다. 달리는 여성의 이야기가 읽고 싶었고 지금도 역시 그러하다.


    2022년에 참여한 춘천마라톤이 나의 첫 메이저 마라톤 참가였다. 신문사/방송사가 주관하는 메이저 마라톤대회는 기념 티셔츠 및 배번과 함께 안내책자를 함께 보내주는데(놀랍게도 2023년의 동아마라톤은 그러지 않았지만) 처음 받아본 춘천마라톤 책자를 유심히 살펴보다 발견한 사실이 있다.

https://www.chuncheonmarathon.com/introduce/history.php


    1996년, 남성이 255명 달린 이 마라톤에서 여성은 7명이 달렸다. 십 년이 지난 2006년, 18,000여 명의 남성이 풀코스를 달릴 때 여성은 1,600명이 달린다. 또 십 년이 지난 2016년, 19,000여 명의 남성이 달릴 때 여성은 4,200여 명이 달렸다. 달리는 여성은 상대적으로 적다. 풀코스를 달리는 여성은 더욱 적다. 해가 갈수록 여성의 수가 증가하는 폭이 가파르긴 하지만 절대적인 숫자로만 비교했을 때는 굉장한 차이가 있다.

    모수가 적으니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사람의 숫자도 적을 것이다. 내가 만족할만한 이야기를 찾을 수 없던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겠다. 달리기라는 행위의 방법은 성별에 관계없이 같다. 그러나 여성은 왜 덜 뛰어왔고 남성은 이렇게나 많이 뛰고 있을까. 아마도, 여성의 달리기가 여러모로 더 어려워서는 아닐까? 단순히 신체적 차이의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세상이 여성의 체육활동을 제한해 왔다는 얘기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각도로 알려줘서 다시 쓰기 손가락 아플 정도다. 이 시리즈의 서두에서도 얘기했다. 여학생의 체육시간에는 피구가 있지 축구나 농구는 없었다. 나는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발야구를 처음 접했는데, 누군가를 공으로 때려야만 하는 피구가 아니라 서로 협력해 점수를 내는 경기를 처음 해봤을 때 느꼈던 재미를 아직까지 기억한다. 운동을 제대로 접하며 자란 여성이 드물고 힘차게 뛰거나 누군가를 뒤집고 펀치를 날리는 여성의 이미지는 최근에야 많이 생겨났다. 내 또래의, 롤모델 없이 성인이 된 여성들은 격렬히 움직이지 않는 운동을 찾아갔다.


    성장과정에서 생리가 시작되는 것도 여성이 활동적인 운동을 꺼리게 되었던 이유 중 하나가 될 수 있겠다. 생리 도중에는 운동을 하는 게 당연히 힘들게 느껴진다. 움직여도, 심지어 오래 앉아있을 때도 피가 새어 나올까 걱정하게 되는 마음은 여성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다. 나는 탐폰을 사용한 지 꽤 되었고 생리컵도 거의 일 년을 썼는데, 이런 선진 도구를 써도 격렬히 움직이면 피가 새어 나올까 우려가 된다(물론! 생리대보다 탐폰과 생리컵이 훨씬 편하고 활동과 운동면에서도 월등히 도움이 된다).

    그저 새어 나오는 피만 걱정이라면 참 좋겠다. 생리 주기에 따라 변화하는 컨디션에는 성가심을 넘어 빡치기까지 한다. 나는 러닝을 시작하고부터 생리 기간이라고 운동을 빼먹은 적은 거의 없었다. 어쩌면 피가 나오는 기간이 운동하기에는 더 나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내 몸은 피를 다양한 양으로 쏟아내는 나흘가량을 포함해 한 달 안에 랜덤으로 컨디션을 변화시켰다. 어떤 달은 배란일, 혹은 배란기라고 여겨지는 일주일 가량, 어떤 달은 생리 시작 일주일 전, 또 어떤 달은 생리 첫날. 몸을 일으키기 지나치게 어렵거나 묘하게 운동이 잘 되지 않고 쉽게 수행하던 강도가 지나치게 어려워진다면 당첨이었다. 전날 내가 무리를 해서 다음날 운동이 어려워지거나 감기에 걸려 컨디션이 떨어진다거나 하는 내가 단번에 인식할 수 있는 인과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시기에는 생각하게 된다.



    혼자 뛰는 여성들은 또 다른 불안을 감수해 왔을 것이다. 내가 처음 러닝을 시작한 건 불과 이 년 반 전이지만 이상하게 내가 달리는 곳에는 러너가 많지 않았다. 있다고 해도 중년 이상의 남성 러너만 가끔 볼 수 있었다. 러닝 유행의 초창기기도 했고 젊은 사람이 아주 많이 사는 동네가 아니어서일 수도 있겠다. 추워지기 시작한 계절의 영향도 물론 있겠다. 하지만 그런 점이 러닝 의지를 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러닝은 기본적으로 혼자 하는 운동이니까.

    한창 러닝에 재미를 붙이고 있던 가을과 겨울 사이 어느 주말, 내 속도로 같은 주로를 뛰고 있었다. 내가 뛰는 길에는 러너는 없지만 산책을 나온 사람들은 많았다. 뛰는 여성은 가끔 신기하게 여겨져 같은 길에 있는 노년 남성의 시선을 받게 되고야 말았는데, 그날도 오십 미터 정도 앞에서 누군가 나를 보고 있었다. 걸으면서 나를 봤다면 나 역시도 착각이라 생각하고 지나쳤겠다. 하지만 그는 내가 뛰어가고 있는 바로 그 방향에서 우뚝 선 채로 나를 보고 있었다. 오른손에 따봉을 만들어 든 채로.

    나는 곧장 그를 뛰어 지나칠 수 있었지만 머릿속으로는 생각이 많아졌다. 저 사람, 지금 나에게 저런 제스처를 취한 건가? 설마 나를 평가한 건가? 생판 모르는 사람일 나를?


    선해하자면 나를 응원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젊은 여성의 인생에는 저런 사람이 무수히 많았다. 내가 여자라는 이유로 나를 그저 아래로 두며, 당연히 아래에 있기에 평가해도 된다고 믿는 사람들, 필요 없는 설명을 계속해대는, 나를 자신과 같은 한 명의 인간으로 보지 않는 자들. 달리기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던 거다.

    젊은 여자가 이 산책로를 뛴다는, 본 적 없는 광경에 걷다 말고 멈춰 선 채로 따봉을 치켜드는 그 마음을 나는 도저히 이해해 줄 수가 없었다. 이후 몇 년이 지나고, 최근에 마주 달려오는 일면식도 없는 러너들에게 응원을 받아보고 또 깨달았다. 기분이 나쁠 만한 데는 이유가 있다. 마주 오는 러너들(그들도 남성이었고 연령대도 다양했다)이 가볍게 파이팅을 날려줄 때는 힘이 나고 기분이 좋았다. 평가가 아니라 응원이었으니까.


    그래도 ‘따봉 치켜들기’는 직접적으로 해를 입지는 않은 쪽에 속한다. 같은 해 겨울, 자전거 도로 옆의 인도를 뛰고 있을 때였다. 이어폰으로 노래를 들으며 달리는데 낯선 목소리가 귀를 치고 지나갔다. 그러고는 자전거를 탄 채로 저 멀리 사라졌다. 말을 건 것도 아니다. 그냥 ‘악!’ 소리를 지르는 거였다.

    혼자 달리는 여성의 귀(심지어 물리적으로 막혀있는 귀)에 고함을 뱉고 자전거로 달아나는 심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너무 당황스러워 내가 잘못 들었겠거니 했다. 하지만 이후 인터넷상에서, 심지어 완전히 다른 장소에서 같은 경험을 했다는 여성들의 말을 본 적이 있다. 소리를 지를 수 있다면 때릴 수도 있을 것이다. 때릴 수 있다면 죽일 수도 있을 것이다. 비약 같지만, 종종 조깅하던 여성이 아무 관계없는 사람에게 살해되었다는 기사가 뜬다. 나의 상상에 현실감이 얹어진다.

    그래도 이젠 나의 주로에도 뛰는 여성이 많아졌다. 그런 덕분인지 위협적인 일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매번 같은 시간과 요일에 뛰지는 않는다. SNS에 공유할 러닝 인증 사진을 신중히 선택한다. 당연히 나의 위치를 도저히 알 수 없을 하늘이나 나무 사진을 고른다. 자신의 거주지와 분명히 가까울 주로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러닝 어플리케이션발 지도 사진을 공유하는 남성들을 보면 이상하게 화도 나고 부럽기도 하다.



    뛰는 여성의 숫자가 절대적으로 적어서일까. 스포츠웨어 브랜드는 여성의 러닝웨어나 신발을 제대로 만들려고 하지 않는 것 같다. 나는 스포츠웨어를 구입할 때마다 주머니에 집착하고 마는데, 무심코 샀다가는 당황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바지에 겉옷인데 주머니가 없거나, 달렸더라도 쓸모없는 깊이거나, 깊이가 적당하더라도 지퍼나 단추가 없을 수 있다. 신발은 또 어떻고. 도대체 왜 여성용 신발에는 핑크나 코랄을 못 넣어 안달인지 모르겠다. 분홍색이 잘못되었다는 건 아니다. 예쁘고 멋진 색깔이다. 다만 이 색을 몸에 걸치고 싶지 않은 여성이 꽤 많을 거다. ‘여성용’이라는 단어와 분홍색을 세트로 가질 수밖에 없었던 여성이라면 더더욱.

    또 여성의 운동화가 더 둥글어야 하는 이유를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나도 파랗고 노란 거 좋아한다. 멋있고 날렵하게 생기면 더 좋다. 선택지도 제발 더 많이 줬으면 좋겠다. 절대적인 종류가 적은 건 도대체 뭐란 말인가.


    놀랍게도 선진적이라 여겨지는 캠페인을 전개하는 글로벌 스포츠웨어 브랜드도 예외는 아니다. 작년에 나는 모 브랜드의 이벤트에 당첨되어 신발을 받게 된 적이 있다. 이벤트 상품은 해당 회사에서 새롭게 출시하는 러닝화였다. 신어보고 싶은 모델이기도 해서 당첨되었을 때 무척 기뻤다. 그런데, 곧이어 이런 내용의 문자가 도착했다.

    여성 제품의 경우 제품 수급으로 인해 OO 제품과 같이 안정적 쿠셔닝을 제공하는 XX 제품으로 교체되어 제공 예정입니다. 이점 양해 부탁 드립니다.

    교체된 제품은 당연히 신제품이 아니었다. 분명 상품을 받았는데 기분이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의문만 계속 생겨났다. 제품 수급이 안된다면 왜 애당초 이런 경품을 걸었던 걸까? 사이즈별로 수급이 어려운 것도 아니고 ‘여성용’이 퉁쳐 교체된 거다. 여성 러너가 여전히 남성 러너에 비해 많지는 않을 테니 이 이벤트에 응모해 당첨되는 여성의 수가 엄청났던 것도 아니었을 테다. 나는 이후 인스타그램에 관련 해시태그를 서치 해봤다. 남성용은 이벤트 페이지에 애초부터 공개된 그 신제품을 멋진 색상으로 보내주었다. 나는 이후 이 브랜드를 좋게 볼 수 없게 되었다.


    더불어 최근에는 여성용 스포츠웨어에서 기준치가 초과된 환경호르몬이 검출되었다고 한다. 피부와 가장 가까운 의류에서였다.


이 옷 입고 매일 뛰었는데…암·심장병 일으키는 물질 범벅 ‘충격 (매일경제)

https://v.daum.net/v/20230518211500528?s=09

A growing number of sports bras, shirts and leggings brands found with high levels of toxic chemical, watchdog warns (CNN)

https://edition.cnn.com/2023/05/17/business/bpa-sports-bras-leggings/index.html


    이럴 때마다 묻고만 싶다. 아, 여성은 또 고객이 아니야? 1)




    그래도 여성들은 달린다. 이런 점이 달리기의 즐거움을 없앨 수는 없다. 달리는 여성은 점점 늘어난다. 달리는 친구들이 늘어났고, 내 주로에도 달리는 여성이 많아졌고, 대회에서도 더 많은 여성이 달리고 있다. 각자에게 맞는 옷과 신발을 찾아 입고, 신고, 풀코스를 달리고 산과 바다와 강과 공원과 도시를 누빈다. 혼자도 뛰고 여럿이서도 뛴다. 기분이 좋을 때도 뛰고 기분이 나쁠 때는 더 뛴다. 몸의 변화가, 세상이 나를 가로막게 두지 않는다. 책자를 꼼꼼히 읽고 참여한 춘천마라톤에서, 나는 오래 뛰어온 여성들을 보았다. 부부가 합쳐 몇십 번의 풀코스를 완주했다는 현수막이 있었다. 전국의,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이 기어이 춘천까지 달리러 왔다. 드러내 이야기되지 못했을 뿐 모두 계속 뛰고 있었다.

    그러므로 나는 바라게 되는 거다. 달리는 여성의 이야기가 많아졌으면 좋겠다. 경력에 관계없이 더 많이 말해줬으면 좋겠다. 달려온 여성의 삶은 같은 기간 달려온 남성의 삶과 분명히 달랐을 것이므로.




1) Mnet의 방송 프로그램 <고등래퍼 3>에서의 해당 내용을 차용했다. https://youtu.be/oIvyhZsqkaU?t=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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