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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ㅎㅎ Aug 29. 2024

수영 : 용기는 어느날 갑자기

20년만에 수영장에 간 사연

어느날 퇴사를 결심했다. 누군가의 퇴사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텐데 나에게도 물론 핑계는 많았다. 자질구레한 결심의 이유는 생략하고, 퇴사를 하는 직장인의 많은 수가 그렇듯이 나는 여행이 가고 싶었다. 이직처가 없이 퇴사를 해서 돈은 덜 쓰고 싶었고 워낙 바쁘게 일했어서 이리저리 돌아다녀야하는 도시도 사절이었다. 그렇다면 갈 수 있는 지역은 딱 하나로 좁혀진다. 동남아시아. 바다와 휴양지와 먹거리가 가득한데 숙박도 미식도 저렴한 그곳.

    여기저기를 검색했다. 태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그런데 검색하다보니 내가 완전히 이 도시를 즐길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바다도 바다인데, 이 나라들의 숙박시설에는 수영장이 딸려있는 경우가 많았다. 꽤 중요한 옵션으로. 나는 수영을 할 줄 몰랐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물을 무서워한다(현재형인 이유는 수영 관련 얘기를 써나가며 해보고자 한다). 정말로 이십 년간 수영장은커녕 물에 들어가본 적이 없었다. 바다는 구경하는 거지 들어가는 게 아니었다. 어라 나는 해안도시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고 바다를 좋아하긴 하는데.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는 수영 시간이 있었다. 어쩌면 해안이 있는 도시라 있던 수업일지도(요즘에 서울에서 이런 수업이 생기고 있다는 기사를 봤다. 그럼 과거엔 없었단 건가...? 난 전국의 학교가 다 배우는 줄 알았다). 오래된 수영장은 수심이 점차 깊어진다는 것을 아는지. 그때 내 키는 150센티미터가 되지 않았는데, 수영장의 가장 깊은 곳은 물의 높이가 내 키를 넘어섰다. 사실 가장 얕은 곳에서 까치발을 딛어도 눈 정도만이 빼꼼 튀어나왔다.

    나는 물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가 선천적으로 결정된다고 믿는다. 원래도 무서워하는데 발도 닿지 않는 곳에서 발차기만 한 시간을 해야했다. 너무 싫고 재미가 없었다. 나는 피부 질환을 핑계로 수영수업에 참석하지 않을 수 있다는 허락을 얻어냈고 이후로는 수영장 가까이 가지도 않았다. 바다는 딱 한 번 들어갔고 계곡은 가본 적이 없다. 싫은 건 절대 하지 않는 나는 적극적으로 모든 수상활동을 피해왔다. 그래도 별 지장이 없었다.


그런데, 퇴사를 앞둔 이 때, 지장 비슷한게 생겼다. 몇 날 며칠 동남아만 검색하다 문득 내가 인생의 어떤 즐거움을 너무 모르고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이 아는 '재미'를 나는 잃고 있다는 감각이 드니 갑자기 용기도 생겼다. 그렇다. 나는 모두 하는 걸 안 하고 살기를 견딜 수 없어하는 사람이다.

    마침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새 수영장이 생겼다. 지상에 있어 빛이 찬란하게 들어오고 호텔 수영장 뺨친다며 여기저기 소개되기도 했다. 수영장은 텃세가 많다던데, 새로 생긴 곳이니 텃세도 없을 것 같았다. 물을 무서워하는 나니까 다른 조건을 잘 갖춰줘야 했다.


그래서 퇴사 직전, 나는 비행기표를 끊는 대신 새벽에 일어나 수영 수업을 신청했다. 다행히 십일월이라 수강 신청은 순조롭게 진행됐다(아마 정말로, 고인물이 없는 것과 애매한 시간대인 것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수영을 배울 생각을 하게 되다니. 나 자신이 황당하기도 했지만 어쩌면, 여유가 생기니 용기가 난 것일 수도 있겠단 생각도 들었다.

    구립 체육센터는 수업 개시일 열흘 전쯤 신규 회원 수강 신청을 받는다. 나는 열흘동안 떨며 수영 준비물을 사고(마침 오프시즌이라 수영복+수영모+수경을 모두 합해 삼만원이 안되는 가격에 살 수 있었다) '물이 무서운 사람도 수영을 할 수 있나요'따위를 검색하며 지냈다. 그리고 십일월, 퇴사를 하고 보름 뒤, 나는 비행기 대신에 따릉이에 올랐다. 딱 한 달만 해보자, 결심하며 수영장으로 향하는 페달을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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