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마니아에서 도착한 오랜 인연
'숭고한 삶이란 무엇일까'
며칠 전 루마니아에서 낯익은 분으로부터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선교사로 활동하면서 나와는 2004년 아주 우연한 기회에 인연을 맺게 된 분이었다. 우연한 인연이란 바로 영화 '김일성의 아이들'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제오르제타 미르초유 여사였다. 그는 오랜만에 미르초유 여사에 관한 소식도 들려주었다.
"여사님께서 연로하셔서 현재 반신불수의 상태로 요양병원에 입원해 계십니다...... 루마니아-한국어 사전은 잘 팔리지 않아서 창고에 보관 중이라고 합니다. 자비로 출판을 하셨는데, 중간에 나쁜 사람한테 사기도 당하시고 참 일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문득 그녀를 처음 만났던 2004년과 마지막으로 만났던 2019년이 떠올랐다. 2004년 여름으로부터 무려 18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녀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강렬한 인상이 한 가지 있다. 그건 바로 그녀가 한국어 단어들을 하얀 종이 위에 필사하던 모습이었다. 방 안 가득 쌓여 있던 종이 묶음들 속에 가득히 적혀 있던 한글들. 그녀에게 이유를 물었다.
"남편 조정호 씨와 평양에서 마지막으로 작별한 뒤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어느 날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남편과 다시 만나면 무슨 말로 대화를 나눌 수 있을지 걱정이 됐습니다. 남편은 루마니아 말을 모르고, 나도 한국어가 자꾸 잊혀지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시작한 것이 남편 나라의 언어를 공부하는 것이었다. 한 자 한 자 쓸 때마다 남편의 얼굴을 떠올렸다고 한다. 어쩌면 그건 남편이 살아 있다는 믿음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한 그녀만의 처절한 몸부림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그리고 그렇게 16,000여 자의 한글이 종이 위에 옮겨졌다.
사랑과 믿음이라는 인간의 숭고한 정신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두 권의 사전이 만들어졌다. 2019년 그녀를 만났을 때 자랑스럽게 두 권의 사전을 들고 카메라 앞에 섰던 그녀의 모습을 나는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사전이란 바로 그걸 뜻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루마니아 현지에서 온 메시지를 읽으며 마음이 무거웠던 것은 그런 이유였다.
1934년 세상에 태어나 19살 때 북한 전쟁고아들과 함께 루마니아에 왔던 북한 교사 조정호를 만나 국경을 초월한 사랑을 했고, 감시와 처벌을 감수하면서 결혼까지 했던 용감한 여성. 남편을 따라 북한으로 이주했고, 결국 강제 이별을 당하면서 눈물로 북한을 떠났던 사람. 그가 바로 제오르제타 미르초유였다.
그녀의 삶은 나에게 한국전쟁이 단지 남과 북 사이에서만 비극을 만들어놓은 것이 아니란 사실을 깨닫게 했고, 분단과 이산의 아픔이 38선을 넘어 먼 유럽 땅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헐벗고 굶주린 북한 전쟁고아들을 위해서 헌신했고, 인간의 도리와 진정한 휴머니즘이 무엇인지 깨닫게 했다.
나는 그녀를 통해서 겉으로는 인간의 얼굴을 한다고 떠드는 공산주의가 얼마나 기만적이고 비인간적인 체제인지를 몸으로 느끼게 해 주었다. 그래서 그녀는 남편에 대한 사랑과 기다림이 북한 체제의 모순을 세상에 알리는 용감한 행동일 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북한 당국이 끝까지 그녀에게 입국 비자를 발급하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였다. 그녀는 그녀만의 방식으로 공산주의에 저항했고, 자유를 위해 투쟁했다.
그런 그녀가 지금 의식을 잃고 쓰러지고 있다. 루마니아로 돌아온 뒤에도 늘 교회에 가서 남편을 위해 기도했고, 남편을 위해 불을 밝히는 촛불은 언제나 '죽은자'가 아니라 '산 자'를 위한 제단에 놓였다. 1962년 평양에서 마지막 작별을 했으니까, 무려 60년 인생을 그렇게 살았다. 이제 그녀를 지탱해주었던 생명의 촛불이 꺼져가고 있다는 소식에 마음이 많이 아팠다.
인간의 생명은 유한하므로 언젠가 모두 세상을 등지게 되겠지만, 그녀가 세상에 남긴 숭고한 사랑의 이야기는 부디 사람들 속에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 역시 그런 마음으로 글을 썼고, 영화를 만든 게 아닐까 싶다. 그녀가 하루빨리 건강을 회복하시길 기원한다.
그녀를 위해 여러분들도 함께 기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댓글로 메시지 남겨주시면 루마니아 현지에 있는 분을 통해 미르초유 여사에게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