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건국전쟁' 개봉 다이어리 12편
오늘 아침 신문기사 하나를 읽다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한 메이저 언론사 기자가 쓴 기사 때문이었다. 제목은 무척 도발적이다. '1948년 7월 김구의 예측, 북한군 남침, 남한은 망할 것'(조선일보, 유석재의 돌발史전). 기사의 핵심은 김구가 6.25 한국전쟁을 예측하고 있었으며, 전쟁이 나면 압도적인 군사력을 지닌 북한이 남한을 정복하게 될 것이라는 게 요지다.
영화 <건국전쟁>에서도 이와 동일한 시선을 김구를 바라는 부분이 나온다. 전문가들의 철저한 고증과 객관적 증거를 통해 입증한 주장이었다. 그런 점에서 신문기사와 영화의 핵심적 주장은 일치한다. 이제 우리가 대한민국 역사에 던질 질문은 다음과 같다.
과연 김구는 왜 한국전쟁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도 국민들에겐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했을까? 1948년 북한을 다녀온 김구에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일까?
이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선 오랜 세월 동안 대한민국을 지배했던 김구에 대한 정치적 주장들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2020년 7월 23일, 당시 통일부장관 후보에 올랐던 이인영은 청문회장에서 '우리의 국부는 이승만이 아니라 김구가 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국부라는 주장에는 솔직히 동의하기 어렵다. 우리의 국부는 김구가 됐어야 했다는 역사 인식을 갖고 있다... 이승만은 독재적 성격을 가지고 있고, 독립운동에 대해서 평가도 엇갈린다. 이승만이 괴뢰정권이라 단정하는 것에는 아직도 여러 가지 의견들이 존재한다."
아마도 이인영은 속으론 '이승만 괴뢰 도당'이라 외치고 싶었을 것이다. 이를 입증하는 기록도 존재한다. 그는 1987년 9월 <동지여 전진! 동지여 투쟁!>이라는 제목의 문건에서 이승만 정권을 ‘괴뢰정권’에 비유했다. 미국의 대리통치자, 즉 꼭두각시라고 주장했다. 이인영 후보자는 이승만과 대한민국 건국 과정에 대해서 원색적인 비난을 했던 대표적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1987년 전대협 의장 시절 다음과 같이 말했다.
"38선 이남을 점령군으로 진주해 온 양키 침략자는 한국 민중에 대한 도발적인 무력과 허구적 반공논리로 조국을 분단시켰다. 이승만 괴뢰 정권을 내세워 민족해방투쟁의 깃발을 갈가리 찢고 사대매국세력을 육성했다."
굵은 글씨로 표시된 부분만 놓고 보면, 이게 남한의 학생운동권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작성된 문건인지, 아니면 북한에서 나온 문건인지 구별이 안 갈 정도다. 이승만에 대한 주사파와 북한의 비판은 늘 동일했다. 이인영을 비롯한 전대협 주동 세력을 친북 세력이라 부르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김구를 국부로 모시고 이승만을 격하시켜라!' 이건 이미 오래전부터 진행된 북한의 대남 선전전략과도 일치한다. 저들에게 이승만은 '괴뢰', 즉 꼭두각시 정부일 뿐이며, 그들이 늘 강조하는 것처럼 '우리 민족' 끼리의 평화와 통일을 가로막은 반통일세력이다. 그 과정에서 김구 띄우기가 진행됐다. 과연 김구는 저들의 말처럼 정말 우리 민족의 진정한 지도자이며, 대한민국 건국을 위해 노력했던 국부가 맞을까?
대한민국 건국 과정을 면밀히 추적하다 보면, 뭔가 김구의 행적에서 몇 가지 석연치 않은 부분이 존재한다. 해방 이전의 김구와 해방 이후의 김구가 다르다는 점이다. 주목할 부분은 공산주의에 대한 김구의 생각이었다. 상해 독립운동 시절부터 김구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에게 공산주의는 매력적인 사상이었다. 독립을 위해 공산주의자들과 손을 잡을 수 있다는 주장들은 이미 상해 시절부터 존재했던 논란거리 중 하나였다.
'김구의 북한행, 남한 단독정부 반대, 5.10 총선거 반대'
남한에서는 5.10 총선거 준비가 한창이던 1948년 4월 19일, 돌연 김구는 북한행을 선택한다. 그의 북한행은 큰 논란거리였다. 심지어 그의 북한행을 반대하며 김구의 아지트 경교장에는 김구의 열혈 팬들까지 모여들어 결사반대를 외쳤다. 오죽했으면 그는 지지자들의 눈에 피해서 뒷문으로 몰래 빠져나가야 했을까.
김구의 북한행은 5.10 총선거를 반대하는 그의 정치적 입장과 논리적 연장선 위에 위치한다. 결과적으로 그의 북한행은 유엔이 결정한 합법적인 선거를 무력화시키고자 하는 북한 김일성 세력에 동조한 결과를 가져왔다. 남과 북이 치열한 이념 논쟁, 정통성 논쟁의 불을 지피고 있던 시기, 김구가 선택한 곳은 남한이 아니라 북한이었다. 우리 민족끼리 통일을 할 수 있다면, 공산주의자들과도 손을 잡을 수 있다고 믿었다. 김구 암살의 배경에는 반공주의자 안두희의 실망과 반감도 존재했다고 본다.
오래전부터 김구 저격수로 활동해 온 현대사연구가 정안기 박사의 연구에 의하면, 당시 김구와 김규식은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하여 '조선 정치 정세에 관한 결정서'에 동의하는 사인을 했다. 그 내용은 북한을 중심으로 한 남한의 민주화, 쉽게 말하면 북한식 소비에트로 남한을 공산화시키자는 것에 김구가 동의를 했다는 것이다. 충격적이고 놀라운 일이다.
유사한 주장은 유석재 기자의 기사에서도 등장한다. 김구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이다. 기사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면 이렇다.
'김구가 남북협상을 마치고 돌아온 지 두 달 뒤인 1948년 7월 11일 오전 11시, 유어만은 김구의 거처인 경교장을 예고 없이 방문했습니다. 장제스(蔣介石) 총통의 밀명을 받았던 유어만은 이 자리에서 김구를 설득하는 작업에 나섰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민감한 극비 사항이었습니다. 밀명이란 무엇이었을까요. 당시는 중국 대륙에서 국민당 정부와 공산당의 전쟁이 치열했던 국공 내전의 시기였습니다. 장제스는 김구가 이승만과 협력해 정부에 참여해서 확고한 반공(反共) 체제를 수립해 북한을 견제해 주기를 바랐고, 유어만을 통해 김구에게 ‘정부에 들어가 부통령이 되는 것이 좋겠다’는 뜻을 전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승만과 협력해서 동아시아에서 반공 블록을 만들자는 장개석의 제안에 김구는 명확한 반대 입장을 보였다. 그 구체적인 내용이 '김구-유어만 비망록'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비망록의 기사를 대화 형식으로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김구: 내가 정부에 들어가면 반드시 한민당과의 갈등이 일어날 것이므로 차라리 바깥에 있는 것이 낫다.
유어만: 그럴수록 당신이 정부에 들어가 한민당을 견제하는 임정 출신 신익희, 이범석, 지청천 등을 지원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김구: 반미주의자로 비방 당한 내가 정부에 들어가면 국가 건설에 필요한 미국의 원조마저 막힐 수 있다.
유어만: (김구를 설득하며) 이승만 박사도 한때 그런 비난을 받았지만 지금은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지 않느냐.
김구: 내가 남북한 지도자 회의에 참석한 동기 중 하나는 북한에서 실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알아보려는 것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이 앞으로 북한군의 확장을 3년간 중지한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그 사이 남한에서 어떤 노력을 한다고 해도 공산군의 수준에 대응할 만한 군대를 건설하기란 불가능하다. 소련인들은 비난을 받지 않고 쉽게 북한군을 남한으로 투입시켜 단시간에 여기서 정부를 수립하고 인민공화국을 선포할 것이다... 통일된다고 해도 북한에 의해서 통일될 텐데 내가 왜 사멸할 이승만 정부에 협력해야 하는가.
북한의 압도적 군사력과 남한의 허술하고 빈약한 군사 시스템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었던 김구는 전쟁이 나면 북한은 승리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실제로 1949년 6월 미군은 500여 명의 군사고문단만을 남기고 전 병력을 철수했다. 미군철수가 '남침의 초대장'이라고 불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1950년 6.25 한국전쟁 개전 초기 인민군의 공세에 우리 국군의 마지막 주력부대가 낙동강까지 밀린 것도 이를 입증한다.
영화 '건국전쟁'에서 중요한 역사적 고증 작업을 맡았던 전 연세대 사회학과 류석춘 교수는 이런 김구의 태도를 '이중적이며 위선적'이라고 비판한다. 그는 덧붙여서 김구는 전쟁이 날 것을 확실히 알았지만, 남한으로 내려오면서 밝힌 대국민 성명서에서 전쟁이 없을 것이라고 국민들을 안심시켰다고 날 선 비판을 한다.
'1948년 4월 30일, 김구는 '남북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 공동성명서'를 김일성과 함께 발표한다. '남북정당사회단체 지도자들은 우리 강토에서 외국 군대가 철퇴한 후 내전이 발생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한다... 미,소 양군이 한반도에서 철군한다 해도 북한은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다'
도대체 해방 이후 김구의 이런 이런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행태는 왜 일어난 것일까? 그것은 김구의 정치적 야망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 김구는 이승만과의 대결에서 결코 자신이 승리할 수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이승만보다 더 높은 위치에 오를 수 있도록 협조하겠다는 김일성의 거짓에 속아 넘어간 것이 아닐까. 1948년 초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과 김구가 얻은 득표율 역시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이승만 91.8%, 김구 6.7%의 득표율이 바로 그것이다.
과연 실상이 이런데도 이인영의 말처럼 김구는 대한민국의 국부로 존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대한민국 건국을 부정하고, 한국전쟁을 예견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외쳤던 김구. 한국전쟁이 터졌을 때, 전선의 사기를 독려하기 위해 279회나 전시연설을 했던 이승만. 과연 누가 진정한 우리의 지도자가 되어야 하는가? 누가 국부가 되어야 하는가? 거짓의 이데올로기를 벗고 이제 객관적 사실로 눈을 돌려야 할 때가 아닐까. 영화 '건국전쟁'은 진실로 나아가는 올바른 길잡이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영화 '건국전쟁' 공식 전국 극장 개봉일이 2월 1일로 결정되었습니다. CGV, 롯데시네마, 메가박스에서 동시에 개봉합니다. 구체적인 상영 극장과 시간은 해당 사이트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극장 개봉을 위해서 여러분들의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후원: 국민은행 878301-01-253931 김덕영(다큐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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