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obanii May 16. 2016

나의 산티아고記-1

어떤 날은 더, 어떤 날은 덜.

지난 가을, 산티아고로 향하는 775km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이래, 내가 이 경험을 기록으로 남길 것을 의심해 본 적은 없다. 무엇을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만이 문제였을 뿐이다.  


사실은 이 글의 시작은 추위를 뚫고 나서던 서늘한 새벽길이나, 이글대는 태양 아래서 나도 녹아 없어져 버렸으면 하고 바랐던 넓고 막막했던 평원의 기억으로 하고 싶었다. 하지만 사람이 만든 길을 사람들과 걸으면서 역시 사람의 언어 속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사람과 시간이 만든 그 길에서 보낸 시간을 기록하기 위해 다시 사람들의 언어로 시작해 본다.


"내 동생의 다리가 나을 수 있다면 산티아고 길을 걷겠다고 생각했어."


파리에서 바욘까지 가는 기차에서 만난 발레리아는 브라질 출신으로 세계여행 중이었다. 어느 날 문득 성당에서 다리가 아픈 동생을 위해 기도를 하다가 산티아고 길을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는 그녀에게 나는 그렇다면 동생의 다리가 나은 것이냐고 성급한 질문을 했다. 미소를 띤 그녀의 대답은 "in advance". 


스페인어, 프랑스어, 영어, 포르투갈어(당연히!)를 구사하는 발레리아는 바욘에서 우체국을 찾아 각자의 짐을 지인에게 부치고, 산티아고 프랑스 길의 출발지인 프랑스의 작은 마을 생장 피드 포르까지, 그리고 생장에서 카미노 순례자 협회를 찾아 여행자 여권에 해당하는 크레덴시알을 발부받고, 숙소를 잡는 일까지 일사천리로 해치웠다. 프랑스어를 구사하는 발레리아 덕분에 나는 헤매는 일도 없이 무사히 모든 과정을 마치고, 아늑한 숙소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고 저녁식사도 맛나게 먹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점 나는 모든 것을 알아서 처리해주는 그녀와의 동행이 오래 지속될 수 없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나는 새로운 환경과 사람들 속에서 시행착오를 겪으며 내 몸으로 경험을 쌓아가는 것을 엄청나게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내가 어설픈 스페인어를 입 밖으로 내뱉을 필요조차 없이 능수능란하게 모든 것을 해결하는 그녀는 아쉽지만 필요하지 않은 사람일 수밖에.


한편으로는 재미있게도 모든 것이 능숙해 보인 그녀의 어리숙함이 점차 드러나기 시작했는데 무엇보다도 심각한 것은 그녀의 가방과 짐이었다. 4-5킬로그램은 족히 되어 보이는 침낭에 노트북까지 들어 있는 배낭 게다가 판초도 아닌 상하의로 나뉜 비옷까지. 그녀의 발걸음이 결코 가벼울 것 같지 않았다.


예상대로 출발하는 날 아침이 되었을 때, 발레리아는 우선 자신이 걷기를 위한 신체 단련이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 가방이 과도하게 무겁다는 사실, 비옷 바지는 불필요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리고는 그 어디에선가 나는 혹시 모를 이별에 대비해 그녀에게 주지 못했던 첫날밤의 숙박료를 건넸다.


카미노에서의 첫날 넘게 되는 피레네 산맥은 아직 몸과 마음이 준비되지 않는 순례자들의 기를 꺾어놓기에 충분했다. 그만큼 길고, 그만큼 힘들었는데 우리는 거기에 보태 폭우를 경험함으로써 두고두고 자랑할 수 있는 험난한 무용담까지 갖게 되었다. 앞으로의 여정이 설마 이것보다 더 어렵겠느냐는 것이 산을 넘어온 순례자들이 제시할 수 있는 가장 긍정적인 의견이었다. 그리고 "이것보다 더 나쁠 수도 있었어."라는 말을 덧붙이며.


기숙사 수용소 같은 론세스바예스의 수도원이 운영하는 알베르게에는 젖은 옷을 빨고, 신발을 말리려는 사람들로 분주했다. 그 틈에 끼어 힘겹게 세탁과 목욕을 마친 후 나는 그때야 도착한 발레리아를 만날 수 있었다. 이번에야 말로 마지막이 될지도 몰라. 나는 인도에서부터 가져온 티베트 책갈피를 그녀에게 건넸다. 달라이 라마의 가르침이 적힌 책갈피를 받아 들고 그녀는 나를 안아주며 "넌 정말 친절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야."라고 말해주었다.


그녀 역시 사랑스러웠고, 무척 친절했으며, 넓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산티아고로 가는 길에서 많은 사람을 만났고 누군가에게는 그 길을 걷는 목적을 묻기도 하고 누군가와는 그저 평범한 인사로 헤어지기도 했지만 기도를 하다가 순례를 결심했다는 이는 발레리아가 유일했다. 나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의 진정성을 의심하지는 않으나 기도의 순간이 신과 마주 서서 나누는 대화라면 그녀의 그 결심은 무언가 남다른 구석이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생장에서 론세스바예스까지의 길은 생각대로 전체 카미노 중 가장 어려운 시간의 하나였다. 그것은 아마 우리의 몸과 마음이 아직 카미노를 받아들이기 전이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발레리아는 그 후 나의 순례가 끝날 때까지 다시 만나지 못했다. 헤어지고 열흘쯤 지났을 때 받은 메일에는 다리, 무릎 모두 아프지만 아직까지 포기하지 않고 걷고 있다며 이렇게 적었다. "Some days I walk more, some days I walk less." 어느 날은 더 많이 걷고, 어느 날은 덜 걷고 있지만 발레리아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가 함께 생장 피드포르를 떠난 지 50일이 더 지나서 산티아고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받았다. 내가 같은 곳에 도착한지 보름 정도가 지난 후였다.


우리는 함께 산티아고에 도착하지는 못했지만, 발레리아는 더 걷거나, 덜 걸으면서 결국 자신의 카미노를 완성했고 그런 그녀가 많이 자랑스럽고 그리웠다. 발레리아는 그 여행이 끝나기 전에 내가 살고 있는 인도를 꼭 오겠다고 약속했다. 그때는 큰 배낭도, 침낭도 그녀를 힘들게 하진 않기를, 그리고 카미노에서처럼 자신의 속도에 맞춰 자신만의 여행을 만들어 가기를.


짧은 후기. 산티아고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받은 이후 서너 달이 지나서 발레리아가 정말 인도에 왔다고 연락이 왔다. 하지만 첫 인도 여행에 긴장한 탓에 내가 살고 있는 곳까지 와보지 못하고 몇 군데 여행을 다니더니, 문득 브라질이 그리워졌다며 집으로 돌아갔다. 대신 언젠가 브라질에서 만나기로 했다. 언젠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