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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banii May 19. 2016

나의 산티아고記-2

올라

올라


띄엄띄엄 이나마 카미노를 걷기 전 스페인어 단어를 외워두었지만, 문장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몇 개 되지 않았다. 그래도 중요한 말은 기억하고 있었다. 올라(안녕), 꼬메르(먹다), 베베르(마시다). 영어를 전혀 못하는 빈첸토 아저씨와는 이 세 단어를 사이에 두고 친구가 되었다.  


산티아고를 향해 프랑스 생장에서 출발한 뒤 도착한 두 번째 마을 수비리. 전날의 폭우는 그치고 날은 맑았다. 샤워를 마치고 젖은 신발과 빨래를 널고 숙소 계단에 앉아 햇빛을 쬐고 있을 때 중년의 스페인 아저씨가 말을 건넸다. "올라" "올라" 대화라고 할 수도 없는 몇 마디 말이 오고 갔다. 상형문자라도 해독하듯 많은 말들 속에서 몇 개의 단어들이 떠올랐는데, 만약 이 대화를 만화 속의 말풍선처럼 가상으로 재구성하면 이런 식일 것이다.


"안녕"

"안녕"

"넌 어디서 왔니?"

"한국에서 왔어. 너는?"

"나는 스페인 사람이야."

이 대목에서 나는 먹고 있던 젤리를 건넸다.

"고마워. 이름이 뭐니?"

"내 이름은 영이야. 너는?"

"내 이름은 빈첸토. 밥은 먹었니?"

"아니 아직 안 먹었는데."

"그럼 이따가 같이 밥 먹자."

"좋아."

"좋아, 내가 데리러 올게."


이렇게 말했다고 생각하고 싶지만, 실제로 우리 입에서 나온 단어는 열 개도 채 안된다. 어쨌든 그런 의미가 교환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대화에서 언어의 역할은 매우 작았고, 우리의 소통은 나름 완벽했다.


갑자기 27km 남짓을 걸어 피레네 산맥을 넘어온 피로가 극심했다. 이틀째를 맞은 몸은 여기저기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실은 비명은 물론 내 입에서 나왔다. 걸을 때마다 아팠기 때문에.) 해야 할 일을 모두 마치고 나니 잠이 쏟아졌다. 밥을 먹자던 빈첸토는 보이지 않았고, 그런 약속이야 시골 어르신들이 "다음 장에 보세"하고 헤어지는 것과 비슷한 거라는 생각으로 거의 잊고 있었다. 이층 침대의 일층인 내 자리는 높이가 낮아 앉아 있기가 불편해서 누워있을 수밖에 없었고 그러니까 당연히 내가 해야 할 일은 수면이 아니겠는가. 제대로 소통이 되었는지도 의심스럽던 스페인 아저씨는 깨끗이 잊고 단잠에 빠져있을 때 누군가 나를 깨웠다. 빈첸토, 그리고 한 무리의 스페인 사람들.


오후 4시가 다 되어서야 밥을 먹으러 가자며 자신도 처음 만난 다른 스페인 친구들까지 대동하고 나를 데리러 온 것이었다. 식당에 자리를 잡고, 대화가 시작되자 나는 그들이, 아니 그들도 거의 영어를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결혼 기념일을 맞아 휴가로 카미노를 걷기로 한 스페인 커플, 그리고 40 전후의 두 명의 남자. 모두들 처음 만난 사이였다. 카미노를 한 달 이상 걷는 외국인 순례자들과 달리 스페인인들은 휴가 때마다 1-2주씩 걸어서 마치는 경우가 많았다. 빈첸토 아저씨와 나머지 친구들도 대체로 2주 정도의 예정으로 카미노를 온 것이었다. 듣던 대로 흥겹고 소란스럽게 식사를 마친 그들은 내 몫까지 당연스레 계산을 했고 그날 이후 보름 정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빈첸토 아저씨와 그의 친구들, 그리고 또 다른 친구들을 만났다.


영어를 못하는 빈첸토 아저씨는 언제나 먹을 것, 마실 것을 권하고 아낌없이 베풀어 주었다. 그럴 때마다 일단은 사양하는 내게 그는 스페인어로 말하곤 했다. "꼬메(먹어)" "베베(마셔)" 아, 먹으라는 말인가. 마시라는 말인가 보다. 그렇게 알아듣고 그의 짧은 스페인어에 왠지 마음이 순순해져서 권하는 대로 받아먹고 마시곤 했다.


틈만 나면 먹고 마시면서 정작 배낭은 손바닥만 하고, 몸에 쫙 붙는 스판 바지를 입고 여자만 보면 미소가 떠나지 않는(나한테만 친절한 것은 아니었으니, 그는 스페인 남자~) 빈첸토 아저씨. 12킬로가 넘는 배낭을 메고 헐떡이는 나를 매번 놀리기에 그러는 아저씨 배낭에 대체 뭐가 들었느냐, 필요한 물건은 어떻게 하느냐고 손짓 발짓을 동원해 물었을 때 그가 씩 웃으며 품에서 꺼낸 것은, 마스터 카드.


빈첸토 아저씨와는 카미노에서의 많은 인연이 그렇듯이 길 위에서 또 만나겠거니 생각하다가 결국 못 만나고 헤어지고 말았다. 그런 일이 있을까 싶어 사진을 찍어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지만 연락처도 없으니 영영 만나긴 어렵게 됐다. 인도로 놀러 와서 나를 찾겠다고 큰 소리는 치셨는데... 아저씨 덕분에 내게 스페인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떠들기 좋아하는, 그러니까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알려진 그대로인 것으로 각인되었다. 스페인 사람 한번 제대로 만난 셈이다. 하나 더, 그들의 처음 만난 사람에게도 아낌없이 베풀어주는 친절함도 기억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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