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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banii May 22. 2016

나의 산티아고記-3

세 개의 시기, 혹은 고통

내가 5년 넘게 살고 있는 인도 다람살라는 해발 1780미터의 산자락에 위치해 있다. 평지는 거의 찾아볼 수 없고 가장 잘 알려진 맥그로드 간지 역시 산비탈에 뻗어있는 좁은 길을 따라 집들과 상점들이 늘어선 곳이다. 이곳에서 운동을 할 수 있는 방법은 마을에 몇 군데 있는 요가 클래스에 등록하거나, 위아래 마을을 잇는 길을 따라 산책을 하는 정도뿐이다. 요즘 들어 운동복 차림으로 내리막길을 뛰어다니는 서양인을 몇 번 보기는 했는데, 그럴 때면 '저러다 무릎 나가지.'라는 생각을 한다.


까미노 데 산티아고, 산티아고까지의 800km 가까운 길을 걷기로 정한 후 내가 할 수 있는 준비는 여행 비용 마련과 인터넷을 통한 정보 수집 정도였을 뿐, 남들이 한다는 몸 만들기는 불가능한 여건이었다. 매일 걸어 오르내리는 출근길의 운동효과를 조금이나마 높여 보려 가방 안에 읽지도 않을 책을 잔뜩 넣어 다니거나, 집에서 틈틈이 요가와 스트레칭을 하는 정도가 최선이었다.


그러면서도 아마 내심 하루 25km 내외를 걷는다는 산티아고 길을 걷는 것에 대해 자신감이 있었던 모양이다. 빈대 걱정도 하고, 챙겨갈 물건에 빠진 것은 없는지 챙기면서도 그 길을 걸을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의심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음 걷기 시작한 후 1-2주가량 나를 사로잡은 육체적 고통에 대해 생각보다 더 많이 놀랐고, 거기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첫날 27km를 걸은 이후 매일매일 25km 내외를 '걸어야 하는' 시간들은 고통스러웠다. 통증은 발가락, 발목, 무릎, 허벅지, 종아리를 가리지 않고 옮겨 다녔고, 어깨와 허리는 익숙하지 않은 무거운 배낭에 짓눌려 피부색이 변할 정도로 힘들어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 통증들은 '걷지 않는' 시간에도, 잠을 잘 때도 떠나지 않았다. 다행히 며칠 만에 가라앉았지만 발가락에 생긴 물집도 괴로움을 더해주었다. 그러나 가장 힘들었던 것은 내가 이 고통 때문에 이 길을 포기할 지도 모르겠다는, 이 고통에 굴복할지도 모르겠다는 예감이었다.


남들보다 뛰어난 지구력도 정신력도 없는 나지만 그래도 해야 할 무언가로부터 도망친 일은 별로 없었다고 생각했는데, 진심으로 그때의 나는 도망치고 싶었다. 그래서 1주에서 2주로 넘어가는 며칠 동안은 밤마다 자리에 누워 '그래 이 정도 했으면 됐어. 꼭 다 걸어야 된다는 강박관념을 버리자. 남은 시간은 마드리드랑 바르셀로나도 보고 관광도 하는 거야. 좋아. 응?' 이런 망상에 빠져 흐뭇하게 기절하듯 잠에 빠지기도 했다.


아쉽게도 다음 날 새벽이 되면 그런 생각은 까맣게 잊고 부지런히 짐을 싸서는 다른 순례자들과 뒤섞여 길을 나서고 말았지만. 아침에 일어나 씻고 짐을 싸는 그 과정이 관성이 되는 데는 1주일이면 충분했다. 체력은 기대에 못 미쳤지만 다행히 나는 어디 가서든 적응을 잘 하는 인간이었다.


그러면서도 틈틈이 다른 순례자들에게 "힘들지 않아? 아픈 데는 없어?"라고 물었던 것은 그들을 걱정해서가 아니라 나만 이렇게 힘든 것인지, 그들도 나만큼 고통스러운지 궁금했기 때문임을 고백한다.


지리산 종주도 하고, 히말라야 트레킹도 했던 나니까 산티아고 길 정도야 거뜬히 걸을 수 있을 거라고 내심 생각했던 거다. 그런데 이렇게 힘들다니 이젠 늙은 것일까, 미리 몸을 만들어오지 못했기 때문일까. 다행히 내가 물었던 순례자들 역시 정말 힘들다고 이렇게 아프다고 경쟁하듯 대답해 주곤 했다. 그들이 고통을 고백할 때마다 내 마음은 평화를 얻었다. 감사.


그러나 익숙지 않은 고통을 견디고 받아들이는 과정은 단지 몸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었다. 또 다른 고통, 보다 근본적이고 깊은, 심지어 까미노를 마친 후에도 떠나지 않을 고통이 거기에 있었다. 육체의 고통이 줄어들고 몸이 적응을 마치자 나는 마음과 영혼의 고통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과정이야말로 까미노에서 겪게 되는 가장 큰 도전이었다. 육체의 고통이 줄어들수록 아니 그 고통을 통과했기 때문이라는 듯 내 마음속의 고통이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나타났다.


길을 걷는 동안 우리는 자신의 몸을 그리고 마음을 똑바로 바라보고 대면하는 일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거기에는 육체의 고통뿐만 아니라 마음의 고통까지, 내가 그것을 알고 있었든 모르고 있었든 간에 그 모든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고, 혼자 걷는 길 위에서 그것을 벗어날 방법은 없었다. 결과적으로 그 사실 때문에 내게 까미노가 더 값진 것이었다고 인정하게 해 주었다.


독일에서 온 한 아저씨가 친구에게 들었다며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까미노를 걷다 보면 세 개의 시기를 거치게 되는데 첫 번째가 육체적 시기(Physical period), 두 번째가 감정적 시기(Emotional period), 그리고 세 번째가 영적 시기(Spiritual period)이다. 그런데 세 번째는 까미노가 끝난 다음에 올 수도 있다."


까미노에서 마주하게 되는 세 개의 고통, 아니 세 개의 시기 중 나 역시 세 번째 시기를 아직 마치지는 못한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나의 까미노는 아직 현재 진행형이다. 소떼를 무서워하는 나를 구해준 오스트리아 아저씨 스테판의 말대로, 우리는 아직 '인생이라는 까미노'를 걷고 있으므로, 걸어야 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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