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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banii Dec 03. 2021

평화학 공부하기@Innsbruck

Reflection Paper, 반성문?

오늘 어떤 분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는 원인에 대해 "각자 자신들의 욕구를 정확히 표현하는 것이 비폭력 대화의 기본이래요"라는 말을 하게 되었다. 새삼 잠시 잊고 있었던 원칙이기도 한데, 갈등을 해소하는 대화는 솔직한 욕구의 표현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배웠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때 중요한 전제는 자신의 욕구를 정확히 아는 것일 터이다. 자신의 욕구를 정확히 아는 것, 즉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 내가 인스브루크 대학에서 배운 평화학의 출발점이다. 그래서 이번에 심사를 통과한 나의 두 번째 석사 논문의 2.1. 장 제목은 Finding self이다.

나를 찾아가는 과정은 너무나 길고 복잡하기 때문에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하지 말기로 하자. 다만 오늘 내게 떠오른 것은 매 학기 2주 단위의 모듈이 끝날 때마다 제출해야 했던 Reflection Paper에 관한 이야기다.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인스브루크 평화학 프로그램을 시작하기 위해 인스브루크 외곽의 산 중턱에 있는 그릴호프(티롤 주정부의 평생학습관 성격의 건물)에 도착할 때까지 Reflection Paper라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고, 당연히 무엇을 써야 하는지도 몰랐다. Reflection Paper라니 반성문이라도 쓰라는 건가.

지금 찾아보니(왜 이제서야??) Reflection paper는 특정한 논문, 강의 혹은 경험에 대해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그러나 여전히 학문적인 톤을 유지하여 쓰는 것이라고 한다. 아하~ 다행이고도 웃긴 점은 당시 나와 함께 막 입학한 동기들 모두 어떻게 이 페이퍼를 써야 하는지 잘 몰랐다는 점이다.

간혹은 조교나 선배들에게 물어보기도 했으나, '형식에 구애받지 말고 네가 느낀 대로 쓰라'는 말을 들었을 뿐이다. 여기에서 학문적인 형식은 크게 고려되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전혀 누군가의 샘플도, 요령도 모르는 채, 다른 대부분의 학생들이 그랬던 것처럼, 2주마다 수업과 워크숍을 통해 내가 느낀 바를 써나갔다. 대부분 그런 느낌을 구체적이고도, 개념적인 말로 정리하기도 했지만, 어떤 때는 온통 혼란스러운 감정이나 이해되지 않는 경험들로 가득 차 있기도 했다. 발표나 워크숍이 평가에 포함되는 과목도 있지만 어떤 프로그램은 온전히 이 paper로만 평가를 받기도 했는데 학기가 끝난 후 받아 든 성적표에는 때로는 "sehr gut(excellent)"나 "gut(good)"라고 적혀 있었다. 그때마다 "평가의 기준이 뭔지는 몰라도 영 잘못한 것은 아닌가 보다"(참으로 태평... ^^;;) 생각하곤 했다.

인스브루크에서 학생들끼리 페이퍼를 보여주거나 점수를 공유하는 일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도대체 남들은 이 페이퍼를 어떻게 쓰는지 궁금했지만 그냥 참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보다 한 학기 늦게 들어온 브라질 친구 아서(우리 모두는 영어식 발음으로 아서라고 불렀지만 아마도 포르투갈어로는 아르투르가 맞는 발음일 듯)가 자신의 페이퍼를 한번 들어보겠냐고 하더니 읽어주기 시작했다. 1주일 간 오스트리아 군에 들어가서 진행되는 네이티브 챌린지 프로그램을 끝난 후 작성한 Reflection Paper였다. 남미 사람 특유의 개방성과 자유분방함을 장착한 아서는 군대에 가자마자 왜 화장실에 아무 때나, 원하는 시간만큼 가면 안되는지(왜인지 모르지만 아서는 큰 일을 볼 때마다 샤워를 해야 했다), 왜 추워 죽겠는데 눈 덮인 야외로 나가야 하는지(그는 브라질에서 사 온 최고급 구스다운을 입고 "얘들아, 난 따뜻한 나라에서 왔다구"라고 말했다), 왜 작전 브리핑을 받는 동안에 음식을 먹으면 안 되는지(교관의 브리핑을 들으며 햄버거를 두 개째 먹길래 말렸을 뿐인데) 등등 온갖 불만을 재미있는 에피소드와 함께 폭발하듯이 적어놓았다. 아서의 낭독을 듣는 동안 우리 모두 배꼽을 잡고 웃었는데, 과연 저렇게 페이퍼를 써도 점수가 나올까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아서만큼 자신의 개인적이고도 주관적인 관점에 충실한 페이퍼를 쓰기도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고, 그것이 충족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 무척 힘들어했지만, 그 덕분에 누구보다도 더 욕구와 환경 사이의 차이를 예민하게 관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학교 측에서는 매번 2주마다 제출하는 이 페이퍼의 제출 기한을 그다음 2주로 주면서도 가능한 한 빨리 제출하라고 독려하곤 했다. 각각 모듈마다의 체험과 그 체험으로 인한 자신의 내면의 변화가 무뎌지기 전에, 혹은 사라지기 전에 글로 기록하고, 되돌아보라는 뜻이다.

30대까지는 꽤나 열심히 일기를 썼던 나는 언젠가부터 더 이상 일기를 쓰지 않게 되었지만, 예민하고도 민감하게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이라면 반성문이든, Reflection paper든 써야 했던 그 시절이 그립고도 소중해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브런치의 글이라도 꾸준히 써야 할 터인데...라고 반성으로 마무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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