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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봄 Sep 15. 2024

'이중작가 초롱', 타인의 고통에 대한 우리의 이중성

타인의 고통을 활용하는 전통적/현대적인 수단의 혼돈 시대




이중작가 초롱 - 이미상


1. 사람은 누구나 피해자가 되기도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초롱은 첫번째 소설을 씀으로써 몰카 피해를 당한 피해자들에게 또 한번의 가해를 한 가해자가 된다. 하지만, 습작품이자 관습적인 작품일 뿐이었던 연습용 소설이 제3자에 의하여 공개되고, '초롱닷컴'을 통해 조롱당하며 피해자가 된다.

초롱의 '선생'은 본인의 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소재로 씀으로써 의도치 않은 가해자가 된다. 이에 따라, 의도치 않은 피해를 받은 선생의 친구가 찾아와 선생과 후미진 벤치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상황이, 초롱 또한 소설이 공개됨으로써 의도치 않게 피해자가 된 뒤에, 가해자로 보이는 후보자인 영군을 찾아가 후미진 벤치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상황과 오버랩된다. 이처럼 서로가 가해자와 피해자가 되기를 반복한다. 그렇게 모두가 '이중적'인 위치에 놓인다.


2. 타인의 피해와 고통에 대하여 우리는 어떠한 자세를 취해야하는가.

초롱은 하나의 소재로 두 가지 소설을 썼다. 몰카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 그 주인공이였으나 첫 번째 소설은 몰카 피해자의 피해에 대한 감정, 사유 등을 철저히 배제한 이야기였고 두 번째 이야기는 반대로 그것들을 절절히 표현한 이야기였다. 두 번째 이야기로 그녀는 작가로서 등단한다.

초롱에 대한 비난은 그 문제에서 비롯된다. 첫 번째 소설에서는 그녀는 누군가의 피해를 소재로 삼아 글을 썼고, 그리고 그 소설에서 피해자인 주인공이 '감히' 가해자를 용서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우리가 과연 타인이 겪은 피해에 대한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는가.

두 번째 소설에서 그녀는 피해자의 피해에 대하여 이해하는 듯 굴며 절절한 그들의 고통을 표현한다. 그 고통의 감정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며 그녀의 소설에 성원을 보냈으나, 그러나, 누군가의 피해에 대하여 제3자가 완전히 이해한다고 할 수 있는가. 한편으로는 그것을 이해하는 듯이 표현하는 것 자체가, 피해자의 피해를 오히려 더 기만하고 이용하는 게 아닌가. 소설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누군가의 고통과 피해를 보고 느끼며 안줏거리 삼고 그것을 활용하는 모습을 보인다. 우리가 누군가의 고통에 대하여 무언가를 창작하고 소비할 때 보는 '제 3의 원'은 무엇일까.

뭉크의 작품, 현대인의 불안을 표현한 그림 중 하나


3. 피해자의 고통을 기리는 방법에 대하여.(오히려 피해자의 고통을 활용하는 미디어의 시대)

이러한 의문을 스스로 갖게 만들던 와중, 소설에서는 두 가지 인물이 언급된다. 자신이 가해자가 아님에도 억울하게 피해를 입은 자들을 위하여 스스로 가해고발자가 된 남자의 이야기. 의뭉스러워 하는 사람들에 대해 남자는 말한다. '누구나 한 명 쯤은' 비난을 받아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고 그것을 본인이 자처한 것이라고.

그리고 루리가 있다. 루리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본인이 그 피해자들처럼 '억울한' 피해를 받기를 자청한다.

이 두 이야기를 통해, 선생은 초롱에게 말하고 싶고 작가는 나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누군가는 타인의 피해와 아픔에 '차마' 공감도 하지 못하고, 그들의 고통에 대하여 본인의 잘못이 없음에도 본인이 비난과 피해의 대상이 되기를 자청한다. 그들의 고통 수행은 그렇기에 엄숙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초롱은 그 와중, 누군가의 피해와 고통에 대하여 자신의 글의 소재로 활용하여 이야기를 만들고, 작가로서 등단한다. 사실 초롱은 그들의 피해에 진심어린 관심은 없었을 것이다. 소설 내 가해자를 스스로 용서해버리거나 그 고통을 아는 체 씀으로써 이용했을 뿐이다. 즉, 보다 전통적인 이야기 표현 수단인 소설 안에서도 그녀는 작가로서의 이름을 알리기 위하여 타인의 고통을 이용했다.(그녀의 목적에 타인의 고통을 기리는 일말의 의도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러나 이러한 점을 이야기하는 초롱의 선생 또한 사실은 모순 투성이다. 그는 초롱닷컴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초롱을 조롱하고 자신의 고통을 배설한다. 초롱은 사람들이 고통에 대한 이중성을 논하고 배설하는 자유의 공간인 '초롱닷컴'의 장소 그 자체이자 아이콘이 된다. 이처럼 초롱이 받는 피해 또한 과도하다. 이처럼 우리는 미디어를 손쉽게 활용하는 미디어/매체의 시대에서, 누군가의 고통을 소재로 무언가를 창작하고 본인의 욕구를 배출하는 - 타인의 고통을 사실은 활용하는 -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내 모습, 당신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사실 소름돋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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