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봄 Oct 09. 2024

조용하고 치열하게 채우는, (아직은)티나지 않는 밤


티나지 않는 밤 - 이미상



이야기 속 수진은 병원의 간호사다. 수진이 일하는 병원의 의사가 수진과 그외 간호사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의사는 다른 간호사 보다도 수진을 내심 아끼는데, 그 이유는 그녀가 다른 이보다 순종적이고 겸손하기 때문이다. 의사는 "무언가를 하며" 그것을 "티 내듯 드러내는" 행동을 좋지않게 생각한다. 무언가를 창작한다는 것이 비현실적인 행동이며 어딘가에 취해있는 것이라 느끼는 듯 하다. 그들은 병원에서의 본인 업무를 책임감있게 수행하며 그 외의 시간들을 자신의 인생을 위한 노력으로 채울 뿐인데 자연스레 그들을 무시하는 태도는 묘한 분노까지 생기게 한다. 직접적인 비난만큼 조용한 무시 또한 그에 못지 않은 모멸감을 준다.


의사가 수진에게 느낀 그녀의 면면 중 일부는 그녀에게 실제로 있는 면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상황에 손익을 따지며 살지는 않으며, 간혹 희생하더라도 자신의 마음이 가는대로 열고 받아들이려 노력하는 자로 보였다. 그리하여 병원의 업무도, 의사의 일상적인 무시도 군말없이 받아들인다. 자신의 남자친구를 자신의 집에 살게 해주며, 구태여 돈을 받지 않는다. 그리고 그의 황당한 이야기들에도 굳이 논리적으로 따지고 들지 않는다.


하지만 수진은 매일 밤, 무언가를 능동적으로 꾸준히 한다. 세상에는 티나지 않으나 언젠가는 세상에 티를 낼 수 있는, 티가 나는 무언가를 만들어내고자 애쓰며, 충만한 밤을 가진다. 소설을 쓰겠다는 마음으로 매일 새 말을 기입하며 자신의 세계를 조용히 키우고 일구어낸다. 그 시간은 그녀만의 조용한 기쁨이자 그녀만의 사정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슬픈 것은, 그녀는 결국 소설을 쓰는 일을 중단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만두게 된 직접적인 계기인 사람 -그녀의 투고 소설에 주석을 달아주던 출판사의 편집자- 마저, 현실적인 이유로 주석 달기를 중단한다는 것이다. 편집자는 글을 보내오는 이들의 글을 읽고 주석(편지)을 다는 일을 해오며, 수진이 더 나은 글쓰기를 위해 도움이 되는 말들을 전해주었었다. 그는 그러한 일들을 꼭 해야하는 것은 아니였으나 편집자로서의 책임감, 투고자들의 노력에 대한 예의이자 수진과 같은 조용한 기쁨으로서 해왔을 것으로 짐작한다. 그러나 결국 그 일은 현실의 고단함 속에서 물질적 대가(보상)을 받지 못하는 육체적 노동이 되어버렸고, 그는 그것에 굴복했다.


또 다른 슬픈 점은, 그녀는 그녀의 남자친구에게 소설 쓰는 행위를 들키자 그와 헤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별의 자체가 슬프다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와의 이별은 그녈 위해 더 나은 선택이었다. 빨리 정리하는 것이 나을 정도로 나쁜 의미로 엉뚱하고 천연덕스러운 자였기에. 그렇지만 그녀가 함께 살아가며 그녀의 삶에 깊숙히 들인 자였는데, 결국은 그와는 그녀가 가장 애정하는 그 시간과 그 시간의 결과물(글)을 공유할 수 없는, 그 정도의 관계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에게 글을 쓰는 시간은 처음 그들이 만났을 때처럼 그녀가 그녀다워지고, 순수하게 행복해질 수 있는 시간이었음에도 그와는 그것을 공유할 수 없었던 것이다.

밤에는, 어떤 것들은 더 밝고 선명해진다

수진은 일상생활에서나, 직장에서나, 그리고 글을 쓰는 시간에서나 모두 수진 그 자체였으나 그녀가 살아있음을 느끼고 더 살아있게 만드는, 글을 쓰는 시간에 대해서는 그녀와 얽힌 주변인 누구에게도 그 자체로 인정받지 못했다. 편집자로부터는 글을 평가받지 못했고, 그의 직장 상사인 의사로부터는 말도 안되는 비아냥을 받았으며, 한때 사랑하던 남자친구와도 자연스레 이를 나누지 못했다. 그렇지만 타인들의 반응때문에 더 슬프다는 것이 아니다. 그녀가 조용히 일구던 기쁨의 시간을 지금은 멈추어 버린 것이 슬펐다.


그러나, 짐작컨대 그녀는 아마도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는 다시 용기를 내고 소설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솔직하게는, 포기하지 않았음 한다. 소설을 쓴다는 자체를 세상에 자신있게 내놓는 첫걸음을 떼었기 때문이다. 의사에게 "나는 소설을 쓴다"고 당당히 입을 뗐고, 자신의 소설을 공유할 만한 가치가 없는 남자친구는 과감히 정리했다. 그리고, 그 편집자를 직접 찾아가 맞닥뜨리고 그로부터 평가를 받지 못하게 된 이유는 그녀의 소설이 형편없어서가 아니라 그가 현실의 고단함에 굴복했음을 알고 이해하게 되었다.


오늘도 시간을 축내기 보다는 스스로 자처해서 괴롭고 행복한 글쓰기를 하고 있는 나처럼, 그래서 살아있음을 느끼는 나처럼 수진도 포기하지 않기를. 가끔은 세상에, 누군가에게 티를 내고 싶지만 티가 나지 않고, 직접적인 보상을 받지 못하여 내 노력이 의미가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에 힘들긴 하지만 결국은 이렇게 하여야 내가 나다워지고 행복하다는 것을 느끼고야 마는, 나와 수진과 같은 많은 사람들을 생각해본다. 꼭 티가 나고 보상을 받기 위해 하는 일들은 아니지만, 이 조용하나 치열한 기쁨을 누리고 그 기쁨이 언젠가는 세상에 티가 나기까지 해서 인생이 더욱 충만해지기를.


매거진의 이전글 "하긴 하는" 사람 - 한다는 것에 대한 본질적 의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