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만의 계절을 살아가기를
한때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에세이가 전국 서점을 휩쓸던 시기가 있었다. 내가 그 책을 접할 당시가 정말 나에게도 가장 고민이 많고 방황을 많이 하던 시기여서, 당시 내 상황과 맞지 않은 이야기들도 있었지만 나름 잘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그 책에 등장하는 주 대상자가 명문대, 즉 서울대를 나오기 위해 공부만 해왔던 청춘들이 겪게 되는 문제의식을 다루다 보니 그 내용에 해당하지 않은 대다수의 청춘들에겐 오히려 더 멀게만 느껴지게 되었고, 곧 책은 현실과 동떨어진 말만을 늘어놓는 ‘꼰대’가 되어 아프면 청춘이 아니라 병원을 가야지, 하는 식으로 놀림을 당하는 신세가 되어 있었다.
사실 책만 놓고 봤을 땐 옳고 그른 것은 없다. 그것을 읽는 사람의 배경, 삶, 신념, 그리고 더 나아가 시대의 흐름까지 덧붙여져 읽은 이가 누구냐에 따라서 받아들이는 건 천차만별인 것이다. 그러니 그 책은 아주 위대하지도, 아주 졸작인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누군가에겐 위로가 되었을 수도 있고, 누군가에겐 쓸모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책을 읽는 과정을 통해 스스로 괜찮은 정보와 쓸데없는 정보를 거를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그 당시의 나로서는, 청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숱한 에세이와 자기 계발 책을 읽으며 혼란의 시기를 버텨왔다. 그렇지만 사실 책을 읽을 당시에는 응원의 힘을 얻었다가도, 현실에 그렇게 열심히 반영하여 살지도 않았다. 어쩌면 꼭 그런 책들을 읽었기 때문에 잘 버텨온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그냥 살다 보니 어찌어찌 시간은 흘렀고, 그 때문에 마음이 정리가 된 것일 수도 있다. 나이 듦에 따라 자연스럽게 이십 대의 치열한 고민이 지나가 버렸는지도. 그래도 지금은 어느 정도 내 마음의 길이 자리 잡아, 그런 책들을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시기가 되자 문득 우리는 ‘청춘’이라는 단어에 너무 얽매여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청춘, 푸를 청에 봄 춘자를 쓰는 이 단어는 듣기만 해도 푸르고 싱그러운 느낌이 가득하다. 아름다운 청춘 남녀의 풋풋한 사랑, 그 무엇에도 꺾이지 않는 도전 정신과 쓰디쓴 실패, 그걸 이겨내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활력… 그 모든 것들이 청춘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일 것이다. 청춘이라는 건 물론, 외모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가장 만개하는, 모든 걸 할 수 있는 아름답고 훌륭한 시기임은 맞다. 그러나 그 단어가 우리 삶에 있어 너무 신격화되면 우리 마음속에 여러 부작용이 생기는 게 아닐까.
청춘을 낭비하면 죄악인가요?
청춘의 나이인 사람들에게는 청춘을 마치 낭비하면 안 될 것 같은 무언의 압박에 시달린다. 노는 것도, 공부하는 것도, 일하는 것도 모두 ‘빡세게’ 해야 한다는 부담감. 이 시기를 지나면 끝이야, 그러니 한 살이라도 어릴 때 해야 한다는 압박감. 어릴 때 클럽 한번 가봐야지, 어릴 때 연애도 많이 해봐야지, 어릴 때 어학연수 한번 가봐야지, 어릴 때 인턴이라도 한번 해봐야지. 이런 거 어릴 때 안 해보고 뭐했어?로 시작하는 이런 공식. 몇 살엔 뭘 해야 하고, 몇 살엔 또 뭘 해야 하고, 몇 살엔 뭘 이뤄놔야 한다는 공식들 대로 따라 하기 시작하면 3040이 된다고 해도 벗어날 수 없다. 3040에는 또 3040만의 공식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말이다.
청춘의 반대말은, ‘나이 듦’이 아닙니다.
반면 청춘의 나이대가 아닌 사람들은 이제 다시 도전할 수 없겠지, 하게 된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싶어도 나이 때문에 주춤하기도 한다. 이런 것도 다 어린애들이나 하는 거지… 이제 우리는 공부해봐야 늦었어, 이런 옷들은 어릴 때나 예쁘지, 하면서 스스로 빠지는 자괴감. 혹은 ‘마음만은 청춘’이라며 자신이 어린 마음가짐을 갖고 있다고 자부하거나, 그렇게 지내기 위해 노력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 나는 ‘마음만은 청춘’이라는 말도 참 되게 별로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나이에 맞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 것이 맞다. 청춘이라는 단어에 사로잡혀 우리는 청춘이 아니면 늙은 것, 도태되는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만이라도 청춘이어야 한다고 끊임없이 자기 검열에 빠지는 것이다. 청춘에게 걸맞은 마음가짐이란 건, 누가 정해놓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반드시 청춘이 아니어도 괜찮다.
결국 청춘이라는 단어는, 가끔은 우리 삶에 제한을 두는 족쇄 같은 것이 되어버리곤 한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월든>에는 이런 말이 있다.
어떤 사람이 자기의 또래들과 보조를 맞추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마 그가 그들과는 다른 고수의 북소리를 듣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듣는 음악에 맞추어 걸어가도록 내버려 두라.
그 북소리의 박자가 어떻든, 또 그 소리가 얼마나 먼 곳에서 들리든 말이다.
그가 꼭 사과나무나 떡갈나무와 같은 속도로 성숙해야 한다는 법칙은 없다.
그가 남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자신의 봄을 여름으로 바꾸어야 한단 말인가?
내 인생 책을 하나 꼽자면, 나는 주저 없이 <월든>을 꼽겠다. 사실 처음 읽을 때만 해도 그냥 남들이 명작이라고 하니까 의무감에 시작을 했고, 내용도 그다지 흥미롭지도 않아서 지루함도 느껴졌지만, 마지막 책을 덮을 때 즈음에 등장한 저 대목이 나를 크게 울리게 했다. 그 지루함을 견뎌낸 대가로 얻어낸 굉장한 수확이었다. 저 말로 인해 더 이상 인생의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나는 늘 한 발 뒤에서 뛰는 사람이었다. 비슷한 나이에 시작하는 다른 이들에 비해 모든 것들이 조금씩 늦었다. 그래서 더 초조한 나날들이었다. 그렇지만, 나에겐 나만의 계절이 있다. 내 봄은 남들보다 조금 늦었고, 늦은 만큼 여름도 천천히 오겠지만, 계절은 바뀔 것이다. 언젠가는. 이미 남들은 꽃피우고 열매를 맺고 있다고 해도, 나에겐 봄과 여름도 지나지 않았는데 수확의 계절을 맞이할 수는 없다. 늦게 도달했다고 해서 내 열매가 달지 않다고 할 수도 없다. 그러니 천천히, 차근차근 걸어도 괜찮다. 그리고 설령 도착한 곳이 원하는 목적지가 아니어도 괜찮다. 잠시 쉬려고 서 있는 그 자리가, 어쩌면 내가 모르고 살아온 나만의 목적지일 수도 있다.
그러니 청춘이란 것에 너무 얽매여서 스스로의 한계를 정해버리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물론 청춘의 시기는 아름답고, 소중하지만, 그것이 지났다고 해서 인생이 끝난 것은 아니니까. 우리는 청춘이 아니어도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