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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mmer Garden Jun 26. 2022

'대중'교통에서 배우는 삶의 의미

being right or being kind, choose kind


지금 다니는 회사는 자율 출근제로, 정해진 8시간의 근무 시간만 채우면 8시에 오든 11시에 오든 상관하지 않는다. 이 자율 출근제 덕분에 9시 1분에 출근할까봐 초조해할 필요가 없으며, ‘일찍 오면 일찍 퇴근할 수 있다는 것’이라는 큰 장점을 즐길 수 있다. 다만 이 시스템에는 크나큰 단점 또한 존재했으니, 장점의 정확한 반댓말, ‘늦게 오는 만큼 늦게 가야 한다’라는 명제 때문이다. 출근할때부터 시계를 ‘지각할까봐’ 보는게 아닌, 1분 1초 늦게 ‘출근 도장’을 찍게 되는 것을 걱정하게 된다. 그래서 아침 일찍 출근했다 해도, 커피 한잔 하면서 여유있게 들어가야지, 가 아니라 먼저 출근 도장부터 찍느라 앞에만 보는 경주마처럼 달려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어느 날, 나는 오후에 일찍 퇴근하고 가야하는 일정 때문에 아침 7시에 집에서 나왔다. 보통 때라면 출근에 한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8시면 도착을 했어야 하는데, 3호선에 몸을 싣는 순간 뭔가 쎄한 기운이 몰려오는 것을 느끼고 말았다. 


사진출처 '경향신문' 


사람이 이미 가득찬 3호선 열차는 그 자리에 멈춰선 채 문을 열고 있었다. 나는 갈아타는 데 딱 맞춰 온 것이라 생각하며 나이스 타이밍을 속으로 외치고 있었는데, 막상 이미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의 분위기는 예사롭지 않았다. 웅성웅성. 출근 지하철이 늘 그렇듯, 다닥다닥 붙어 서 있기 때문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앞에 서 있는 분의 핸드폰을 의도치 않게 보게 되었는데, 카톡에 정확히 ‘장애인 시위 때문에…’ 라고 적힌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장애인의 대중교통 시위. 대충 뉴스에서 보긴 했지만 그게 이렇게 체감하게 될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지하철은 20분째 그 자리서 꼼짝 않고 있었다. 30분이 지나서야 겨우 문이 닫히더니 3정거장 정도를 움직였다. 다행이라고 생각한 순간, 또 멈춰 선 지하철은 기약없이 그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곳곳에서 터져나오는 탄식과 불평 불만들. 나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이미 사람들은 각자의 회사에 지각 예고를 전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늦게 도착하면 늦게 퇴근하면 되니까. 하지만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오늘 무조건 5시에는 퇴근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그러니 8시에 도착하지 않으면…제 때 나갈 수가 없다. 그때부터 심장은 뛰고, 지금 여기서 나가서 다른 교통수단으로 바꿔야 하는 결정의 순간이 매 정거장 마다 왔다. 조금만 버텨보면 그래도 지하철이 움직이지 않을까 하던 기대가 한없이 길어져서 나는 결국 중간에 뛰쳐나와 버스를 탔다. 이미 버스에도 지하철 때문에 몰린 사람들로 인해 몇 대를 보내고나서 겨우 타야 했다. 땀 범벅으로 회사에 도착하니 시간은 9시 30분. 무려 같은 서울에서 두시간 반 만에 도착하게 된 것이다. 결국 제 시간에 퇴근하지 못하게 된 나는 반차를 써야만 했다. 이렇게 뉴스에서만 듣던 장애인의 대중교통 시위를 몸소 체험하고 난 뒤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분명 나도, 아침부터 내 일정을 온통 꼬아버린 시위에 대해 순간 좋지 않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내 그들은 이런 고통스러운 과정을 매일 겪는다고 생각한다면, 나에게는 고작 어느 하루의 에피소드 정도로 회자될 수준에 불과한 날에 불평불만을 갖는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세계의 다양한 대중교통 모습


나는 해외 여행을 가게 되면, 지하철을 타던 버스를 타던 꼭 한번은 내부 사진을 찍곤 한다. 그것은 단지 우리와는 다른 환경에 대해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였는데, 이번 기회를 통해 다시금 그 사진들을 꺼내보았다. 그 사회의 삶의 수준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이 바로 이 ‘대중교통’이라고 생각한다. 말 그대로 ‘대중’을 위한 공공의 교통. 공동의 선을 위한 사회적 약속으로 만들어진 교통이 정말 ‘누구에게나’ 혜택이 주어지고 있는지 우리는 얼마나 인지하고 있을까. 

최근에 탄 우리나라 버스. 좌석 대신 장애인을 위한 넓은 공간이 존재한다. 
스웨덴 지하철. 좌석이 옆으로 되어있지 않고 앞뒤로 보게 되어있다.
상하이 지하철. 좌석의 가장 끝 쪽은 교통약자석으로 지정되어 있다.
삿포로 지하철.


누군가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누가 장애인의 이동을 하지 말랬나? 단지 출퇴근 사람들 붐빌땐 피하라는 거지. 그렇지만 이 말에서 우리는 뭔가 잘못됐음을 느껴야만 한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자신이 가고 싶은 시간에 가고 싶은 곳을 가야하는 것이 이동권의 보장이다. 그런데 휠체어를 타고 공간을 많이 차이한다는 이유로, 왜 굳이 출퇴근 시간에 이러냐, 지나고 사람 없을 때 타라, 라고 한다는 건 엄연히 그들의 기본권을 너무나 침해하는 말인 것이다. 휠체어를 타고 있다는 것은 누군가가 안경을 쓰고 있는 것 만큼이나 그냥 그 사람의 특징일 뿐이고, 눈이 나빠질 수 있는 확률 만큼이나 누구나 휠체어를 탈 수 있다. 비장애인과 너무나 똑같은 사람이고, 그렇기에 모든 시설을 이용하는데 불편함이 없어야 한다. 함께 살아가는 것, 그것은 누군가의 어쩔 수 없는 불편함을 조금은 감수하고라도 이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앞뒤가 꽉꽉 들어차는 출퇴근 열차 안, 물론 짜증나고 화나고 힘든 것이고 이럴 때 장애인이 탄다면 당연히 휠체어가 차지하는 공간 만큼 누군가는 타지 못하겠지만, 그냥 당연하게도 다음 열차를 타는 일을 불편하긴 하겠지만 불쾌하지 않게 생각하는 것. 그 마음이 가장 중요한게 아닐까 싶다. 


영화 '원더'


영화 ‘원더(wonder)'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When given the choice between being right or being kind, choose kind.(옳은 것과 친절한 것,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면, 친절함을 택해라)



최근 우리는 너무 자신만의 정의감에 취해 내 불편함이나 손해를 조금도 감수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만 같다. 내 사는 공간에 있다는 이유로 생명인 길고양이들이나 작은 동물들을 함부로 괴롭힌다거나, 모두의 눈을 즐겁게 하는 아름다운 식물을 훼손하는 일부터 더 나아가 심지어는 아파트 외벽을 청소하는 일이 자신에게 시끄럽다는 이유 만으로 일하시는 분의 생명선을 잘라버리는 행위까지도 벌어지고 있는 현실 속에서 ‘인내심’이라는 것이 얼마나 우리에게 결핍되어지고 있는 것인가 생각하게 만든다. 한시간짜리 드라마가 웹드라마로 오니 20분이 되고, 유튜브 컨텐츠들은 10분 내외가 되고, 거기에서 더 나아가 몇십초 내 보고 마는 쇼츠 영상의 트렌드가 어쩌면 이를 반증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의 작은 배려와 인내심으로 인해 모두가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부디 그것을 선택하는 성숙한 시민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타인에게 친절하는 것은 호구되기 쉬운, 멍청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모든 것을 이기는 단 하나의 삶의 의미라고 생각한다. 세상이 변하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시선을 바꾸는 일이 훨씬 더 빠르게 세상을 바꾸는 일이라고. 그러니 타인에게 관대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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