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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보라 Dec 07. 2022

워킹맘은 아닌데 전업주부도 아니라서요.

#낫워킹맘


모르는 사람을 처음 만나는 자리는 늘 어색하다. 서점에서 글쓰기 클래스와 독서모임을 진행하면서 이 어색한 자리를 한 달에 한 번씩 겪게 되었는데 그 때마다 시키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시키게 되는 것이 바로 '자기소개'였다. 다들 어색함을 온 몸으로 표현하면서 서로 눈치만 보고 있을 때 사회자처럼 나서서 '우리...서로 자기소개할까요'?'라고 이야기하면 일동 숨을 '헙'하고 소리내서 들이마시고는 '제발 내가 1번이 아니기를'이라는 마음을 시선을 회피하는 것으로 표현한다. 그럼 나는 그 중에 랜덤으로 누군가를 꼭 지목해서 자기소개를 시작해야만 한다. 그것이 사회자의 숙명이다. 


 그럼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운을 떼는데 신기하리만큼 비슷한 어법으로 자기소개를 하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ㅇㅇㅇ 이고요. (이름이 살짝 어렵다면 이름을 이해하기 쉬운 예시를 덧붙인다. )

나이는 ㅇㅇ 살이고 (대부분 나이를 소개할 때 약간 부끄러워 한다. )

직업은 ㅇㅇㅇ입니다. (이 부분이 내가 가장 흥미롭게 듣는 부분이다.)
 

그렇다. 자기소개는 이 포맷에서 벗어나는 적이 없다. 심지어 순서도 바뀌는 일이 거의 없다. 꼭 영어를 배울 때 'How are you?" 라는 질문에 내 기분이 어떻든지간에  "Fine. Thank you. And you?"를 내뱉는 모습처럼.


이름이야 그렇다치고, 나이야 한국이니까 그렇다 치자. 그럼 직업은 왜 말하는 걸까? 어떤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 나를 가장 잘 대변해주기 때문일까? 직장에서의 모습과 직장 밖에서의 모습이 180도 다른 경우가 파다하고 일은 그저 월급을 받기 위한 수단일 뿐임에도 우리는 왜 '나'를 소개할 때 직업을 이야기하는 걸까?
 


 모두에게 당연한 이 소개법에 반기를 들고 싶은 것은 내가 제대로 정의 내려지는 직업이나 회사에 속한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대학생 신분일 때야 편하게 '학생이에요' 라고 하면 됐지만 졸업을 하고 백수인 채로 5년 정도를 보낼 때는 '취업 준비중이에요' 라는 말도 비겁한 변명처럼 들릴 때가 많았고 직장을 갖고 나서도 직장과 아르바이트의 경계가 모호한 일이거나 프리랜서로 일한 적이 많았다. '그래서 하는 일이 정확히 뭐에요?'라는 되물음에 늘 10초 정도는 머릿속으로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정리해야했다. 어디에도 제대로 소속되지 못한 채 경계에서 일하는 사람. 굳이 정의내리자면 그게 나였으니까.
 

제대로 직업을 소개할 수 있게 된 건 5년 전 비로소 4대보험을 가입시켜주는 회사에 취직하면서 부터다. 계약서를 써야 하니 일에 대한 명시도 필요했다. 그때야 비로소 '마케팅'과 '영상 편집'이라고 뚜렷하게 나의 일을 정의내릴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 자기소개 마저도 육아 휴직으로 퇴사를 하게 되면서 실효성을 잃게 되었다. 아이를 낳고 다시 백수가 되어버린 나의 소갯말은 다시 길을 잃어버렸다. 



아이를 낳고 직업을 잃은 엄마들은 어떻게 자기 소개를 하는지 아시나요?

워킹맘도, 그렇다고 전업주부도 아닌 나는 나를 어떻게 소개해야 하나요?
 


그러다 글쓰기 클래스에서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만났다. 신기하게도 우리는 그 누구도 자신의 나이를 말하지 않았고 직업도 말하지 않았다.(나는 여전히 그녀들의 정확한 나이를 모른다. 서로 '~님'이라는 호칭을 써서 6개월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세상은 직장을 다니지 않고 아이를 기르는 우리에게 '전업주부'라는 새로운 직업을 부여해주었지만 그 누구도 그 이름이 마뜩지 않았던 것일까. 아니면 모두 무의식중에 이 자리에서만큼은 그 이름을 던져 버리고 싶었던 걸까. -생각해보니 세상을 몇 도정도 삐딱하게 보는 구석이 있는 것도 우리의 공통점이었다.-



세상에는 너무나 다양한 형태의 삶이 존재하는데 엄마가 되면 일하면 워킹맘이라 불리고 일을 하지 않으면 전업주부라고 퉁쳐서 부른다. 하지만 분명 워킹맘도, 전업주부도 아닌 그 사이에 존재하는 엄마들이 있다. 나처럼, 우리처럼 말이다. 


 Not 워킹맘. 일하지 않는 엄마들.


 우리 넷을 한 카테고리에 넣자면 이렇다. 일은 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집안일'만' 하는 것도 아닌 사람들. 그 두 분류에 욱여넣기로 포함되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들. 따로 어떤 단어를 붙이는 것조차 족쇄가 될 것 같아 우리가 선택한 이름이 'Not 워킹맘'이다. 혹자는 그럴지도 모른다. 워킹맘의 반댓말이니까 전업주부랑 동의어가 아니야? 아니다. 우리의 업은 결코 '주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업 주부라니. 새삼 이 말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깨닫지 아니할 수 없다. 전업직장인, 전업자영업자, 전업회사원이라는 말이 어색한 걸 보니 과연 이상한 것이 맞다. 곱씹을수록 뜻이 궁금해서 전업주부의 뜻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니 '다른 직업에 종사하지 않고 집안일만 전문으로 하는 주부'라고 한다. 집안일을 전문으로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도통 가늠이 되지 않는다. 청소를 하고 엑셀로 정리해두거나 설거지 하기 전에 보고서라도 써야 하나? 


어떤 것을 분류하여 정의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존중한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모든 것을 대충 퉁쳐버리는 것만큼 무시하는 마음을 대변하는 행동은 없다. MBTI도 16가지로 나누는데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엄마를 고작 두 분류로 퉁 치는 건 너무하지 않은가? 게다가 그 분류의 기준이 '일'이라는 것까지 가혹하게 느껴지는 것은 정말 기분 탓일까? 워킹맘의 비애와 전업주부의 애환 대신 그 경계에 있는 수많은 엄마들의 고민과 도전은 왜 아무도 봐주지 않는 것일까. 엄마라는 딱지를 떼버리지 않아도 나로 살아갈 수 있고 일을 하지 않아도 우리는 성장할 수 있는데 말이다.


오늘도 일하는 엄마들은 엄마의 역할을 소홀히 한다는 편견과 싸우고 있고, 일하지 않는 엄마들(a.k.a 전업주부)은 집에서 노는 것 아니냐는 억측에 시달리고 있다. 세상에는 똑 부러지게 아이를 키워내며 승승장구하는 슈퍼 워킹맘의 자서전과 아이를 키우느라 자신의 인생을 놓치고 산 것에 대해 후회하는 전업주부의 반성문만 존재하는 것 같다.  


가장 평범한 엄마 네 명이 함께 써 내려간 이 교환 일기장의 다음 주자는 누가 되어줄까?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다면 그 사람이 당신이었으면 좋겠다.




**이 글은 <#낫워킹맘>에 수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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