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낫워킹맘
"여보, 나 잠깐만 컴퓨터 좀 하고 올게“
"여보, 30분만 아이 좀 봐줘.“
"여보, 여보, 여보~!"
아내가 하는 말 중에 가장 두려운 말 top3중 1위가 '여보'라더니. 나의 남편도 그 짤을 보고 하트 버튼을 눌렀을까 겁이 나는 아침이다. 나의 하루는 육아로도 바쁘지만 몇 가지 다른 일도 얽혀 있어 더욱 분주하다. 나는 다른 워킹맘들처럼 출근하지 않지만 집에서 1분거리의 서점과 집에서 재택 근무로 약간의 일을 겸하고 있고, 다른 전업주부들처럼 남편이 주는 월급으로만 생활하지 않고 나의 수익을 어느정도 벌어들이고 있는 상태다. 이 애매한 상황이 워킹맘도, 전업주보도 아닌 그 사이를 고민하게 만든 것이리라.
코로나 상황으로, 혹은 회사에서 주는 업무의 특성때문에 재택근무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육아를 대신해줄 사람이 없어서 부업처럼, 때론 취미처럼 집에서 일을 하지만 그 일에 대한 책임감이 워킹맘들보다 덜한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눈 앞에서 일을 하지 않으니 결과물로 더 보여주어야 한다는 부담이 있다. 거기에 '육아를 병행한다'라는 핸디캡때문에 결과물은 내가 노력한 것보다 늘 평가절하되기 십상이고 조금이라도 기한을 맞추지 못하면 늘 '아기 키우느라 좀 어렵죠? 아무래도 엄마들은 그렇더라고요'하는 성급한 일반화에 멋쩍은 이모티콘을 보내며 동조하는 척 해야 한다. (이러쿵 저러쿵 변명을 달아봤자 '아기 키우느라 그렇죠'라고 치부해버리니 그냥 말을 안하고 만다.) 하는 일들은 대부분 3.3% 원천징수를 떼는 단기성 아르바이트이다보니 함께 일하는 동료도 없거니와 늘 고용불안에 시달려야 하고 해고 통보는 늘 예고없이, 예의없이 날아온다. 그래도 반격할 말도 법적 근거도 없어서 그냥 그러려니 해야 하는 것이 집에서 일하는 엄마들의 고충이다.
게다가 일하는 공간이 집이다보니 집안일과 분리 되지 못한 채 설거지를 하다 말고 전화를 받고, 집안을 치우다 말고 급한 일을 처리하는 날들이 부지기수다. 아이가 어린이집을 가지 않거나 낮잠도 패스하는 경우라면 사실상 집안에서 집안일이 아닌 다른 일을 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이 뿐이랴? 엄마들에게도 하루는 24시간인데 아이는 깨어 있는 시간 내내 엄마를 찾는다. 가끔은 혼자 놀아도 되는데 꼭 옆에서 봐달라고 하는 이유는 뭘까? 그럴 땐 정말 어쩔 수 없이 텔레비전을 틀어주고 빛의 속도로 일을 마치지만 입을 벌리고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아이를 보면 내가 정말 잘하는 게 맞나 싶은 자괴감까지 들 정도다. 그냥 다 때려치우고 아이에게 온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 맞을까싶다가도 큰 월급도, 제대로 된 인정도 받지 못하는 '약간의 일'을 위해 나는 오늘도 아이를 재우고 몰래 나와 컴퓨터 앞에 앉았다.
자아실현도, 생계 유지도 아닌 이 애매모호한 분량과 가치의 일을 놓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이 행위들에 대한 의미가 조금씩 선명해진 것은 서점에서 글쓰기와 독서모임을 갖게 되면서부터다. 어느 날은 몇 개월 째 모임을 함께하고 있는 팀원들 중 엄마인 사람들에게 '이 모임이 당신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나요?'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 질문의 속뜻은 '나는 이걸로 용돈이라도 버는데 당신들은 돈을 써가면서까지 이 모임에 참석하는 이유가 대체 뭔가요?'였다. 그들은 각자의 이유를 말해주었는데 그 이유들을 듣고 이 모임들을 겨우 용돈벌이로 생각했던 내가 얼마나 초라했는지 모른다.
그들이 말한 이유는 대략 이러했다.
“매일 집안에서 아이랑만 있는데 이렇게 나와서 아이랑 떨어져 있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여요.”
“전업주부로 지낸 지 10년이 넘었는데 이제와서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신청한건데 안 했으면 그대로 살 뻔 했으니 정말 큰일 날 뻔 했지요.”
“독서모임 나올 땐 아이한테 '엄마 토요일 아침에 독서모임 나가'라고 말하고 나오는 것 만으로도 뭔가 대단한 걸 한 기분이에요.”
“그냥 좋은데. 뭔가를 하고 있는 거 자체가 좋잖아요."
뒤통수가 아니라 온 몸을 맞은 기분이었다. 엄마들이 육아와 집안일이 아닌 '다른 일'을 한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숨통이 트이는 일이고, 그대로 흘러갈 뻔한 인생을 붙잡은 일이며, 아이에게도 당당하고 스스로에게도 뿌듯함을 느낄 수 있는 일이자 그냥 좋은 일이었던 것이다. 그들의 대답을 듣고 나의 일상을 되돌아보니 나 역시도 모임을 위해 1-2시간 밖에 나갈 때 잠시 숨통이 트였고, 육아 전선에 뛰어들었음에도 예전에 하던 일에서 완전히 손을 놓지 않고 손가락 하나라도 걸쳐 놓는 것을 내심 뿌듯해 하고 있었으며, 아이를 재워 놓고 브런치에 글을 끄적이는 시간 그 자체를 좋아했다. 다시 생각해봐도 금전전 보상없이도 나는 이 일들의 대부분을 지속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 주부가 집안일이 아닌 다른 일에 눈을 돌리는 이유 중 금전적 보상이 결코 우선순위가 아니었다는 반증이겠지.
무슨 일이든, 그 보상이 적든 크든 그 순간 만큼은 엄마로서가 아닌 나의 능력을 발휘함으로 온전히 '나로서 기능하는 것'. 나의 기능을 회복하고 가져가는 것은 주부들이 지켜내야 할 아주 중요한 몫이다. 하루 8시간 사무실 책상에 앉아있지 않더라도, 키보드를 리드미컬하게 두드리고 전문용어를 섞어가며 유창하게 말하지 않더라도 어떤 일을 스스로 해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성취감이라는 달달한 열매를 맛 볼 수 있다. 그러니 엄마인 우리가 엄마로서가 아니라 나로서 어떤 일을 해내는 경험을 차곡차곡 쌓아보자.
행복은 성취의 기쁨과 창조적 노력이 주는 쾌감 속에 있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집안일에 치여 성취의 기쁨과 창조적 노력을 잃지 말자. 큰 돈을 버는 것만이 성취가 아니고 예술가가 되는 것만이 창조가 아니다. 미뤄왔던 책 한 장을 넘기는 것도 성취고 오늘 하루를 짧은 글로 정리하는 것도 창조다. 그 성취의 기쁨과 창조적 노력이 켜켜이 쌓이면 분명 행복의 모양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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