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자라게 한 것들에 대하여.
모든 생명의 근원이 물인 것처럼, 나의 물줄기가 흘러나오는 그곳은 바로 '삼척'이다.
태어나기로는 김포시의 세화의원에서 태어났으나 자라기는 5살부터 19살까지 삼척시에서 자랐다. 삼척으로 이사를 오기 전 살던 도시는 안산이었는데 그곳에서의 기억은 뜨거운 주전자를 깔고 앉아 두 다리를 칭칭 동여맸던 날의 기억과 그넷줄에 부딪혀 눈앞꼬리를 다섯 바늘 꿰맨 날의 기억처럼 뜨겁고 날카로운 기억뿐이다. 안산에서의 마지막 기억과 삼척에서의 첫 기억은 희미한 수채화처럼 기억나는 이삿날로 갈무리된다. 부슬부슬 비가 오는 날이라 '이사 가면 잘 살려나보다'하는 뻔한 이야기를 하는 어른들 사이에서 파란 포터트럭 뒷자리에 간신히 엉덩이만 붙인 채 몇 시간을 내리 실려오니 도착한 곳이 삼척이었다.
'비가 오는 날 이사 가면 잘 산다더라'라는 말을 미신처럼 믿었던 5살의 나는 삼척이 좋았다.
말마따나 어린 나이에도 눈앞꼬리와 종아리 뒤에 흉터를 남긴 안산보다야 낫겠다 싶었으리라.
삼척은 아빠가 태어난 도시였다. 인구밀도가 전국의 모든 일반시/행정시 중 가장 낮은 이곳은 사실 도시라고 말하기에는 인구수가 다소 부족하였지만 삼척시와 삼척군이 통합되며 행정상 포함된 땅이 넓어서 '군' 대신에 '시'로 불릴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왜인지 깍두기로 도시가 된 것 같은 이곳에서도 그 옛날 할아버지가 터를 잡은 곳은 근덕면 오리라는 깡시골이었다. 서울 강남 금싸라기땅은 아니어도 삼척시내 어딘가였다면 조금 나았을 텐데. 그래도 아빠는 새마을 운동 때 박정희 대통령이 지어준 집이라며 파란 슬레이트 집을 자랑스러워하셨다.(나중엔 강풍에 슬레이트 지붕이 그대로 날아가 검은 페인트를 칠한 기와지붕을 얹었지만.)
오리라는 귀여운 이름을 가진 이 동네는 해안가에 뚝 떨어져 있는 덕봉산에서 거리가 5리 정도 되어 이름이 오리가 되었다고 한다. 하기사 근덕이라는 지명도 덕봉산에서 가까워서 가까울 근을 붙여 근덕이라고 하니 이 동네는 덕봉산을 기준으로 설계가 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조금 더 내려가면 ‘멀 원’자를 쓴 원덕이라는 지명도 있다.) 덕봉산의 유래도 재미있다. 맹방 해수욕장과 덕산 해수욕장의 중앙에 떡하니 서있는 덕봉산은 산이라기보다는 섬처럼 보인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전에 큰 홍수가 났을 때 산 하나가 뚝 떨어져 나와 강을 타고 흘러와 이곳에 자리를 잡은 게 아니냐는 다소 허무맹랑한 설화를 만들어냈다. 아무도 이 이야기를 믿지 않았지만 2002년 태풍 루사가 삼척을 집어삼켰을 때 덕봉산이 진짜 섬이 된 것을 보고는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하는 생각이 들었다.(태풍 루사의 강수량은 연평균 강수량의 60%로 일 년 내내 올 비의 절반이 하루 만에 내려 도시가 물에 잠겼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정도였다.)
삼척에는 할머니가 계셨다. 한 번도 이 동네를 떠난 적이 없는 것 같은 수호수 같은 나의 할머니. 내가 처음 본 할머니의 모습은 마치 태어날 때부터 할머니였던 것처럼 할머니의 상징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고불고불한 파마머리와 굽은 등, 까맣게 그을리고 주름진 얼굴의 곰보자국, 마디가 굵어지고 끝이 갈라진 바짝 마른 손, 그리고 반의 반도 알아들을 수 없는 심한 방언까지. 나의 아빠의 어머니라고 하면 왠지 가까운 사이처럼 느껴졌지만 영원히 친해질 수 없을 것 같은 나의 할머니. 할머니와 나는 10년을 꼬박 살을 부대끼고 살았음에도 친해지지 못한 채 할머니가 92살이 되고 내가 고등학교 1학년이 되는 해에 영영 헤어졌다.
아마도 늦둥이 막내아들로 태어난 아빠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먼 옛날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할머니는 급히 늙고 야위셨을 것이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단두대에 오르기 전 하얗게 머리가 세어버린 것처럼 제깍제깍 흐르는 세월보다야 고단함이 우리를 더 늙게 만들 테니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자글자글한 주름 사이에 흙먼지가 끼어있고 손 끝은 무갈라질 대로 갈라져 아무리 깊이 패어도 피 한 방울 나지 않던 할머니가 애달프다. 나는 이제야 기억하고 싶어도 기억할 수 없는 할머니의 젊은 초상을 어루만져본다.
그러나 여전히 홀로 삼척에 사는 자신을 돌보러 내려온 자식이 막내아들이어도 장손이 늘 일 순위인 가부장적인 모습과 잠시라도 화장실 불이 켜져 있는 꼴을 못 보는 극악한 절약정신은 내가 기억하는 할머니의 본체다. 친척들이 모두 모이는 날이면 나는 늘 언니와 내가 자매인 것이 분통했다. 첫째, 둘째, 셋째 큰아빠는 사이좋게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낳았는데 어쩌다 아빠만 언니와 나를 낳았을까. 우리만 둘 다 딸이라서 우리 가족이 할머니를 부양하게 된 건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의구심은 할머니에게 끝끝내 마음을 주지 못한 원인이 되었다. 어른들의 속사정을 막내아들의 막내딸인 내가 알리 만무하지만 내 기억 속 어디에도 사무치도록 예쁨 받았던 기억이 없는 걸 보면 내가 태어난 80년대 끝자락에 팽배했던 남아선호사상은 뉴스 속 이야기만은 아니었던 듯하다.
그래도 삼척이 좋았다. 싫은 것에는 이유가 있어도 좋은 것에는 이유가 없다는 말이 꼭 맞다. 과자 한 봉지를 사려면 20분을 걸어가야 하는 깡시골이라도 집 주변 담벼락에 둘러진 부추를 따 만든 부추전이 내 입맛에는 더 맞았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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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면 잘 산다더라'라는 말을 철석같이 믿고는 이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저 잘 된 일이라 여기며 삶을 살아온 나는 그 말처럼 삶을 좀먹어가며 글을 쓰는 작가가 되었다. 좋은 일보다 나쁜 일이 더 좋은 땔감이 되는 작가가 된 후 그곳에서의 모든 불행은 다행이 되었다.
족보를 되짚어보듯 찬찬히 적어 내려 가 보려 한다.
봄이면 둑을 따라 냉이를 캐고,
여름이면 평상에 앉아 삶은 찰옥수수를 떼어먹고,
가을에는 땡감을 따다 뜨끈한 아랫목에서 우려먹고,
겨울에는 늙은 호박범벅을 매일같이 먹을 수 있었던 그곳.
그리고 그곳에서 자라 산딸기와 뱀딸기를 구분할 줄 알고, 수풀에서 토끼가 좋아하는 풀을 골라 딸 줄 아는 아이로 자란 나의 토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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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1990년대 초반에는 우리나라의 출생성비가 115를 상회하는 수준으로 상승. 자연스러운 출생성비가 105 수준임을 감안할 때 우리나라의 당시 출생성비는 왜곡되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