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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깡아지 Jul 29. 2024

로봇 INTP 남편 길들이기

하지만 길들여지는 건 나였다...



우리 부부의 MBTI는 남편은 INTP이고 나는 ISFJ로, I 한글자 빼고 전부 다르다.

물론 4개의 MBTI 요소 중 어느 하나 치우친 것은 없는 편이긴 하지만,

MBTI를 알고 나니 그 특성이 평소 서로의 모습들과 그럴듯하게 맞아떨어지는 편이다.

남편은 로봇 인팁이고, 나는 게으른 완벽주의자 인프제다.



I VS E


우리 부부는 누가 봐도 내향인이다.

사람 많은 곳을 선호하지 않고, 다수와의 모임 후에는 기가 빨린 채로 귀가하곤 한다.

(나는 결혼준비 과정 중 가장 힘들었던 게 청첩모입이었을 정도로...)


반면 하루종일 집 안에 있으면 전혀 지루하지 않고, 할 일도 놀 것도 너무 많아 즐겁다.

같이 맥주 마시며 넷플릭스도 보고, 냉장고에 들어있는 식재료로 요리도 해먹고, 밀린 집안일 해치우며 보람도 느끼고, 아무렇게나 널브러져서 시시한 장난도 치고 도란도란 이야기도 나누며

우리는 집 안에서 혼자, 또는 이젠 둘이서 에너지를 충전하는 편이다.

이 부분은 서로가 같아서 좋다.


N VS S


나는 지나치게 현실적인 편이다. 발전적이지 않은 것과 시간낭비는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남편은 과학과 기술을 업으로 삼고 있지만, 은근히 아니 다분히 몽상가 기질이 있다.

특히 게임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이러한 성향이 드러난다.


나는 게임을 즐기지 않거니와, 비현실에 불과하다고 (어쩌면 시간낭비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남편이 나와 시간을 보내고 싶다며 구입한 닌텐도 스위치를 같이 하면서도, 완전히 몰입하지 못하고 종종 시계를 보곤 한다. ㅠㅠ

남편은 게임에서 지기라도 하면 현실에서 주식을 잃기라도 한 것처럼(?) 진심을 다해 아쉬워하며 다시금 승부욕을 다잡는다.


그 밖에도 가끔 멍때릴 때 남편은 RPG 게임이나 무협지에 나올 법한 뜬금없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도 하는데,

나는 이번 주말에 뭐 하지, 뭐 먹지, 쿠팡 장바구니에 담아놓은 것 지금 결제해야 내일 올텐데, 같은 지극히 현실적인 고민을 하는 편이다.

가끔 남편의 엉뚱한 상상력에 어이없는 웃음이 나곤 한다.


F VS T


나는 감정이 앞서는 편이다.

어떠한 감정이 들어서면 아침 공복에 초콜릿 먹고 혈당 스파이크 온 것 마냥 튀어올랐다가 가라앉곤 한다.

반면 남편은 천성이 무던한 편이다.

쉽게 화를 내지 않고, 누군가를 시기하거나 미워하지도 않는다.


남편은 섬세하진 않지만, 정직하고 정확하다.

내가 원할 것 같은 것을 예측해서 짜잔 하고 주거나, 집안일도 시키지 않은 것까지 알아서 척척 해놓지는 않지만

마치 로봇처럼 아주 정확히 입력값대로 결과를 출력하기에, 예측이 가능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말의 의미를 그저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 내가 말하지 않은 것을 '억측'하지 않는다.

한 마디로 '꼬아 듣지' 않는다.

그래서 이로 인한 불필요한 감정 소모가 전혀 없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다르게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한때 '공감능력'이 화두가 된 적이 있다. 공감능력이 인간관계에서 갖추어야 할 중요한 요소이고, 공감을 잘 해주어야 상대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는.

(심지어 T는 'T발놈', 'T발 너 C야?!' 등의 밈으로 만들어지기까지 했다!)


물론 전적인 공감이 처음 관계를 시작할 때에는 중요할 수 있다.

나도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나면 공감해줘야 한다는 강박이 조금 있는 편이지만...

그런데 애인과 배우자와 같은 가장 가까운 사이에 건전한 비판(비난이 아니다)이 없다면 어떨까?

서로가 잘못 판단하고 있을 때 바로잡아주지 못한다면? 나는 그런 건 원하지 않는다.


남편과 내가 서로에게 충분한 정서적 지지를 보여주되 소신껏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관계였으면, 그래서 내가 미처 보지 못한 것을 볼 수 있는 상대의 판단력을 믿고 고민을 터놓을 수 있는 관계였으면 좋겠다.


P VS J


예기치 못하게 갑작스런 일정이 추가되었을 때, 장바구니에 담아 두었던 상품이 품절되었을 때,

어떤 양상으로든 생각해두었던 계획이 틀어졌을 때 나는 꽤나 스트레스를 받는 편이다.


반면 남편은 계획이 틀어져도 대안만 찾을 수 있다면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나머지는 가뿐히 넘기는 편이다.

이토록 타격이 없는 남편을 보면 나도 '내가 이걸로 스트레스 받는 게 사실 별 거 아닌건가?' 하면서 남편을 따라서 가뿐히 넘기게 되기도 한다.

남편을 만나고 마음이 편안해진 적이 많다.


대신 파워 J인 나의 성향은 2주 간의 유럽 신혼여행에서 빛을 발했다.

계획을 좋아하는 나는 어쩌면 막막할 수 있는 긴 여행 계획을 쉽게 시작할 수 있었고,

효율적인 동선으로 체력을 아끼고, 각종 티켓을 가성비 있게 구매할 수 있었다.

J인 내가 여행 계획의 큰 틀을 짜되, 대비할 수 없는 나머지 영역은 유연한 P의 대처에 맡기니 한결 수월했다.



남편과 나는 MBTI가 한글자 빼고 정반대지만, 오히려 반대라서 상호보완이 되곤 한다.

짝이 맞는 레고 조각이 결합하듯이, 우리의 다른 모양으로 인해 더욱 견고하게 함께하면 좋겠다.


나는 나와 다른 남편이 좋다. 나와 달라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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