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마저 허용하는, 넘치는 사랑으로
나는 실패를 두려워하는 편이었다.
내 인생에서 실패가 허용된 적이 있었나, 돌아보면 늘 없었다고 결론지었다.
실패해도 좋으니 도전해 보라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으니, 무책임하고 허황된 말일 거라고 신포도처럼 생각했고,
언제나 비교적 성공 가능성이 높은, 쉬워보이는 것만 찾아 도전했다.
그리고 내가 무엇에 도전하고 있는지 절대 주위에 발설하지 않았다.
실패하면 창피하니까. 차라리 성공하고 나서 "짜잔! 사실 그동안 이런 도전을 하고 있었는데 성공했어!" 하고 나타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나는 꼭 무언가를 이뤄내야만 나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대학생 때 강의가 없는 시간은 과외와 아르바이트로 채웠고, 모은 돈을 여행 등 값진 경험에 투자했다.
성적장학금으로 반토막 난 등록금 고지서를 부모님께 가져다드릴 때에는 묘한 쾌감을 느꼈다.
취업 준비하는, 기회비용이 될 시간이 아까워 짧게 준비해서 취업했고
직장인으로서의 삶이 적응되기 시작하니 또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헤매다가 특수대학원에 입학했다.
회사에서 가끔 월급루팡하는 시간에도 '남들 한창 커리어 쌓을 때 이래도 되나'를 고민했다.
퇴근 후에도 시간을 1분도 허투루 쓰지 않고 운동과 공부 등으로 빼곡히 채우고 나면 그제서야 안도 섞인 성취감을 느낄 수 있었다.
미라클 모닝을 변태처럼(?) 즐기고, 출장 가는 KTX 안에서도 늘 손에 무언가를 잡고 있던 나는 생산성의 노예였다.
그랬던 내가 장거리 연애를 그만두고 결혼을 하기 위해 남편 한 사람 믿고 퇴사를 하고,
그간의 치열함이 무색해질 만큼, 지루할 정도로 무의미한 시간도 보내보게 되었다.
덮어놓고 쉬다가, 프리랜서로 일을 하다가, 다른 일에 도전하겠다고 수험생활을 하다가...
남편은 졸지에 애도 없이 외벌이가 된 셈인데, 왜 나만 고생해? 불공평해, 라고 하지 않았다.
수입이 없으니 집안일이라도 혼자 다 하려고 했는데, 남편은 그런 나를 보면 벌떡 일어나 도와주려고 한다.
요즘 무슨 일 하냐는 친척의 질문에 내가 난처해하자, "내가 먹여살릴게!"라고 당당하게 외친다.
나에게 정말 과분한 사랑을 주는 남편이다.
최근 내가 꽤 자신 있게 도전했던 일에 실패했다.
실패의 쓴맛도 쓴맛이거니와, 수개월의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는데 그동안 뭐한거지, 라는 생각에 허무해졌다.
그런데 그걸 이루기 위해, 새벽에 일어나 책상 앞에 앉으려는 나를 더 자라며 다시 침실로 등떠밀었던 남편은
도전을 발설하지 않는 나와 달리, 시험장 밖에서 나를 기다리며 엄마아빠할아버지할머니 모두에게 오늘이 나의 시험날임을 떠벌떠벌(?) 이야기한 남편은!
어쩌면 내가 성공하든 실패하든 상관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나 또한 그와 상관 없이, 시작했으니 결과를 성취하고 싶었으나...)
당분간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푹 쉬라는 남편의 말에 오히려
실패하더라도, 뭐든 하고 싶어졌다.
그리고 나중에 남편이 어떤 도전을 하고싶어졌을 때, 나 또한 무한한 지지와 사랑을 주고 싶다.
일 욕심이 있는 남편이 일에 전념해야 할 시기에는, 가정의 다른 것들은 신경쓰지 않아도 되게끔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도맡아 하고
혹여나 일을 조금 내려놓고 싶다면, 소비를 줄여 그동안 누려왔던 것들을 누리지 못하더라도 상관 없으니 마음 가는 대로 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아이유 노래의 가사처럼, 남편이 선 삶이라는 무대의 어느 열렬한 관객이 되어
애정 어린 눈빛으로 지켜보다가, 무대의 막이 내리면 그저 뜨거운 박수갈채를 보내주고 싶다.
흐리거나, 시리도록 맑을
네 모든 날들의 어느 열렬한 관객이 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