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깡아지 Dec 13. 2017

사랑, 그 참을 수 없는

밀란 쿤데라,『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토마시, 가벼운 사랑


토마시에게는 정신적 사랑과 육체적 사랑이 이원론이었다. 그는 사랑하지 않아도 다른 여자들과 가볍게 "에로틱한 우정"을 나누었다. "상대방의 인생과 자유에 대한 독점권을 내세우지 않는, 감상이 배제된 관계만이 두 사람 모두에게 행복을 줄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은 어떤 여자든간에 한 여자와는 살 수 없고 오로지 독신일 경우에만 자기 자신답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의 삶에서 사랑을 배제한다"는 불문율을 지켜왔다. 


그러나 "동반 수면은 사랑의 명백한 범죄"라며 육체적 관계를 가진 후에도 절대 함께 밤을 보내지 않던 그가 테레자와는 손을 잡고 함께 잠을 잔다. 그동안 잠자리를 함께했던 다른 여자들과는 다른 감정이었던 것이다. 그는 테레자가 "바구니에 넣어져 물에 떠내려 와 그에 보내진" 사람이라 여기고,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 또한 카바레에서 자신의 동료와 춤을 추는 그녀를 보고 묘한 질투심에, 사비나의 편지를 보고 악몽을 꾸는 그녀를 보고 동정심에 휩싸이기도 한다.


저자는 "모든 모순 중에서 무거운 것-가벼운 것 모순이 가장 신비롭고 가장 미묘하다"고 말했다. "잠정적 애인들"과의 가벼움과 테레자의 무거움 사이에서 결국 그는 테레자와의 무거운 사랑을 택한다. 그러면서도 "에로틱한 우정"을 끊을 수가 없어 테레사를 고통스럽게 둔다. 하지만 점점 테레자를 두고 다른 여자와 정사를 나누면서 마음이 편하지 않고 그녀가 기다리고 있을까 봐 허둥댄다. 이런 토마시의 마음으로 모르는 테레자는 그의 바람기에 고통스러워하면서 취리히에서 프라하로 돌아간다. 토마시는 그녀를 따라감으로써 그녀에 대한 사랑을 보여준다.


프라하에서 그는 "자신의 소명이라 믿었던 모든 것을 털어버렸을 때 삶에서 무엇이 남는지 보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내면적 필연성의 무거움을 벗어던지고 의사라는 직업을 포기하고 유리창 청소부가 된다. 그러한 생활을 하며 토마시는 자유로움을 만끽하며 행복해한다. 공산주의자와 자신의 아들이 혁명가들의 석방을 탄원하는 서명을 하라고 강요했을 때에도 테레자에게 해를 끼치는 일은 절대 하지 않겠다며 거부한다. 그러나 여전히 다른 여자들을 만나는 토마시를 질투하는 생활에 환멸을 느낀 테레자는 시골 마을로 이주하자고 제안하고, 토마시는 순순히 따른다. 토마시의 사랑은 가벼워보였지만, 진심으로 테레자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들이었다.


"토마시, 당신 인생에서 내가 모든 악의 원인이야. 당신이 여기까지 온 것은 나 때문이야. 더 이상 내려갈 곳도 없을 정도로 밑바닥까지 당신을 끌어내린 것은 바로 나야. … 나는 잃은 것이 아무것도 없어. 당신은 모든 것을 잃었는데."
"테레자, 내가 이곳에서 얼마나 행복한지 당신은 모르겠어? … 내게 임무란 없어. 임무도 없고 자유롭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얼마나 홀가분한데."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원작으로 한 영화 <프라하의 봄>



테레자, 무거운 사랑


테레자는 토마시가 정절을 요구한 것은 아니었음에도, 자신이 정절을 지켜야만 토마시가 자신을 사랑해줄 것이라 믿었다. 그리고 자신이 그에게 특별한 존재였음을 알지 못한 채 토마시가 ‘가볍게’ 만나는 모든 여자들을 질투했다. 어린 시절 테레자의 어머니는 알몸으로 집안을 돌아다녔고, 나체에 대한 테레자의 수줍음을 조롱함으로써 그녀 육체의 고유함을 무시했다. 


테레자는 자신과 잠자리를 가진 것과 같이 다른 여자들과도 똑같이 잠자리를 가진 토마시를 어린 시절의 어머니와 동일시하며 증오심을 느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토마시의 "가벼움을 배우고 싶"어서 사랑하지 않는 아무 남자하고나 육체적 관계를 맺어보기도 한다. 그리고 테레자는 토마시의 사랑을 받을 수 없음에 절망하여 대신 총을 쏘아 자살하게 해주는 기술자들에게 죽음을 의뢰하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한다. 이러한 질투가 둘의 관계를 엉키게 만들었다.


그녀는 토마시와 함께 정착한 시골에서 뒤늦게 그는 자신을 충분히 사랑했지만 그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부당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강아지 카레닌과 자신을 잇는 사랑은 자기와 토마시 사이에 존재하는 사랑보다 낫다는 것을 깨닫는다. 사랑을 강요하지 않고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던 "이해관계가 없는 사랑", 받지 못할지라도 주는 사랑만이 진정한 사랑이었던 것이다. 


사랑을 의심하고 저울질하고 탐색하고 검토하는 이런 모든 의문은 사랑을 그 싹부터 파괴할지 모른다. 만약 우리가 사랑할 수 없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사랑받기를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아무런 요구 없이 타인에게 다가가 단지 그의 존재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무엇(사랑)을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비나, 가벼운 사랑


사비나의 삶은 배반의 연속이었다. 신앙과 예술적 방향성을 강요하던 아버지를 배반했고, 자신을 사랑해서 이혼까지 감행한 프란츠를 배반했고, 자신을 배반했으며, 그것으로도 모자라 자신의 배반을 배반했다. 그녀는 숱한 남자들과 가벼운 쾌락을 즐겼다. 아름다음이란 "배반당한 세계"라 여겼고, 그 아름다움과 미학적 이상인 "키치"를 증오했다. 그러나 훗날 "그녀를 짓눌렀던 것은 짐이 아니라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배반의 순간들이 끝난 후에 공허를 느끼고, 그녀의 배반이 아무런 목표도 없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토마시와 테레자가 행복한 순간에 함께 죽음을 맞이했다는 소식을 듣고 무거운 사랑의 가치를 알게 된다.


오늘에 와서야 몽나파르스 묘지에서 그녀는 그의 말뜻을 깨달았다. 그녀는 자기에게 참을성이 없었떤 것을 후회했다. 함께 더 오래 있었더라면 그들은 조금씩 그들이 사용했떤 단어들을 이해하기 시작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어휘는 너무도 수줍은 연인들처럼 천천히 수줍게 가까워지고, 두 사람 각각의 음악도 상대편의 음악 속에 녹아들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나 이제 너무 늦었다.


가벼운 사랑은 비눗방울처럼 톡 터질 것만 같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프란츠, 무거운 사랑


프란츠에게 있어서 사랑은 "공적인 삶의 연장이 아니라 그 대척점"이었다. "다른 사람의 선의와 자비에 자신을 내던지고 싶다는 욕구였다. 마치 포로가 되려면 먼저 자신의 모든 무기를 내던져야 하는 군인처럼 타인에게 자신을 방기하고자 하는 욕구. 그리고 아무런 방어 수단이 없는 사애에서 언제 공격당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니 프란츠의 사랑은 "언제 공격이 올지 끊임없이 기다리는 것"이었다. "사랑한다는 것은 힘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그는 사비나에게 옷을 벗으라고 명령하던 토마시와는 달랐다.


그는 유럽 출신 혁명가였다. 공산주의 체제의 잔인성에 역겨움을 느끼고 제네바에서 교수로 평온한 삶을 살아가던 중, 사비나가 나타났다. "혁명에 대한 환상은 오래전에 시들었으나, 그가 혁명에 있어서 가장 찬탄했던 것이 잔존하는 나라" 체코에서 온 사비나는 그에게 "인간 운명의 위대성에 대한 신뢰"를 심어 주었다. 프란츠는 사비나에게 기하급수적으로 빠르게 매료되었고, 정부가 있었음에도 사비나를 사랑했다. 사비나를 만나기 위해 정부에게 온갖 거짓말을 해대면서 짜릿한 쾌감을 느꼈다.


그러나 프란츠가 정부와 이혼하고 사비나에게로 오자, 사비나는 무거운 부담감을 느끼고, 프란츠를 사랑하지만 도망친다. 프란츠는 자유분방한 사비나의 삶을 감당하지 못하다가 결국에는 자신에게도 자유를 허락하는 새로운 삶을 택한다. 그녀의 가벼움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그는 그녀가 남긴 선물 같은 자유를 누리면서 행복을 느낀다. 일부러 "캄보디아 대장정"에 가담해서도 사비나가 이걸 보면 뭐라고 할까, 하며 사비나의 존재를 생각한다. 


그 순간, 그는 불현듯 자신이 불행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랐다. 사비나라는 육체의 존재가 그가 믿었던 것보다는 훨씬 덜 중요했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그의 삶에 각인해 놓았던 황금빛 흔적, 마술의 흔적이었다. 그 누구도 그로부터 앗아갈 수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의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기도 전에 일찌감치 그의 손에 헤라클레스의 빗자루를 쥐어 주었으며 그는 그가 사랑하지 않는 모든 것을 그의 삶으로부터 쓸어내버렸다. 그의 자유와 새로운 삶이 부여한 이 예기치 못한 행복, 이 편안함, 이 희열, 이것은 그녀가 그에게 남겨 준 선물이었다.



무거움-가벼움의 모순


무거움과 가벼움, 정신적 사랑과 육체적 사랑 중 무엇이 더 중요할까. 처음에는 무겁고 지고지순한 테레자와 프란츠의 사랑이 이상적으로 여겨졌고, 가벼운 토마시와 사비나의 사랑은 욕망에 지배당한 것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오히려 테레자의 사랑이 자신을 사랑해주기를 바라는 이기심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반면 토마시는 의사라는 직업과 취리히에서의 평온했던 삶을 버리고 "그래야만 한다(Es muss sein)"며 테레자를 따라 보헤미아로 돌아올 만큼 진심으로 테레사를 사랑했다. 


그것은 필연적이었고, "필연적인 것만이 진중한 것"이었다. 사실 정신적 사랑과 육체적 사랑을 구분하고 무엇이 옳고 그르다 판단하는 것은 논의거리가 되지 않는다. 테레자처럼 도덕적인 것처럼 보이나 상대방에게 집착하여 숨이 막히게 옭아매는 사랑이 있을 수도 있고, 토마시처럼 헤픈 것처럼 보이나 꽤나 진지한 사랑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헤미아로 오고 나서 자신과 테라사가 만난 일이 가벼운, 아주 우연한 일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때 우연히 테레사가 살던 마을에 편도선 환자가 발생했고, 우연히 토마시가 수술을 맡게 되었고, 수술이 끝나고 많은 술집 중에서 우연히 테레사가 일하던 술집에 들어갔던 것이다. 그래서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었는데..."라는 생각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떤 한 사건이 보다 많은 우연에 얽혀 있다면 그 사건에는 그만큼 중요하고 많은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 우연함도 무거움이 될 수 있었다.


체코의 민주화운동, 프라하의 봄 (이미지 출처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hilo515/223015144310)



영원회귀

인생이란 한번 사라지면 두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한낱 그림자 같은 것이고, 그래서 산다는 것에는 아무런 무게도 없고 우리는 처음부터 죽은 것과 다름없어서, 삶이 아무리 잔혹하고 아름답고 혹은 찬란하다 할지라도 그 잔혹함과 아름다움과 찬란함조차도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선택 앞에서 우리는 고뇌하고 고통스러워한다. 그러나 어느 쪽이 올바른 선택일지는 알 길이 없다. 선택하지 않은 것을 선택했더라면 일어났을 결과를 알 수 없기 때문에 비교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선택을 하고 나서 그 선택의 가치를 스스로 만들어갈 뿐이다.


삶은 깃털처럼 가벼운 것이다. 인생이란 한 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한 번밖에 살지 못하기에, 전생과 현생을 비교할 수도 없으며, 현생과 비교하여 후생을 바로잡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한 번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 한 번만 산다는 것은 전혀 살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작가는 혁명가들을 석방하라는 탄원서에 서명하라고 강요하는 공산주의자들 앞에서 서명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토마시를 두고 "그가 올바른 행동을 하는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으나 그가 원하는 바대로 행동한다는 것은 확신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 공산주의자들은 "자신이 하는 일이 영원회귀 속에서 셀 수 없을 정도로 무한히 반복되어야만 한다는 듯 행동했"다. 마치 자신들의 행동이 유일한 "올바른 행동"이라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쿤데라는 "체코 역사가 반복될 수만 있다면, 매번 다른 가능성을 시도하여 두 결과를 비교해 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이러한 실험이 없었기 때문에 모든 추론은 그저 일련의 가설에 불과하다"라며 "올바른 행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도무지 비교할 길이 없으니 어느 쪽 결정이 좋을지 확인할 길도 없다. 모든 것이 일순간, 난생 처음으로, 준비도 없이 닥친 것이다. 마치 한 번도 리허설을 하지 않고 무대에 오른 배우처럼. 그런데 인생의 첫 번째 리허설이 인생 그 자체라면 인생에는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렇기에 삶은 항상 밑그림같은 것이다. 그런데 '밑그림'이라는 용어도 정확하지 않은 것이, 밑그림은 항상 무엇인가에 대한 초안, 한 작품의 준비 작업인데 비해, 우리 인생이라는 밑그림은 완성작 없는 초안, 무용한 밑그림이다.


니체가 그러하였듯, 쿤데라의 말은 우리 삶이 완전히 무의미하다는 허무주의가 아니다. 다만 알 수 없어 확신할 수 없고 불안하기만 한 미래를 앞에 두고 흔들리는 우리들이 대처하는 방법은 '미래가 불행할 것을 미리 알고 있더라도 지금 그렇게 할 것'을 하는 것이다. 미래에 저당잡히지 않고서 현재를 사는 것. 언젠간 이별할 것을 알면서도 혹은 나중에 되돌려받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지금 사랑을 주는 것이다. 


테레자는 강아지 카레닌을 안락사시키면서 자신이 토마시를 사랑했을 때보다 카레닌에게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은 자발적 사랑을 주었을 때가 가장 편안하고 행복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인간의 참된 선의는 아무런 힘도 지니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만 순수하고 자유롭게 베풀어질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 삶을 다시 살 수는 없으나, 지금을 좀더 나은 지금으로 만들 수는 있다.


(이미지 출처 : TvN 드라마 <이번 생은 처음이라>)


매거진의 이전글 고독한 시인의, 파리의 우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