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사실 자신에게만 주목한다.
가끔 방정리, 책상, 서가정리를 하다 보면 쓰다만 일기장이 많다. 쓰다가 말았다기보다. 그때그때 , 새로운 계획을 만들 의지가 불타올라 새로운 노트를 꺼내 들었는지 옇은 끄적거린 노트가 많다. 주제별, 분야별 분류해서 쓰기도 하고 노트별로 톤도 다르기도 하고, 다른 책에서 따온 인용구들을 모으기도 하고, 다양한 방식의 ‘시도의 노트들’이 발견되었다.
눈에 띄는 새로운 노트가 보이면, 때론 선물을 받기도 하고, 필요에 의해서 약간은 자체적으로 내부가 구획되어 있는 디자인형식을 가진 노트 등 그 노트에 어울릴 만한 내용을 담고자 야심 차게 적는 행위를 시작했었다. 그런 노트가 줄줄줄 있지만, 중간 이후에는 백지를 남기며 글이 아닌 먼지를 쌓고 있었다. (아마도 이 노트들은 ‘나의 존재의 가치는 이것인가?’라고 할지도 모른다.
정리에 대한 강박으로 , 주제별 분류형 노트를 두었지만, 나중에 정리가 쉽게 하려고 한 건데, 정작 필요한 순간에 그 노트가 그 장소에 없거나, 쉽게 말해 집에 있거나 아님 회사에 있거나 해서 (왜 자주 경험하지 않는가? 필요할 때는 안가지고 왔거나, 다른 장소에 있는) 결국, 처음의 분류법이 유용하게 되지 않는 백지를 두둑이 남긴 내가 스쳐 지나가는 공간들 곳곳에 틀여 박혀 먼지의 켜만을 적고 있었다.
그러다 다 제기고 이 two go 노트에 안착을 했다. 정말 안착을 했다. 현재까지 10번째 인 노트를 쓰고 있으니,
분류 같은 것 없이 그냥 이곳에 무조건 쓰자고, 그것이 다이어리이던, 내 전문내용이던, 에세이글이던, 스케치이던 한 노트에 단순화시켰다. 방법을 바꾼 건다. 하가지 노틀로 단순화하고, 그것을 모으자고, 그리고 그 적어놓은 노트들에서 필요한 것을 골라 다시 모아 높으면 되지 않는가 싶었다. 어쩌면 50대의 나이의 노트이다. 내 인생의 하반기라고 해야 하나 하반기 서막의 노트로 장만을 했다.
이 결정이 있고 국내에 있는 것들을 인터넷을 다시 찾아보았다. 이 two go 노트는 (이름도 잘 짓지 않았는가?) moleskine에서 나오는 노트로 종이 두께가 일단 그램수가 100g/m2으로 일반 몰스킨 노트보다 두껍다. 그리고 한 면은 무지, 다른 한 면은 줄이 쳐 있는 노트이다. 사이즈는 11.5*18cm로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아서 웬만한 작은 가방에도 가지고 다니기에 적당한다. 그리고 외부마감은 fabric으로 되어 있어서 고급스럽다. 이 노트를 처음 만난 것은 2018년 겨울 현 스텝들과 우리 사무소를 거쳐가 스텝들을 초대한 회사 크리스마스 기념 파티에 선물로 준비한 노트였다. 외부적 미관과 내부에 무지와 줄노트, 그리고 종이두께에 따른 유용성은 검증되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이노트로 평생 가야지 하는 마음은 아직 정하지 않았었다.
이 노트로 내 마지막 노트로 해야지 하는 마음이 정해지고 인터넷을 찾아보니 아뿔싸 품절 단어가 여기저기 떠올랐다. 게다가 노트가 단종이 될 거라는 이야기에 싹쓸이를 해서 사기도 했다. 죽는 날까지 내 노트는 이것에만 쓴다는 일종의 굳은 다짐으로 한꺼번에 싹쓸이를 했다. 내가 사고 싶었던 외부 패브릭 칼라는 이미 구하기 어려웠고, 아쉬움이 많지만 다른 색깔이라도 구해놔야겠다. 싶어서 미국 아마존을 다 뒤져서 싹쓸이를 했다. 그때 사놓은 개수를 들으면 기절할 것이다. 어쨌든 든든한 식량을 곳간에 가득 채운 것처럼 마음마저 풍요로워졌다. 그것은 단순히 물리적인 량을 가득히 가지고 있어서는 아니었다. 더 이상 이것을 쓸까? 저것을 쓸까? 하는 갈등의 순간이 필요 없다는 일종의 안정감에서 오는 풍요로움이었다.
자, 제목으로 돌아가보자. 왜 < 나에게로 또다시>라는 문구가 떠올려졌을까? 왜? 다이어리, 내 기록노트를 끄집어냈을까?
나의 예전 다이어리들을 다시 들쳐보면 계속 비슷한 이야기의 반복이 있음을 알게 된다. 세월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난 나 자신에 대햇 불만이 많거나, 나 자신을 학대하는 수준이었고, (이런 성향이 밖에서 일을 하는 데 있어서 더 나은 수행을 하게 해 주었는지도 몰라도 나 자신에게 학대는 학대였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고 본다. ) 답을 찾지 못한 나의 불안함에 대한 이야기의 반복이었다. 이럴 때 난 타인을 찾아보기도 했고, 다른 일에서 즐거움이 있을까 기웃거려도 보았지만 답을 찾지 못하고 나 자신에게 돌아와 결국 내 안에서 답을 찾아야 함을 알았다. 아무도, 그 무엇도 나의 불안함이나 나의 욕망을 채워주지는 못했다. 그래서 이런 기운이 들 때마다 글을 써내려 가는 것들에 < 나에게로 또다시>라는 타이틀 하에 두기로 했다.
예전에 젊었을 때는 나이 든 사람들이 어떻게 저렇게 혼자 지내지? 심심하지 않을까? 외롭지 않을까? 하는 의문을 가졌었다. 내가 나이가 들어보면 점점 내 자신을 정말 편안하게 하거나 정말 유용하지 않으면 사람들을 만나는 것 자체가 피곤해짐을 알게 된다. 차라리 나 혼자가 편해지는 것을 저절로 느끼게 된다. . 아 이래서 나이가 들면 혼자인 것이 괜찮아지는 것이구나 를 알게 된다. 매주, 하루 이틀 사이 전화를 하거나 자주 만나던 친구들도 정말로 자연히 그 횟수가 줄어도 아무렇지도 않아 지게 된다. 더 나아가 그렇게 까지 만날 친구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다고 그들과 여전히 친구가 아닌 것은 아니라 아주 뜸하게 봐도 괜찮은 것을 알게 된다.
하루하루 내 일과를 잘 끝내고, 보내고 했을 때 행복함을 느끼는 나이가 되어 버린 것이다. 사람들을 싫어하느냐? 아니다. 좋다. 그러나 사람들을 잔뜩 보고 돌아서서 올 때의 공허감은 또 다른 허무함을 느끼게 되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좋은 사람들과의 그 많은 시간이 좋은 것만은 아니라를 사실 말이다. 나 역시 그들에게 그런 존재 일 것이라는 사실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