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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작고 큰 연대기

by 태스타

치유 글쓰기


<자신의 역사를 쓰기>

Q1. 자신의 역사 연표 만들기를 해봅시다.


자신의 최초 기억부터 팩트 위주로 연표를 만들어봅시다. 예를 들면 이런거에요. 언제 태어났고, 어디서 학교를 다녔고 그 해에는 무슨일이 발생했는지. 자신의 삶을 키워드로 마인드맵을 그려도 좋고요. 쭉 나열해도 괜찮습니다.



5살

아마 아빠 친구가 있는 괌에 다 같이 여행 갔던 것 같다. 첫 가족이 떠난 해외여행.

바다가 너무 이뻤다. 이때 아빠가 내가 하고 싶었던 것보다 오빠가 하고 싶은걸 더 해줬던 기억이 난다...

6살

이쯤 대전으로 이사 갔을 텐데 기억이 없다.

7살

8살

아마 초등학교 입학하지 않았을까.

9살

10살

수지로 이사 왔다. 토월초등학교에서 3학년에 전학 오던 걸로.

11살

12살 아마 이쯤 고모가 살던 시카고에 여름 방학 때 다녀왔다. 시카고의 여름은 무척 예쁘다. 여름 향기가 가득했고, 처음 봤던 미국 사람들이 무척 신기했다. 방학 때 돌아와서 시차 적응 때문에 문학 전집을 읽기 시작. 그때부터 책을 좋아했다.

13살

초등학교 6학년. 왜 기억이 없을까.

-> 정확한 학년은 기억이 안 난다. 가장 좋았던 기억은 학교 끝나고 하교하면서 사 먹었던 분식. 학교 앞에 있었던 공원과 집 근처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같이 놀던 기억. 초등학교 고학년 때, 엄마가 식당을 하면서 그때부터 아마 정서적으로 많이 불안했다. 엄마의 부재가 컸었다. 텅 빈 집에 들어오는 게 너무 싫었다. 그때 키우던 강아지 이름이 꽃지였는데, 매일 꽃지가 그래도 나를 반겨줘서 그나마 위로가 되었다. 밥을 혼자 먹고, 졸리면 자고 그래서 생활이 불규칙해졌다. 살면서 게임했던 적이 몇 번 없었는데, 그때 게임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아마 딱히 공부하기도 싫고 혼자서 적막을 견디기 싫어서 도피식으로 게임을 했던 것 같다. 그때 나를 생각하니 너무 불쌍하다... 엄마는 엄마 나름대로 이유가 있어서 돈 벌러 나갔지만, 나로서는 많이 서운했다. 당시 친할머니가 우리를 돌봐달라고 엄마가 부탁했던 걸로 아는데, 할머니는 매몰차게 거절해서 엄마가 많이 힘들어했다. 엄마는 평생 할머니 용돈을 몇십 만원씩 드리고 있었다. 돈은 받고 싶고 아이들은 돌보고 싶지 않았던 게 할머니 마음이었을까.


14살 / 중1

문정 중학교 입학. 담임 선생님이 과학 선생님이었는데 잘해주셨음.

15살 / 중2

가장 싫어했던 중2 담임. 아마 내가 '중2'여서 일지도. 아마 이때, 신해철이 진행하던 라디오애 푹 빠졌던 기억. 그 뒤로 몇 년간 들었다. 락도 듣기 시작함.

이때였나. 도서관에서 사서를 했다. 국어 선생님이 날 좋게 봐줘서 시켜줬는데, 꽤나 쏠쏠했다. 그때 글쓰기 대회에 나갔는데, 장관상까지 받았다. 선생님이 나보고 글 쓰는 일을 해도 되겠다고 했다. 그때는 막연하게 느껴졌지만, 지금은 글로 밥 먹고 사는 '글'로노동자로 살고 있다. 지금도 그 선생님께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다. 아직도 이름이 기억난다.


16살 / 중3

아마 이때쯤. 아빠는 평생 가정 폭력을 했다. 뭐 엄마가 임신했을 때도 때렸다던 사람이니 말 다했지. 아빠는 평생 나를 때렸는데, 체벌이든 협박이든 욕이든 가정 폭력과 폭언을 일삼았다. 그런데 그때, 도저히 체벌하는 게 납득이 안되고 너무 싫어서 때리지 말라고 했다. 아마 그 뒤로 대놓고 체벌은 없어졌다. 그전까지는 목검, 골프채, 죽도 등 다양한 무겁고 두꺼운 도구들로 피멍이 들고 피가 날 때까지 맞았다. 엄마는 아빠를 말리지 못했고, 아빠는 오빠나 내가 잘못을 저지른 거에 감정 조절을 하지 못하고 분노가 일었다. 그걸 주체하지 못하고 우리를 떄리면서 풀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미친 게 아니었나.. 싶다.


17살 / 고1

아빠와 집에 있는 게 싫어서 사립 고등학교로 기숙사 있는 학교로 진학. 공부를 못하는 편은 아니어서 부담 없이 진학했다. 중3 당시 나는 애니고를 가서 시나리오를 쓰거나 영상을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아빠와 엄마의 반대가 있었다. 아마 오빠가 공부를 워낙 못했고 흔히 말하는 날라리여서 나만큼은 그냥 인문계를 가길 바랬나 보다. 지금 생각해보니 오빠는 예전부터 진짜 쓰레기였네...


18살 / 고2

처음으로 내가 우울증 약을 먹기 시작했다. 그때는 금방 지나갈 줄 알았다. 하지만, 그 이후로 10년이 넘도록 우울과 조울로 고생하고 있다. 그 당시 혼자 신경정신과에 가서 아빠와의 관계를 털어놓고 약을 받았던 날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저녁에 병원에 혼자 갔었는데, 너무 힘들었다.


19살 /고3


고2였나 고3이었나 부모님 권유로 중국 북경에 갔다. 그때 첫 해는 너무 힘들어서 매일 울었다. 한국에 돌아가고 싶던 날도 많았다. 하지만 좋은 학교를 가고 싶다는 생각으로 악착같이 버텼다.


20살 / 대 1

이 악물고 공부해서 원하던 대학에 입학. 9월 학기 시작이어서 여름에 마음 편하게 있다가 돌아갔던 기억이 난다. 당시 9월의 캠퍼스는 너무 좋았다. 공부 압박도 있었지만, 자전거를 타고 여기저기 누비며 다녔다.


21살 / 대 2

처음 맞이했던 대학교 2학년 방학 때 배낭여행을 갔다. 그 당시 옆방에 멕시코 친구가 있었는데, 방학 때 베트남에 간다고 했다. 그래서 나도 어디를 가고 싶다는 생각에 처음으로 배낭여행을 갔다. 도착지는 태국 방콕 카오산 로드. 그 해 드레드락도 해보고 쇼트커트도 해보고 하고 싶은 머리 다 해봤다. 트렌드 전문 웹진 에디터에 지원해서 정식 에디터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달이 입양!


22살 / 대 3

내 이름으로 나온 정식 출간된 잡지를 받았다. 여러 군데에서 인턴을 했다. 제일기획 자회사에서 인턴을 하고, KOTRA 베이징 무역관에서도 인턴을 했다. 휴학하지 않고 3군데에서 인턴을 하느라, 엄청 고생했던 기억이 있다.


23살 / 대 4

학교 생활은 대부분 졸업하지 못할까 두려움에 갇혀 공부했다. 실제로 중간에 잘리는 외국 학생들이 무척 많다. 대학교 생활은 불안과 우울의 연속이었다. 제대로 된 관계를 잘 맺지 못했던 것 같다. 친하던 사람들이 꽤 있었지만, 오랜 시간 혼자 있으면서 불안하고 우울하고 그 챗바퀴에서 지냈다.


24살 / 졸업

여름에 졸업했는데 부모님에게 오지 말라고 했다. 그냥 내가 이렇게 잘 못 지내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다. 어쨌든 졸업해서 한국으로 귀국.


25살/ 취업 준비 - 면접

싱가포르에서 취업 오퍼가 왔었는데, 가지 않았다. 외국에서 오래 혼자서 잘 살 자신도 없었고, 더 이상 불안한 환경에 자신을 넣고 싶지 않았다. 공채를 넣다가도 이 길이 내 길이 아닌 것 같았다. 문과생이어서 결국 할 수 있는 직군은 영업, 영업관리, 해외영업 이 정도였던 것 같다. 하지만 별로 내키지 않았다. 예전부터 광고 일을 해보고 싶어서 관련 인턴 경력을 쌓았다. 그 덕분에 외국계 광고회사에 취직하게 되었다. 국내 대기업의 보수적인 꼰대 문화는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거라는 걸 알았다.


25살이었던 것 같은데. 친오빠와 다툼이 있고 혼자 샤워하고 있는데 들어와서 목을 조르고 얼굴을 심하게 때렸다. 무방비상태에서 폭력을 당했다. 당시 오빠는 호주에 가기 전이라서, 그전까지 따로 지냈다. 얼마 전에 아빠가 날 탓하면서 그때 태훈이를 내보낸 게 자기 잘못이라 했다. 그러면서 오빠가 자기한테 연락하지 않고 그런 게 다 내 탓이라고 했다. 그냥 둘 다 쓰레기다... 오빠는 원래 돈 필요한 거 아니면 예전부터 연락을 안 하던 사람이었다..


26살/ 광고 회사에서 일 시작

엄청 바빴다. 사람들이 정시에 퇴근하는 경우를 거의 못 봤다. 다들 11시 넘어서 퇴근했고, 주말에도 많이 출근했다. 그래도 일이 재밌었고, 배우는 재미가 있었다. AP직군인 플래너로 일을 시작했다.


27살/ 광고회사 2년 차

아마 이때 인생공부 페이지를 통해 <완공>을 알게 되어서 열심히 읽고 그랬던 기억이 난다. 박사님 작가님 강연도 자주 가고, 심지어 그때 사귀던 남자 친구랑도 같이 갔다. 그리고 멘토링 프로젝트 3기에 지원해서 신박사님을 처음 만났다.


28살 / 체인지 그라운드 PD

체인지 그라운드에서 PD로 일을 시작했다. 박사님과 작가님과 같이 일하는 게 무척 신기했다. 재택근무를 하면서 서울에서 울산으로 잠깐 내려가서 3개월 동안 살았다. 그 당시 연초에 울산에 있던 엄마 아빠가 곧 이혼할 거라는 이야기를 했다. 내가 어떻게든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었다. 그래서 울산에 내려가서 엄마 아빠와 함께하는 시간을 가졌다. 설날에 안 좋았던 분위기와는 다르게 꽤나 좁은 집에서 옹기종기 나름 잘 지냈다. 그 당시 몸이 너무 안 좋았던 기억이 난다. 자주 아파서 여름에 링게를 몇 번 맞고 그랬다.


29살 / 아홉수 겪음

말이 아홉수지 그냥 그랬던 해였다. 아빠의 신경질적인 게 점점 심해지고, 저녁에 집에 들어갈 때마다 너무 가기 싫었다. 그래서 일부러 일찍 가서 먼저 밥을 먹고 방에 콕 박혀 있었다. 엄마 아빠 사이가 점점 또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불안 불안 전초 증세가 시작. 이런저런 이유로 할머니는 우리랑 더 이상 연락을 하지 않게 됨. 이것도 아빠 잘못 할머니 잘못 둘 다 큼.


30살/ 현재

명절 때 아빠한테 개취급 당하면서 맞고 숙소로 피신중. 엄마라고 딱히 뭘 도와주거나 그런 거 없음. 엄마는 이제 내 연락도 받지 않음. 최근 이것 때문에 멘털이 박살 났음. 우울하고 조울증이 너무 심해져서 살기 힘들고 죽고 싶다는 생각을 매일 함. 내가 죽어서 가족들이 평생 죄책감을 안고 살았으면. 하지만, 나는 죽을 용기도 없다는 사실이 너무 나를 슬프게 만듦. 앞으로 누굴 만나기도 무섭고 이런 내가 누굴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음. 그저 조용히 잘 지내고 싶은 작은 소망. 답답한 날의 연속... 이 날들이 빨리 끝났으면... 무언가 하고 싶은 것도 없고 삶에서 의미를 다 잃어버린것 같은 기분. 내 가족한테 버림 받았다는 사실이 나를 미치게 함.



치유 글쓰기 밀린 토픽들을 시간 날 때, 하나씩 해보는 중. 적고 나니 뭐 이렇게 우울한 연표가 있나 싶다. 특히 지금이 제일 심한 것 같다. 기분부정장애 때문에 일상이 무너지고 있다. 이 시기를 얼마나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답답한 날들이지만 해결되지 않는 날들이 계속되면서 나는 점점 지쳐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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