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기억을 갖고 살든 그 기억은 지독하게 오랫동안 당신을 따라다닌다. 당신이 그토록 그리워하던 과거의 찬란했던 모습도 바로 어제처럼 언제든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은 것처럼. 언제든 내가 날씬했던 그때를 언제나 마음만 먹으며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다.
이처럼 좋은 기억도 이토록 선명한데, 나쁜 기억은 어떡할까. 나는 언제든 내가 가진 과거에서 마음만 먹으면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지만 때로 이따금 들어오는 침투적 사고뿐만 아니라 숨 막힘은 원인도 모르고 이유도 모른다. 그것은 오로지 내가 기억을 갖고 있고 고통을 안고 있기에 나타나는 것들이다. 이렇게 치유되지 않고 오랫동안 자신에게 남은 고통스러운 기억을 '트라우마'라고 한다.
<트라우마>를 읽으면서 고통은 결코 쉽게 사라지거나 지워지지 않는다는 걸 여러 사람 그리고 여러 사례를 통해 알게 되었다. 고통스러운 기억은 사람들을 끈질기게 따라다니고, 피하려면 피할수록 끈질기게 붙어 다닌다. 사람들은 흔히 나쁜 기억에서 언제든 자신의 의지로 '단절'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생각보다 그렇게 만만한 일은 아니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트라우마에 대한 상담 및 약물 치료를 받더라도 쉽게 상처에서 헤어 나오질 못한다. 이것은 잘잘못을 따질 수 있는 범위가 아니다.
그렇게 치면, 가해자들이 더 고통스러워야 할 텐데, 대부분의 경우가 피해자가 고통을 끌어안고 지내는 경우가 많다. 속 터지는 일이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도덕으로도 판단할 수도 없고, 윤리로도 판단할 수도 없다. 그저 신이 만든 인간이라는 나약한 육체 동물이 어쩔 수 없이 타고난 운명 같은 거랄까.
책 속에서 피해자를 지독히 따라다니는 트라우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들은 무기력해지고, 힘이 빠지고, 저항할 방법도 잘 모르고, 일단 화부터 내거나, 아예 침묵해 버린다. 이런 게 트라우마를 가진 사람들이 맞닥 들이는 현실이다. 멀쩡히 회사 생활을 잘하면서도 갑자기 찾아오는 침투적 사고는 그들을 한 순간에 무너뜨리고, 무기력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래서 트라우마를 지는 사람들 중에서는 일에 과도하게 몰입하거나 따른 정신을 팔만한 무언가에 강력하게 집착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트라우마를 겪기 전과 후는 많은 게 달라진다. 웃음기가 사라진다. 그 문장의 앞에는 '이제부터'가 붙는다. 계속 앞으로 힘든 나날이 지속된다. 이렇게 트라우마를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겪은 일들에 대해 끝없이 고통받는다.
회복의 첫 번째 원칙은 생존자의 역량 강화에 있다. 생존자는 치유의 창조자이자 조정자가 되어야 한다. 다른 이들은 조언을 제공하고, 지지를 전하며, 도와주고, 애정과 보살핌을 쏟을 수는 있지만, 회복 그 자체를 마련해 주지는 못한다.
(...) 한 근친강간 생존자의 말에 의하면 "좋은 치료자는 나를 통제하려는 이들이 아니라, 나의 경험을 수용하고, 나의 행동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게 도와준 사람들이다."
<트라우마>
트라우마를 겪은 생존자는 타인의 도움과 함께 서서히 회복되기도 한다. 애정을 주고 지지를 보내지만 결국 회복 그 자체를 마련해주지는 못한다고 한다. 결국 본인의 역량을 스스로 강화하는 게 첫 단계라고 볼 수 있다. 치료자는 외상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자발적으로 달성하고자 하는 일을 완수할 수 있도록 환자를 돕는다. 그러면서 서서히 피해자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을 넓힌다.
자신이 상황을 통제할 수 있고 상황에 지배당하지 않는 걸 조금씩 인지하는 게 중요하다. 우리가 겪었던 여러 트라우마 또한 우리가 전혀 무방비한 상태에서 통제 불가능한 것들에게서 당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게 통제력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쉽게 안 좋은 상황에 빠져들고, 통제 불가능한 것들에게 쉽게 무력해진다. 그렇지만, 삶에는 어떤 것이든 여러 면이 존재하고 트라우마 이외의 것들에게서 작은 통제를 경험할 수 있다. 살아가면서 내가 오늘만큼은 꼭 지킬 수 있는 것들을 하나씩 해나가는 게 현실적으로 통제력을 기르는 방법이다.
그래서 얼마 전에 다시 운동을 등록했다. 크로스핏 박스에 아침 6시 30분에 도착하고 땀을 흘리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운동이 얼마나 우울증을 비롯한 신경 질환에 도움이 되는지 읽기만 하고 머리로만 알다가 '실감'을 하면 그 믿음의 수치는 상당히 달라진다. 이번 주에 시작해서 오늘 4일 째를 맞이했다. 체력을 올라가고 쉽게 우울해지던 시간들이 눈에 띄게 줄었다. 무엇이든 100% 완벽한 것은 없어도 확실한 것은 있다. 나에겐 아침 운동이 그렇다. 확실하게 기분을 좋아지게 해 주고 하루를 버틸 활력을 주는 것. 그렇게 내가 확실히 아는 것들을 행동으로 옮겨 실천해 나갈 때, 나는 비로소 이 오르막길을 올라갈 수 있다. 숨이 차도 버틸 수 있다.
참고 <트라우마>, 주디스 허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