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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덕후 한국언니 May 28. 2023

머물기 위해 떠나간 자

엘레나 페란테,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

도시가 오장육부에 품고 있는 분노를 표출하지 못해 안에서부터 썩어 들어가는 것 같았다. 분노가 독으로 가득 찬 고름으로 터져나오는 것 같았다. 고름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이 도시를 방문하는 모든 타지인과 나토군이 파견한 미군, 다양한 국적의 관광객 뿐 아니라 심지어는 나폴리 토박이들에 대한 적의로 가득 차 있었다. 혼란과 위험은 도시 전역에 만연했다. 대체 그런 곳에서 어떻게 살 수 있겠는가.

-21p 




제3권의 1장에서 잠깐 현재로 돌아온 레누는 릴라와 마지막으로 만났던 5년 전을 회상한다. 그때 릴라는 자기 이야기를 소설로 쓰지 말라며 '해킹'하겠다는 협박을 한다. 레누는 다시 40년 전으로 돌아간다. 그 전에, 3권을 읽기 전에 2권의 마지막 100페이지를 먼저 읽기 전에 2권을 다시 한 번 훑었고 이어지는 부분에서 다시 과몰입이 시작됐다. 이제 3, 4권이 다 있으니까 아끼지 말고 어서어서 읽어야지.


그런데 제2권의 나머지 100페이지는 힘겨웠다. 이 구간은 레누가 피사의 대학에서 비로소 자기 자신으로 거듭나는 순간이다. 내 머릿 속 릴라의 원격조종과 전남친의 그늘, 무엇보다도 나폴리 깡촌 컴플렉스를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던 레누에게 기적처럼 한 남자가 등장한다. '지킬 만한 명성이 없'는 레누에게(2권, 565p) 기사도를 발휘하는 이 남자, 피에트로 아이로타는 머지않아 레누의 남편이 된다. 그리고 어디서 많이 들어본 <얼어붙은 여자> 나폴리 버전이 시작된다.




극사실주의 소설가 아니 에르노와 4살 차이인 나폴리 4부작의 주인공 엘레나 그레코(라고 쓰고 페란테의 분신이라고 읽는다.)의 프롤레타리아 엘리트 컴플렉스가 무럭무럭 자란다. 이때까지만 해도 괜찮을 줄 알았던 계급이동-그러니까, 계급이동한 자의 정체성-이라는 것이 마구 무너져내렸다. 솔직함이 지나쳐 부정하고 싶지만 너무 닮은 곳이 많아서 속이 뒤틀리는 내레이터 레누는 마침내 작가 엘레나 그레코가 된다. 그 전에 교수 아들 피에트로는 교수직이 이미 보장된 것을 알게 된다. 레누는 그녀 이전의 최종학력이 초등학교 졸업인 집안에서 별도의 사교육을 거치지 않고 22세에 최고 점수로 문학 학사학위를 받았다. (2권, 605p) 많은 독자들이 대리만족을 했어야 할 구간에서 나는 펑펑 울었다.


릴라와 니노, 피에트로의 영향력 아래에서 그토록 솔직한 레누가 처음으로 온전히 드러내는 자부심이 너무도 익숙한 이야기라서 울었다. 레누의 처지는 아니 에르노와 더 비슷하지만 졸업하는 그 순간의 심리는 내 졸업식 그 자체였다. 피에트로 같은 사람들은 이 심리를 모를 것이다. 니노라면 알겠지.  




졸업 및 약혼선물로 피에트로에게 준 노트는 레누의 데뷔작이 된다. 예비 시어머니는 그녀의 소설을 타이핑해서 당장 출판하자고 한다. 이로써 집안의 오랜 문맹 또는 반문맹에 가까운 무지의 끈을 끊고 아무도 몰라주던 암울한 가문의 이름은 영원히 빛날 것이다. (2권, 628p) 레누는 이것조차 릴라와 함께 자란 어린시절 덕분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별거 중인 라파엘라 카라치 부인은 햄 공장에서 험한 노동에 시달리며 밤에는 룸메와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공부한다. 그렇게 제2권이 끝나고, 그 다음에 이어지는 이야기가 비교적 최근의 해킹 협박인 것이다.


한편 레누의 북토크에 갑자기 등장한 니노는 여전히 매력적이다. 니노는 평생 독자들의 분노를 유발하면서도 레누(와 그를 스쳐가는 모든 여자들)에게 평생 잊지못할 흔적을 남기고 또 남기는 존재다. 레누와 아이로타 가족들이 전세계를 향해 뻗어나가는 4부작에서, 원가족과 고향 친구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캐릭터 돌려막기의 느낌도 없지 않지만 그것이 장편의 매력이기도 하다. 저 사람은 어떻게 될까, 를 계속 궁금하게 한다. 릴라 역시 레누의 성공이 기쁘고, 그녀에게 대리만족을 느끼는 한편 스스로는 가질 수 없던 기회를 코앞에서 확인해야하니 끊임없이 상처받는다. 니노의 지나간 만행과 앞으로의 만행을 다 알면서도 애정을 담아 그의 이야기를 하는 레누에게 어서어서 릴라를 소환하라고 독촉하는 심정으로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레누와 릴라의 성인 시절인 3, 4권도 각각 600 페이지 이상인데 3권은 4일, 가장 긴 4권은 3일 만에 다 읽었다. 특히 4권의 경우 이틀 동안 300 페이지를 읽고, 삼일 차에는 나머지 370 페이지를 달리는 동안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이렇게 몰입해서 읽어보는 것이 얼마만인지.




예비 신랑에게 선물했던, 픽션을 가장한 회고록은 젊은 여성 작가 엘레나 그레코를 개방적인 예술가로 만들어버렸다. 덕분에 레누는 남자들이 다 거기서 거기라는 것을 알게 된다. 불쾌하지만 필요한 경험이었다. 그런데도 니노는 끝내 끊지 못해서 보고 있으면 답답하고, 그래서 더 현실감이 느껴진다. 홀로 날아오르는 것도 잠시, 고된 주경야독 끝에 몸이 상한 릴라는 레누를 소환한다. 릴라의 등장을 기다려왔으면서도 매번 릴라에게 긴장하는 레누를 보면 안타깝다. 어디를 가도 빛나는 릴라는 친구들과 함께 참석한 집회에서 갑자기 노동계의 아이콘이 된다.


레누가 니노의 자존감을 위해 지적 능력을 숨겨온 것처럼, 릴라는 엔초의 자존감을 위해 직장 내 성희롱과 괴롭힘을 숨겨야 했다. 내 여자를 건드린 놈은 박살내야 하는 고향 동네 남자친구들은 그렇게 든든한 '짐'이 된다. 대신 릴라는 더이상 자신의 여성성을 무기로 사용하지 않겠다 결심한다. 레누가 쁘띠 부르주아 지식인의 세계에서 초라해지는 자신을 견디는 동안 릴라는 노동계급의 심장부에서 이 세계가 허울 좋은 구호와 이론으로는 결코 뒤집히지 않으리라는 미래를 예감한다.   


레누는 '얼어붙지 않기' 위해 둘째 딸의 출산을 앞두고 두 번째 소설을 완성한다. 이번 작품은 시어머니와 릴라의 혹평을 듣고 서랍속으로 자취를 감추지만 자신에 대한 릴라의 높은 기대치를 알게 된 레누는 그 애정에 감동하고 만다. 폭풍 같은 70년대, 막 눈을 뜨기 시작한 여성들과 내로남불이 판치는 혼돈 속에서 원가족을 빙자한 릴라의 소환으로 다시 한번 나폴리에 온 레누는 다시 한번 릴라의 영향력에 자신을 가두어버린다.     




헤겔에게 침을 뱉은 카를라 론치(393-394p)에 이어 릴라를 카피하는 알폰소(492p)의 영향으로 엘레나 아이로타 부인이 된 레누는 독자적인 페미니즘 연구를 시작(506-507p)한다. 그리고 이번에는 남편의 친구로 또 한번 니노가 등장한다. 첫 소설에 숨어있는 니노의 아버지 도나토 사라토레와 다르지만 비슷하게 '대타'였던 피에트로는 이제 니노의 빛을 밝혀주는 그림자로 전락했다. 니노의 자극으로 레누는 드디어 진짜 두 번째 책을 쓰지만, 니노를 향하는 욕망은 이토록 위대한 여성작가를 끝내 뻔한 보바리즘으로 안내한다. 어쩌면 무언가가, 특히 니노가 계속 발목을 잡는 것도 주인공인 레누의 시련이자, 주재료인 릴라와 레누의 우정의 시련일 것이다.




나는 어떤 면에서는 지나치게 교육을 많이 받았고 어떤 면에서는 너무 무지했다. 나 자신을 통제하는 데 너무 익숙해져 있었다. 다른 이들의 사상과 사건을 머릿속에 꾸역꾸역 집어넣느라 열정 없는 인생을 사는 데 너무 익숙해져 있었다. 게다가 결혼과 안정적인 삶이 너무 빨리 시작될 예정이었다. 한마디로 나는 그곳에서 이미 몰락해버린 기존의 질서 체계 속에 너무 깊이 자리 잡게 된 것이었다. -85p


나디아는 자기가 노동자들을 위해 일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녀는 창문 너머로 바다가 보이는 책으로 가득한 자기 방에서 남의 직업을 두고 이래라저래라 하면서 대신 결정을 내렸다. 모든 문제의 정답을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설령 그로 인해 상대방이 길바닥에 나앉는 일이 생기더라도 말이다.

-190p 


예전에 릴라는 돈이 마르지 않는 식료품점의 마법 서랍을 열어 내게 뭐든 다 사주었다. 나는 그중에서도 릴라가 교과서를 사준 일은 절대로 잊을 수 없다. 나는 이번에는 내 서랍을 열어 그때의 도움에 보답하고 싶었다. 릴라가 나처럼 자기도 안전하다고 느끼기를 바랐다. -256p


풋풋한 어린 생명체가 나이 든 생명체를 장난삼아 흉내 내고 있었다. 우리는 결국 모두 똑같이 사랑과 증오와 욕망과 폭력이라는 짐을 지고 무대에 오르는 그림자 인형일 뿐이었다. 나는 데데를 꼼꼼히 뜯어보았다. 피에트로와 많이 닮은 것 같았다. 그에 비해 미르코는 니노와 똑같았다. -411p


나는 기분이 상했다. 그동안 키워왔던 여전사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내가 알고 있는 릴라가 정말 맞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450p


무엇인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은 어린 시절부터 나를 사로잡았지만 나는 그제야 처음으로 그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무엇인가 되기를 원했다. 그 무엇인가가 뭔지는 알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동안 무엇인가가 되기는 했었다. 릴라는 중요한 사람이 되는데 나만 혼자 뒤처질까봐 무엇인가가 되고 싶었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뭐라도 되는 것이었으니까. 나는 무엇인가 되기를 바랐지만 릴라의 영향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495p


니노를 사랑했고 결국은 니노와 사랑에 빠진 어린아이-소녀-여성은 릴라의 친구이자 피에트로의 아내이자 데데와 엘사의 어머니인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서로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555p





반복되는 사건을 빠르게 읽다보면 답답해서 더 빨리 읽게 된다. 어서어서 니노 말고 릴라에게 돌아가기를 바라게 된다.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는 나폴리를 떠난 레누가 나폴리에 머무른 릴라에게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결국 그녀들의 뗄 수 없는 관계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제 4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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